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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이를 부추기는 성경 해석을 바로잡기 위해 활동해온 그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중동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 《기독교와 이슬람 그 만남이 빚어낸 공존과 갈등》,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등을 펴낸 바 있다. (이하 사진: 인터뷰이 제공)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정당이자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공습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이스라엘-가자 전쟁이 발발했다. 한 달 넘게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가자지구 보건부가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만 명이 넘었고 그중 대다수는 민간인이며 어린이 사망자는 4천 명 이상이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11월 13일(현지 시각) 하마스와 끝까지 전쟁하겠다고 언급했다. 2006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 충돌 발생 이후, 가자지구에는 이스라엘에 의한 육상·해상 장벽이 설치되어 통행 및 교역이 제한되었으며 전기, 수도, 식량 등의 공급 또한 이스라엘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전쟁 보도를 접하고 있는 가운데, 뉴스 댓글 창과 소셜미디어에서는 저마다의 해석과 논평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김동문 선교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한 장의 사진과 글이 눈에 띄었다. 중근동 지역에 30여 년간 머물며 사역해온 그가 찍은 베들레헴 분리 장벽에 쓰인 낙서. ‘팔레스탄의 모든 사탄의 견고한 진 무너질지어다.’ 김 선교사는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했을까?”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1월 7일, 중동에 머무는 김 선교사를 줌(Zoom)으로 만났다.
- 선교사님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이집트에 일주일 있다가 지금은 요르단에 온 지 3일 됐어요. 건너편에 베들레헴, 여리고가 보이고 여기서 차를 몰고 간다면 1시간 이내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요. 코로나19 때도 요르단과 이집트를 방문했었는데 그때보다 한산해요. 관광산업이나 숙박업에 종사하는 현지인들은 상당히 당혹스러워하고 있죠. 그들 입장에서는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상황이니까요. 요르단 페트라 같은 경우 늘 성수기고, 특히나 11월, 12월은 방을 잡을 수 없는 시기인데 지금은 파리만 날려요.
지인의 가족 장례식 조문 현장
- 3주 전에 분쟁 지역인 웨스트뱅크(서안지구)를 방문하셨지요.
사마리아 지역, 여리고를 방문했고 베들레헴 분리 장벽 앞까지 갔어요. 그날은 가자지구에서 미사일이 날아왔던 날인데, 오전에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곳곳에 도로가 통제되고 공공시설이 문을 닫았던 긴급 상황이었죠. 베들레헴 분리 장벽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난민촌이 있어요. (제1차 중동전쟁 직후) 1948년도에 형성된 난민촌이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지만 팔레스타인 거주민이 아닌 난민들이 있는 곳이죠. 팔레스타인 난민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지만 소속된 국가는 없는 거예요. 동행한 분은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매체에서 보던 것과 다른 현실들을 본 거고, 처음으로 난민촌에서 난민을 만나신 거니까요. 다시 동예루살렘에 왔을 때는 극우적인 유대인들이 시위하고 경찰이 통제하는 모습들을 봤죠.
- 가자지구에도 몇 차례 방문하셨었죠?
가자지구는 2007년부터 봉쇄된 다음에는 아주 제한적인 경우가 아니면 출입이 안 되는데, 그 이전에 몇 번 다녔었죠. 동예루살렘 쪽 시내버스 정류장에 가면 가자지구 앞까지 가는 버스들이 있었어요. 이스라엘 측 보안 장벽을 통과하고 완충지대를 지나서 안에 들어가면 자발리아 난민촌이 국경 근처에 있어요. 이번에 가장 많은 폭격을 받은 곳이죠. 화면으로 보는 동네 모습은 15년 전이나 큰 차이가 없어요. 낡은 차들, 나귀들이 끄는 달구지들이 지금까지도 보이는데, 새로운 물품이 들어가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 미디어 보도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요.
보도는 좋든 나쁘든 황색 저널리즘이 있잖아요. 담담하게 현장을 드러내지 않고 좀 더 자극적인 것들을 쓰게 되는 성향은 외신이든 〈알자지라〉든 같아요. 그것도 사실의 한 부분이죠. 그런데 정보 소비자는 그것만 보거든요. 참상만 보도하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참상만 봐요. 하지만 참상보다 더 슬픈 건 일상이죠. 사람들이 그냥 죽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표정이 없어요. 가족이 죽었는데 감정에 잠겨있을 상황이 아니거든요. 슬퍼할 여유 없이 또 다른 일상을 사는 거예요. 오늘은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지만 내일 죽을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죽음을 초월한 게 아니라 조금 뒤 시간을 자기가 알 수 없다는 상태에서 겨우 이어지는 삶이죠.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하마스가 옳다, 이스라엘이 옳다, 누가 틀리다 파당을 짓는 모습을 보고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 생각했어요.
가족 전체가 몰살되고, 일가친척이 없고 소식을 제대로 전할 수도 없는 상황일 땐, 하얀 천 덮고 집단 매장을 하기도 해요. 슬퍼할 경황이 없는 거죠. 한국 언론 보도를 거의 보지 않다가 최근에 어쩔 수 없이 봤는데, 그냥 전쟁 중계를 하더라고요. 담담한 전달도 아니고 평범한 뉴스거리 중 하나처럼 느껴졌는데, 사람 냄새가 안 나는 보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셜미디어를 보면 더 화가 나는데….
- 소셜미디어의 어떤 글들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번 기회를 통해 어둠의 영에 빠진 저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임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직업 종교인들이 있어요. 그중에는 무슬림 사역하는 20-30년 차 선교사들도 있는데, 숨 막히는 순간이 많거든요. 영적인 대결, 복음의 문이 열리기를, 뭐 그런 말들. 이슬람 세계 무슬림들의 고통을 고통으로 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상황을 죄로 인한 결과들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잖아요.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기독교 색깔이 짙을수록 이스라엘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요. 가자 주민들 입장에 서보려는 시도도 많지 않죠. 단순하게 그들도 예수를 알면 좋겠다는 기도를 이 전쟁의 순간에도 하고 있는 거죠. 기도할수록 특정 그룹에 대한 혐오와 배제,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심화되는 그런 기도라면 안 하는 게 낫죠.
전쟁 종식을 위해 기도하자면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평화를 위한 기도도, 보고 있으면 기도란 게 대체 뭔가 싶은 회의감과 분노 같은 게 일어나요. 기계적 중립은 존재할 수 없는 거잖아요. ‘보호받을 자’와 ‘정신 차려야 할 권력’이 있는 거잖아요. 전쟁은 주민이, 이스라엘 예비군들이 일으킨 게 아니고, 미국 블링컨 장관이 나서도 물러서지 않고 휴전은 없다고 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같은 결정권자들이 있잖아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에 둘러쳐진 베들레헴 장벽 안에 자리한 추가 분리 장벽
- 네타냐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도 이스라엘에서 거세지고 있는데요.
이스라엘 국민들의 절반 정도는 네타냐후 정부의 불법 유대인 정착촌 확장 정책에 반대해왔고, 이전의 가자 전쟁 때도 확전을 반대해왔어요. 하마스 제거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참하게 죽임당한 것에 반대해온 거죠. 어제도 워싱턴 D.C.에서 휴전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고 뉴욕에서도 있었죠. 네투레이 카르타(Neturei Karta)라고 초정통파 유대인들도 전쟁 반대 시위를 하고요. 이 그룹의 활동은 오래됐는데, 이들은 유대주의와 시온주의를 구별해요. 1948년 이전에 오스만 튀르크 치하에서 섞여 살던 유대인들은 ‘특정’ 종교의 나라를 꿈꾸지는 않았어요. 조금 엇나간 얘길 한다면 십자군 전쟁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믿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십자군과 싸운 거거든요. 자기 땅을 쳐들어온 외부의 적과 싸운 거지 종교 전쟁이 아닌 거죠. 나라를 세우려고 했을 때도 기독교인의 나라, 무슬림의 나라 아니면 유대인의 나라를 꿈꿨던 게 아니에요. 유대주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남방 유대의 회복을 소망했고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재건을 통해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고 했던 거지,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꿨던 건 아니에요. 시온주의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유대인만의 이스라엘인 거죠.
그래서 네투레이 카르타는 시온주의자들에게 토라를 읽으라고 하죠. 억압받는 자들을 억압하는 것, 토라의 정신 아니고 야훼가 명령한 것 아니다, 왜 야훼를 앞세워서 정치질을 하느냐고요. 이들은 시온주의를 세속주의이자 야훼에 반하는 조직이고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그룹은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밀집 지역에도 있어요. 그 동네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팔레스타인 깃발들이 있고 ‘그들에게 자유를’ 같은 문구들이 회당 옆에도 붙어있어요. 인권을 위한 랍비들의 모임(Rabbis for Human Rights, RHR)이라는 NGO도 존재하고요. 토라 정신은 억압이 아니라는 거죠.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소수지만 그런 그룹들이 존재해요. 물론 이번에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긴 했어요.
-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동등하게 비판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비판은 필요하지만 동등한 관점일 수는 없어요.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독립운동하던 그룹을 생각해봐도 다 온건하지는 않았고, 민간인은 절대 안 건드리겠다는 약속도 없었잖아요.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목표는 같아도 방식과 성향 등도 모두 달랐고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독립운동을 하는 건 맞죠.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할 권리는 없어요. 백 년 넘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조상 때부터 싸워왔고 시련을 겪어왔는데도 지금도 세워지지 않은 나라니까요. 그런데 하마스라는 존재에 대해 비판하느냐 하마스의 특정 행동에 관해 비판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죠.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 이번에 벌어진 상황인 거예요.
보도에서 ‘어린이’라고 표현된 수치에는 20대 이상 성인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한 것은 맞죠. 이전에는 군사적 타격과 이스라엘 군인 몇 명 인질 삼아서 포로 교환하는 식의 전략이 있었는데, 하마스의 이번 민간인 학살은 비판받아야 해요. 그것 때문에 아랍계 쪽에서도 힘들어지는 게 이전의 방어 논리가 성립하지 않게 되거든요.
베냐민 네타냐후에 대해서도 정확한 비판이 필요한데요. 그걸 ‘이스라엘’로 표현하니까 허공에 하는 비판이 되기도 해요. 어떤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없으니까요. 네타냐후의 퇴진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실종자 가족들 모임에서도 나와요. 전시 내각에서도 불협화음이 있다는 건 한국 뉴스에도 나왔잖아요. 네타냐후는 휴전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삭제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했죠.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동시 비판한다고 하면 그건 기계적 중립이거나 양비론인 거고요. 비판한다면 그 타격의 대상이 명확해야 되고, 특정 행동을 중심으로 비판해야 한다면 더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봐야겠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객관성은 이미 없죠. 용어가 모호한데도 모호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고요.
- 언론사마다 지금 사태를 다르게 명명합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고 하거나 ‘전쟁’이 아닌 ‘충돌’로 명명하기도 해요.
최근까지도 BBC가 하마스를 부를 때 ‘militants’(무장단체)라는 부드러운 단어를 썼다가 유대인 유지들이 테러리스트로 바꾸라는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요. 한국에서도 극우적인 사람들이 많잖아요. 대화가 안 되는 집단들의 힘이 세진 거예요. 보수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옛날에는 적어도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단어를 골라서 썼다면, 요새는 대담하죠. 이스라엘 재무부장관도 팔레스타인 마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막말을 대놓고 말해요. 언론에 보도되기를 원한다는 듯이.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저는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이스라엘 군사력과 주민이 싸우는 거잖아요? 전쟁터인데 한쪽에서는 군인이 없죠.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 전쟁’이라고 해야 맞죠. 반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이라고 했을 때는 피해자가 감춰지는 거죠.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고 해야 전쟁의 공간이 있고 그 안에 있는 전쟁의 피해자가 보이죠.
- 페이스북에 일상 사진들 많이 올리시는데, 정작 전쟁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계세요. 그게 오히려 현 상황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로 들리기도 했거든요. 10년, 20년 전의 선교사 혹은 언론인 김동문과 지금의 김동문이 현장을 보는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어요.
자괴감을 많이 느꼈어요. 30년 동안 떠들면 뭐 하나, 의미 없다. 저는 지식과 정보 차원에서 현장 이야기를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고작해야 남한테는 지식과 정보가 되어버려요. 감정이 없는 차가운 지식과 정보로 수렴될 때 의미가 없죠. 오히려 이슬람 혐오를 확산하는, 선교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은 더 견고하게 확대되고 있어요.
최근 카이로와 요르단에서 사역자들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어요. 그들 모두가 전문가예요. 가자에서 미사일이 날아왔을 때, 저는 그날과 다음 날 계속 돌아다녔거든요. 그런 제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사실이 무엇인지는 그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보다, 오래전부터 건너 들은 이야기들을 사실인 것처럼 떠들고 있더라고요.
이스라엘에 있는 어떤 이들은 하마스의 도발 직후부터 제가 동의 못 할 얘기를 막 쏟아내요. 수년 동안 교제해왔던 이들인데, 평소 모습과는 다른 주장을 하더라고요. 이해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에 머물면서 처음 겪는 일이고, 더군다나 학살을 접한 거니까요. 두려운 거죠. 저는 이라크 전쟁 때부터 전쟁터에 오래 있었으니까 공포감을 느끼진 않아요. 당혹감은 느끼지만요. 그런데 후배들은 무서운 거예요. 거기에 대해 제가 설득할 자격도 없고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말하지 않죠. 그들이 겪은 거니까.
저 나름은 데이터를 갖고 있는데요. 이스라엘 정권이 위태로울 때마다 가자에서 미사일이 날아온 적이 많았어요. 심지어는 이스라엘 국영방송이 생방송 준비를 다 마치고 미사일이 날아오는 걸 라이브로 중계했거든요. 하마스가 단일 조직이 아니고 수많은 색깔이 있는 건데, 이스라엘 정권과 협업할 수도 있죠. 한국도 총풍 사건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속에서 우리가 안보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선거 때 도움이 되잖아요. 이런 때 ‘하마스의 적대적인 위협 속에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외치면 표를 얻을 수 있죠. 모든 공격이 그랬던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의심받을 여지가 큰 사건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했어요.
- 한국교회가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어떻다고 보시나요?
이상할 정도로 친유대주의적으로 큰 흐름이 변해가요. 랍비들의 성경 읽기 같은 책도 옛날보다 더 많이 보죠. 그들이 구약과 히브리어 능통하다, 그들의 해석으로부터 배울 게 많다, 이런 얘기가 옛날보다 많아졌어요. 그런 학자들이 최근에 많이 늘어나는 건 사실인데 가져다 퍼 나르는 사람들도 늘어난 건 사실이에요. 중동 지역 선교의 역사가 40년이 넘는데, 이슬람권에서 선교하는 사역자들의 다수는 이슬람 혐오예요. 아랍 지역에서 공부했던 사람들 중에서 아랍에 대한 우호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은 낮아요. 한편, 이스라엘 쪽에서 공부했던 분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이들이 절대다수이죠. 이스라엘에서도 공부하셨던 분들은 많이 늘어났고, 매체나 한국교회의 접속이 훨씬 넓어졌고 다양해졌죠.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처럼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이 있다라는 공통분모가 있잖아요. 훨씬 더 우호적인 느낌들이 있는 상태죠. 교단 출신과 관계없이 교리로 물어보면 세대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는데 몸으로는 시온주의적 입장에 기우는 게 더 넓어진 부분도 있고, 제3성전을 지지하는 한국인 그룹도 있죠. 온라인 운동도 꾸준하게 일어나고 유대인 귀환 운동도 하면서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것도 있죠.
무슬림 선교하는 이유도 유대인을 시기케 하는 일에 의해서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들의 목적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이슬람의 진들을 깨뜨리는 거예요. 무슬림들이 돌아오면 유대인들이 자극받아서 유대인들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무슬림 선교한다는 사람이 무슬림에 대해서 이렇게 폄훼하는 짓을 스스럼없이 할까 싶지만, 그 사람들에겐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놈들이 예수를 몰라서 저 모양으로 사니까 저놈들 바꾸기 위해서는 예수 믿어서 저 인간들도 사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선교할 수도 있어요. 가장 사람 냄새가 나야 할 공간이 선교이고 일상이잖아요. 사람 냄새가 없어요. 성경 읽기에, 설교 들을 때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나요? 느껴지지 않잖아요. 성경을 보면서도 분명히 고통당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고통을 느끼려고 하거나 고통에 관해서 얘기를 안 하잖아요. 공감하는 교육이 교회 속에 드물었고 지금도 드물고 앞으로도 드물 것 같은 상황에서 사건에 담겨 있는 어떤 내러티브를 읽어내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죠.
가자 전쟁 반대한다고 성명서를 낸 그룹들이 있잖아요. 끼리끼리 모여서 성명서 쪽지를 올리는 거잖아요. 당사자 또는 당사자일 수 있는 이들 앞에서 발표하지 않잖아요. 최근에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1주기 때 유가족을 위로한다고 어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면서 정작 유가족을 만나지 않았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요? 가자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도 있었는데, 거기 참여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게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도 당사자들이, 팔레스타인 출신들이 있죠. 그냥 아랍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출신들 위로하고 격려하는 거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런 구체성은 없이 선언만 하는 거죠. 물론 선언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요? 그래서 저는 상당히 냉소적인 거죠.
- 인터넷이 확산되고 소셜미디어가 막 생길 때, 새로운 사실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슬림 차별하지 않을 거야, 편견이 걷히겠지 하는 그런 희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가짜 뉴스가 돌아다닐 때도 사람들이 이 정도는 스스로 필터링할 수 있겠지 하는 희망도 있었고요.
말한 대로 자괴감이에요. 이슬람 가짜 뉴스 관련해서 어지간한 경우는 팩트 체크 관련해서 제가 대응했던 것들이에요. 근데 그런 거 활용 안 되거든요. 안 봐요. 이슬람 포비아 반대하는 글도 올라오지만, 전체 그림 속에서 이건 그냥 하나의 글일 뿐이고 잊히는 거예요. 다른 목소리가 더 크니까. 일반 매체에서 팩트 체크를 인용을 할지언정 교회는 관심이 없고요. 손가락 하나 잠깐 건드리면 바꿀 수 있는 건데 그것도 못 바꾸는 현실이죠.
좀 더 의식이 있다는 경우에도 실천력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이 있는 교회와 접점을 찾을 때 제가 사용했던 카드가 성경 체험이었어요. 예수님도 중동 사람이고 거기에는 의식주가 담겨 있다, 이런 배경을 알면 이 본문이 새롭게 보이지 않느냐. 소품도 늘어놓고서 실제 실물을 보여줬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공감하지 못하고 사람 냄새를 못 느꼈던 것에 대해 문제를 좀 느끼기를 원해서 접근했지만 이 우회 전략도 안 먹혀요. 그냥 좋은 책을 소비하고 거기서 정보만 챙겨가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어떤 사태에 대해서 최소한도로 중립적으로 보려고 하는 상황이 늘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됐어요.
- 그래도 지금 현장으로 가셨잖아요.
뭘 하겠다는 거 없어요. 제가 이런다고 뭐 나아지는 거 없고요. 어떤 기대감도 없는데 숨을 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것뿐이에요. 또 다른 한 가지는, 나 스스로 업그레이드는 쉽지 않지만 업데이트라도 하자는 거예요. 업데이트를 간접적인 데이터로 하면 나조차도 정보 찌꺼기에 지배받겠다 싶은 거죠. 그러지 않으려면 발바닥으로 고생하는 거고, 좀 더 사람들의 일상 공간에 더 들어가 있어야 감이 떨어지는 정도를 줄일 수 있다는 거예요.
- 현장 ‘데이터’는 어떤가요?
요즘 현지인들 만나면 전쟁 관련 얘기를 하긴 하지만, 길게 안 하더라고요. 저는 그 느낌들을 알아요. 이런 얘기를 하는구나. 제 데이터를 2023년 11월의 것으로 바꾸는 것뿐이에요. 지금 이야기는 지금의 데이터로 얘기를 해야 하니까요.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이라도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런 차이들을 분별하고 싶은 거죠. 현장 접근이 가능하면 더 확인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요.
- 냉소적이라고 표현은 하셨지만, 계속 고민하고 기도하실 텐데, 어떤 걸 소망하시는지 궁금해요.
오래된 질문이면서 지금도 던지는 질문이에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잖아요. 이루어지지 않는 정의 공수표를 기도 듣는 그분이 엄청나게 남발한 건지, 그분의 이름으로 한국교회가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됐거든요. 정의는 당대에 당사자에게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일은 성경에서도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고,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죠.
그런데 지금 정의를 얘기한다면 그건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저놈들을 심판할 거라고 하는데, 언젠가가 언제가 될까요? 당사자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잖아요. 지금 고통당하는 자가 그 고통을 벗어나거나, 고통의 가해자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한 양상이죠. 그런데 피해자를 보호하지도 않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없는 상황에서 정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게 무엇일까 할 때… 그냥 쉽지 않아요.
팔레스타인 이슈나 중동 이슈를 30-40년 접하면서 느끼는 건, 결국 당사자한테는 진짜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분명히 앞에서 죽었잖아요. 할 말이 없거든요. 지금 고통받는 사람한테 미래의 정의를 가져다가 팔아먹을 힘이 없어요. 그것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입바른 소리로 어떤 말이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저 스스로 하니까 더 말하지 못하는 거예요.
중동 사람 만날 때 그냥 슬픈 얘기를 안 해요. 힘든데 힘든 얘기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쓱 지나갈 수밖에 없죠. 자기가 죽을 수도 있었고 갑자기 죽음이 닥친다는 걸 알면요. 저 같은 경우는 도망가거나 피할 수 있는데, 당사자는 그것도 안 되죠.
1948년도에 난민이 된 조상 때문에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2023년 10월, 11월 전쟁으로 또 난민이 됐는데 또 죽어가요. 근데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들이 느끼는 그 절망감과 자괴감과 무덤덤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숨 막힘을 저는 표현할 수 없거든요. 트라우마라는 걸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트라우마가 만연한데, 한쪽에선 전쟁이 하나의 놀이가 되고 죽어 넘어가는 것이 하나의 장난으로 중계되는 분위기를 접하면서 당사자한테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용기가 전혀 없어요.
사람들이 이쪽 동네를 둘러보게 될 그런 상황들이 있으면 다른 무게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위로하는 말보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내는 게 어떤 무게일까, 이런 것도 좀 느끼지 않을까 싶고요.
-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자기반성인데요. 궁금한 게 생기면 막 찾아보는데 앎에 그치고 ‘나는 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건 어차피 안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상황에서는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 자체가 발칙한 거거든요. 내가 갖는 모호함들을 마주하거나, 내 말과 행동에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정답을 쓰거든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드러나지 않은 사실과 배경까지 들추어 분석하고 결론으로 대안까지 다 뽑아내잖아요. 저는 지금 답을 찾기보다는 힘들고 자괴감이 생길지라도 규정짓지 않는 모호함 속에 남아있는 길을 택한 거죠. 비난받아도요. 규정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야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여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다 채워버리는 데 익숙해요. 특히 교회는 너무 똑똑하고, 우리 기독교 지식인 엘리트층들은 답을 말해주는 데 탁월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 보려는 시도 자체가 필요 없어요. 관념적 역지사지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입장 바꿔보기는 안 되는 거죠.
저와 동행한 노학자 중에는 현장에 와서 그들의 입장에 서보니까, 학자로서 책 속에서 파묻혀 얻은 결과물을 바로잡아야겠다고 느낀 분도 있었어요. 궁둥이 붙이고 앉아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다른 공기를 느끼신 거죠. 그분이 훌륭하신 거예요. 한국의 대다수 목사나 교수들은 그렇지 않죠.
- 한국에 있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 곁에 내가 입장 바꿔볼 소수자들이 많잖아요. 이런 이슈들 속에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삶에 대해 입장 바꿔보기라도 해봐야죠.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고 숨 막히게 사는 미등록 외국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고요. 그런데 그것도 안 되잖아요. 그것도 안 되는데 먼 나라에 사는 난민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건, 그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살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겐 애시당초 안 되는 거예요. 저도 못 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규정짓지 않으려는 나름의 선을 지키려고 할 뿐이죠.
정리 김다혜 기자
첫댓글 절망감..자괴감..무덤덤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숨 막힘...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한데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님~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