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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라
마가복음 10:46-5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다. 개신교회 전체의 생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독일인 신부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그 성(城)교회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공개토론 주제를 내걸었다.
95개 주제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항목은 이렇게 묻고 있다. ‘회개는 성사로서 행하는 일, 즉 사제의 직권으로서 수행하는 고해성사와 속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부에게 행하는 고해성사로 과연 회개와 용서가 가능한가를 물은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흔들었고, 당시 가톨릭교회를 향한 개혁에 불을 붙였다. 중세 천 년의 전통과 사제의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권위와 권력이 된 현실에 대해 루터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 실마리는 속죄의 문제였다.
종교개혁의 동기는 인간의 죄의 용서와 관련한 문제로 시작되었다. 대단한 혁명적 선언을 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로마서의 말씀을 신앙개혁의 모토로 삼았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죄의 회개와 용서, 새로운 삶을 전하였다.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는 체험에 기초하여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음을 선포하였다.
1)
종교개혁은 맹목적인 신앙으로부터 그런 깨달음과 이를 통한 믿음과 사랑, 용기를 준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지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란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찍이 “눈을 떠라”는 깨달음을 주셨다. 마가복음은 한 맹인이 눈을 뜨는 장면을 소개한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이었다. 마침내 예루살렘 길목인 여리고에 이르렀다. 서울이 가까우니 거리가 번잡하고, 사람들이 복잡하게 왕래하였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에 사람이 물밀듯 불어났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단촐하게 출발한 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일이 날성싶으니 도중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든 것이다. 그 여리고에 바디매오라는 맹인 한 사람이 있었다. 앞이 안 보이니 먹고살 방법이 없어 거지 생활을 하였다. 바디매오도 어렴풋이 예수님 소문을 들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거지가 도대체 무슨 난리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도 못들었냐고 했을 것이다.
마가복음을 가리켜 신학자 디벨리우스는 비밀현현의 책이라고 불렀다.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정체성을 밝혀나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소경이 눈 뜨는 것이다. 눈 뜬 사람들도 복음에 대해 차차 눈을 뜨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다.
이미 마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벳새다에서 맹인 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 소문이 퍼졌을 때 가장 빨리 그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맹인들이었을 것이다.
눈에 침을 발랐다고 하더라, 그게 약발이 있겠냐, 그들은 다투어 입씨름을 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감동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같은 맹인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더라.
바디매오 역시 소문에 민감하였다. 세상에 맹인이 눈을 뜨다니! 사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있어서 첫 선포를 보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바로 눈 먼 자에게 빛을 주는 일이었다.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맹인 바디매오는 그 방향을 향해 무조건 소리를 질렀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47).
복음이 내 삶의 구원과 직결된다면, 누구든지 그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붙잡을 것이다. 평생 눈이 멀었던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니, 그 절실함을 상상해보라. 처절한 외침일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남의 문제이니 시끄럽다, 잠잠하라, 방해 말라고 꾸짖었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맹인의 형편을 이해할까?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언어 3중 장애를 극복한 여성으로 유명하다. 그가 오하이오주 맹인협회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다. 스승인 설리반 메이시 부인도 함께 하였다. 설리반은 헬렌의 예민한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입술과 목을 만지며 대화하는 법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때 맹인협회 회장인 베이커 박사는 헬렌 켈러에게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헬렌 켈러는 즉각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불행입니까?”
눈은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 속담에 ‘몸이 열 냥이면, 눈은 아홉 냥’이란 말도 있다. 그만큼 눈 뜬 사람의 자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런데 멀쩡히 두 눈을 다 갖고 있는 나는 그 자유와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사는가? 행여 두 눈을 다 뜨고 살면서도 편견, 맹목, 왜곡 등 제 눈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반 소경들이 많이 있다. 두 눈으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얼마나 불행한가?
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로마서의 사도 바울처럼 끊임없이 죄의 문제와 씨름하였다. 가톨릭교회 7성사 가운데 고해성사가 있다. 사제들이 신자의 죄를 고백받고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그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루터는 마음속에 악한 마음이 들 때마다, 수도원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였다. 그런데 사죄 받고 돌아오면, 또 다른 악한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마다 또 신부에게 가서 고백하였다. 그런데 돌아오면 생각나는 여죄가 있어 다시 찾아가 고해하기를 반복하였다.
루터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어느 날은 6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하였다. 수도원에 사는 경건한 수도사가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았을까? 루터에게 죄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하나라도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 용서받지 못한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루터에게 참을 수없는 고통이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너무 자주 고해성사를 하러 가니까 담당 신부인 스타우피츠가 “루터야, 제발 죄 좀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너라”라고 하였다.
2)
아마 바디매오도 그런 절실함으로 예수님을 불렀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맹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의 인생이 절박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찾았을 것이다. 그동안 바디매오라고 눈을 뜨고 싶어 별별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번이 예수님을 만날 마지막 기회다 싶어 주변의 구박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외쳤다.
드디어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셨다. 그리고 가던 걸음을 멈추셨다. 그리고 제자에게 가서 맹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맹인 바디매오에게 다가 간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49).
아마 이 제자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을 것이다.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가 너를 부르신다. 안심하라! 넌 이제 살았다!’
이 말을 들은 맹인의 태도를 보라. 그는 즉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로 나아왔다. 겉옷은 거지에게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재산목록 1호인데, 그걸 벗어 던진 것을 보면 바디매오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율법에도 가난한 사람이 겉옷을 저당 잡으면 해질 녘까지 돌려주라고 기록한다.
이제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대화를 보라. 예수님의 질문이나 맹인 바디매오의 대답이나 참 대담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
우리 생각에는 지극히 당연한 대화 같지만, 맹인이 눈을 뜨는 일이 보통 기적인가! 그런데 예수님이나, 맹인에게나 하나님만이 눈을 뜨게 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거지는 동요치 않는 태도로 자기 믿음을 보여준다.
루터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아무리 죄를 고해하고 사죄 받았어도 그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끝없이 솟아나는 죄의식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죄의식이 얼마나 희박한지, 그저 검찰에서 기소만 안 당해도 무죄라고 생각하고, 구속되어 교도소에만 안 가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그러나 중세기는 달랐다. 죄와 벌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관심사여서 생각만 하는 일도 무겁게 여겼다. 그러기에 죄의식을 씻기 위해 ‘고행’의 방법을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생각하며 평생 벼랑 끝에서 산 사람도 있다. 벼랑이 모자라자 이젠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내가 어떻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의 수난 절기가 되면, 성당의 높은 계단을 죄를 고백하며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것도 고행 방법 중 하나였다. 죄 씻기에 골몰한 루터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성 베드로 성당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속죄를 하였다.
그때, 무릎으로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는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음성이었다. 아무리 심한 고행을 행한들 그것으로 어떻게 구원에 이르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다려라, 그리고 의지하라는 말씀이었다.
3)
이제 예수님을 만난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과연 소원을 이루었을까?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
맹인은 곧 눈을 떴다. 맹인이 눈을 뜬 일도 놀랍지만, 그가 행한 일을 보라. 그는 보게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간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문제가 해결되면 그 현장을 떠난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였다.
진리에 눈뜬 마틴 루터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선포하는 종교개혁에 불길을 당겼던 것이다. 루터는 인간에 의한 방법을 버렸다. 인간의 죄는 고행이란 행위가 아니라, 고해성사를 하는 사제의 선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씻을 수 있다는 그런 진리에 눈 뜨자, 세상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로렌 미드는 <교회의 과거와 미래>라는 책에서 만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츠빙글리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들은 우리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전혀 개신교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단지 우리가 일으켰던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부패했던 교회에 대해 우리가 외쳤던 것이 오늘에도 역시 외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모르느냐?”
요즘 교회가 맹인 노릇을 한다.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여전히 구시대적이어서 답답하다고 한다. 시대정신을 모르니 세대와 소통을 못한다. 사회에 대해 문을 닫으니, 세상도 교회에 무관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그 욕망을 실현하는 일에 악착스럽고, 편법을 일삼는다. 그건 세상을 개혁하려는 개신교회, 개신교인의 태도가 아니다.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기대를 한다. 경건하고, 절제하고, 손해도 감수하고, 다른 데서 들을 수 없는 사랑과 평화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야 한다.
사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진리에, 사랑에 눈 뜨지 않는다면 맹인의 형편과 다름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비록 멀쩡히 두 눈을 갖고도 불신, 거짓, 편견, 맹목, 왜곡에 사로잡혀 안목이 부족한 소경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비록 눈을 떴지만 하나님의 관심과 그 뜻에 어두운 맹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야 한다.
내게는 이런 신앙인다운 의지가 있는가? 내 죄에 대한 갈등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나도 변하지 않고 남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라. 마틴 루터는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눈을 떠라. 내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르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믿음과 용기를 주셔서 내 신앙과 삶을 개혁하고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