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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징(韓澄, 1886.2.20..∼1944.2.22.) 선생은 서울 남부 죽동에서 태어났다. 한징의 호는 효창(曉蒼)으로, 1893년에서 1921년까지 한학과 국학을 공부하였다. 그 결과 15세에 사서삼경에 정통하였다. 아울러 우리말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신문 편집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3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했다.
1921년 박승빈, 최남선이 중심이 되어 계명구락부를 조직하였는데, 1927년 이 단체 안에 조선어사전 편집부를 두게 된다. 조선광문회에 남겨진 말모이 원고를 가지고 있던 최남선이 계명구락부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이끌어나갔고 사전 집필에는 최남선 외에 정인보, 임규, 변영로, 양건식, 이윤재, 한징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전문 어휘를, 정인보가 한문 어휘를, 임규가 용언 어휘를, 변영로가 외래어 어휘를, 양건식이 신어 어휘를, 이윤재가 고어 어휘 및 주해를, 한징이 주해를 맡았다.
그러나 1929년 들어 철자법의 불통일과 경비 부족 등으로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이에 한징도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부를 탈퇴하고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하였다.
한징은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뒤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한다.
먼저 한징은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에서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한국민족의 말과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표준어를 정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표준어의 제정은 언어의 합리적인 생활뿐 아니라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런 대의 아래,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 작업에 그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1934년 12월 2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표준어 사정문제를 결의하였다.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讀會)를 온양에서 열고, 사정위원은 회원 이외에 각 도별로 하되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기에 서울 및 경기 위원이 총 위원의 반수가 되게 하였고, 그 외의 반수는 방언에 대한 참고를 위하여 각 도별로 위원수를 배정하였다. 사정위원 40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는 1935년부터 열리기 시작하여 1936년에 끝을 맺었다. 1935년 1월 온양온천에서 제1독회(1935.1.2.~6.)를 열고 미리 준비하였던 사정안을 토의하였는데 여기에는 40명 위원 중 32인이 출석하였다. 표준어 제정은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어서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표준말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이고 갑론을박 하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6일에 사정위원들은 이순신의 사당이 있는 현충사를 참배하고 기념촬영도 하였다. 여기서 다시 수정위원 16명을 선정하여 다시 수정하게 되는데 수정위원 16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그 뒤 조선어학회에서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의 거족적인 민족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사정위원 30명을 늘렸다. 지역적 안배까지 고려하여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등 조선사회의 각계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총 70인이 선정되었다. 서울·경기 출신은 35인, 지방 출신은 각 도의 인구수 비례를 좇아 35인으로 안배하였다. 한징은 서울 출신에 배정되었는데 그 집안이 4백여 년간 서울에 근거하고 있었기에 서울말의 발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뒤 경기도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린 8월 제2독회(1935. 8. 9.)에는 30명의 위원이 출석하였고 여기 한징도 참여하였다.
먼저 토의한 수정안에 대해 재차 토의하고 다시 수정위원 25인을 선정하여 이를 수정하게 하였는데 한징도 수정위원에 선정되었다.
우리 민족의 표준말을 처음으로 사정하는 작업은 지난한 작업이었다. 제2독회에 이어 1936년 7월 조선어학회는 제3독회(1936. 7. 30. ~ 8. 1.)를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열었다. 여기에는 32인의 위원이 참석하여 수정위원이 제출한 토의안에 대해 토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다시 최종 수정위원 11명을 선정하여 사정안 전체에 대해 수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표준말의 사정을 비로소 마치게 된다. 사정을 마친 조선어학회는 이만규의 발성으로 ‘조선어학회 만세’를 삼창하고 폐회하였다. 모든 독회에 참여하여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한 한징은 제1독회와 제2독회에서 수정위원에 선정되어 활약하였다.
표준말 최종 사정회인 제3독회가 끝난 뒤 3개월 동안 수정위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무리 작업을 하여, 표준말 사정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490주년)에서 조선어학회는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였다. 표준어 6,231개, 약어 134개, 비표준어 3,082개, 한자어 100개로 사정 어휘 총수는 9,547말에 달하였다. 이 날 조선어학회에서는 239쪽에 달하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도 발간하였다. 이 책자는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도록 편찬하여 철자사전(綴字辭典)의 역할도 병행했다. 작업은 방대하여 작업에는 총 150여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여 우리 민족이 표준어를 사용하여 우리 말글의 통일에 앞장서 주기를 당부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표준말 사정에 참여하면서, 몇 편의 글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기고하여 우리말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한글』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 동안 발행한 기관지였다. 1932년 5월에 『한글』 창간호를 냈고, 1942년 5월까지 93호를 발행하였다.
한징은 「양문대신의 언문 시」(『한글』48, 1937. 9.)라는 글에서, 조선후기 대신이었던 이서구가 지은 언문 시를 소개하기도 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이름을 연구하여 「조선말 지명」(『한글』48, 1937, 9.)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화살표 앞은 한자어 지명이고, 화살표 뒤는 우리말 땅이름이다.
계속해서 그는 「군수의 꿈」(『한글』66, 1939.4.)이라는 작품을 지어 백성의 재산을 토색질하던 악질 군수를 비판하였다. 이 작품의 전체 문장은 한글로만 썼고, 부득이 한자어에 한자를 쓸 경우 괄호 안에 넣어 표기하였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극로는 1929년 1월에 귀국한 뒤, 민족어사전을 편찬하고자 민족주의자 신명균, 이중화 및 이윤재와 협의하였다. 그 뒤 최현배, 장지영, 정열모 등의 협력을 받아 1929년 10월 31일 경성부 수표동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이극로는 일제에 맞서 우리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하는 첩경으로 국어사전을 편찬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었다. 그에게 국어사전 편찬은 언어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가 진두지휘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으로 선임된다. 사무실은 서울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 건물 안에 있었다.
한징도 사전편찬의 전담집필에 이극로, 이윤재, 김선기, 이용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2년 간 사전편찬원들은 순조롭게 각종의 어휘를 분담 수집하면서 사전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극로는 순수한 조선어를 맡았고, 한징은 한문계통의 어휘를 정리하였다. 한징은 서울 사람이어서 서울말에 정통하여 사전 편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사전편찬 작업은 1933년 6월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한징은 생계 때문에 1933년에서 1935년까지 『조선중앙일보』에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다. 다시 조선어학회가 사전편찬의 기초공작인 철자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을 사회에 발표하자, 사회인사들의 물질적 원조가 이어졌는데 1936년 이극로의 설득으로 경남 의령의 이우식은 1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기부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 결정문에 의하면, 이우식이 조선어학회에 사전편찬 자금으로 16,140원과 기관지 『한글』 발행 자금으로 1,050원을 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임금이 21원이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우식의 지원은 대단하였던 것이다.
이극로의 노력으로 사전편찬 후원회도 조직되었다. 후원회원으로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태희,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이 참여하였다. 이극로가 이들 후원회원을 직접 찾아가 기탁을 받았는데, 전부 합하여 1만 원을 희사금으로 받았다. 1939년에 사전주해 작업이 완료되지 못해 1년 연기되었고, 후원회에서는 3천 원을 추가로 지급키로 하였다.
이렇게 1936년에서 1939년까지 4년 동안 사전편찬을 완수한다는 약속으로 이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았다. 아울러 1936년 3월 20일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온 사전편찬의 업무를 인계받았다.
조선어학회의 마지막 과제는 조선어사전의 편찬에 있었다. 1935년 7월 조선어학회는 종로구 화동에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같이 종로구 화동 129번지에 있는 학회의 사무실을 출입하니 형사들이 나타나면 비밀스러운 얘기도 할 수 없고 회의를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일제는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의 인사들과 활동을 주시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한징도 이극로, 이윤재, 김윤경, 이희승, 최현배 등과 함께 일제의 요시찰인물에 해당하였다.
한징은 1936년 4월에 조선어학회에 다시 들어가, 1942년 9월까지 조선어대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36년 4월부터 정인승·이윤재·이극로·이중화 4인과 함께 사전 편찬 전임위원이 되었다. 이윤재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하차하고, 1938년 6월에 권승욱이, 7월에 권덕규가 사전편찬에 합류하였고, 1941년 4월에는 정태진도 합류하였다.
한징은 서울 태생이어서 서울 구석구석의 유래, 의복, 음식, 길흉간의 민속, 주택, 사색(四色)에 따라 다른 풍습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어휘는 모두 그의 힘을 입어 조선어대사전에 수록되었다. 사전 원고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여 사전 원고지의 양이 많기로는 이극로와 한징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이었다.
당시 함께 사전편찬원으로 있었던 권승욱은 한징이 “언제나 쉴 새 없이 원고 쓰시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일제말기 조선어학회의 서기로 근무하였던 이석린은 당시 조선어학회가 주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도 조선어학회에서 퇴근한 뒤 인쇄소에 가서 교정 일을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한징은 문세영이 단독으로 조선어사전을 만들 때, 사전 원고의 교정을 책임지고 마무리하여 주었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윤재도 문세영의 사전 편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윤재는 문세영 사전의 체계에서부터 교정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한징과 이윤재의 도움을 받아,문세영은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1938)을 최초로 발간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대사전 편찬 시기에 한징은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제 말기 사전편찬원들은 일제가 기념을 막았던 한글날 기념행사를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하였다.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에 한글날 기념행사를 해왔는데 일제는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한글날에 민족의식을 고취하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 행사를 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거행하였던 것이다.
한글날 행사를 마친 뒤, 사전 편찬원들은 신문지를 펴놓고 북어를 안주삼아 먹으면서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이때마다 한징은 “원고를 속히 마치도록 합시다. 그래서 큰 사전을 하루 빨리 활자화하여 얼른 세상에 퍼뜨려야지, 까딱했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어. 왜놈들 하는 짓이 날로 수상해”라고 기운차게 말하였다. 이렇게 그는 조선말 큰 사전을 빨리 세상에 내놓아, 우리말이 보존되어 우리 민족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한징과 마찬가지로 조선어사전 편찬이 독립운동이라는 주장은 이윤재와 이극로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윤재는 지방에서 찾아온 청년들에게 늘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이처럼 이윤재에게 한글운동은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대표로 활동하던 이극로는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던 무렵에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장한 말을 하였다.
당시 일제는 조선 민족 말살 차원에서 조선말 말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놓으면, 때가 돌아오는 날 즉 조국이 광복되는 날에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민족 독립의 준비 차원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이극로의 발언은 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전임위원의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징, 이극로를 포함하여 사전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고로 드디어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에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천여 매를 완성하였다. 이 『조선어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일제 침략자들이 일본어로 해설하여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약 3배가 많은 조선어 어휘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위원들이 수집·주해하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민족어사전 편찬을 통해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어학회는 이우식의 재정 후원을 받아 1942년 봄부터 사전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하게 하였다. 이우식으로부터 매월 250원씩을 지원받기로 하고 나머지 어휘를 정리하여 그 원고를 1942년 말까지는 인쇄소로 넘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1942년 10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하였다. 사전 원고도 사전편찬원과 함께 함흥으로 이송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족말살차원에서 조선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사들은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전개한 한글운동은 우리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이요 언어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고자 하였다. 사전 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항쟁하였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사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반하는 행위였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언어독립투쟁임을 간파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여섯 내지 일곱 차례나 철저히 수색하였고, 급기야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어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징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10월 1일에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투옥 중 일제 형사로부터 물고문을 받고 날마다 난타를 당하다가 1943년 9월 13일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계속되는 고문 속에서도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하던 한징은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일제 형사들로부터 6번이나 물고문을 당하고 날마다 난타를 당한 이윤재도 1943년 12월 8일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한징의 유골은 그의 처가 함흥감옥에서 찾아와 경기도 과천에 안장하였다.
뒷날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는 “한징선생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종시 일관 관계하여 사전편찬에는 누구보다도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 10. 9.)고 높게 평가하였다.
해방 뒤 한글날을 맞이하여 조선어학회의 동지 이중화는 한징에 대해 “한징 씨는 그 집안이 4백여 년 서울에 근거를 가진 집이니만큼 정확한 발음을 압니다. 발음과 한자말 주석에 공적이 큽니다. 이 사람 역시 빈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유명한 이야기로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이었지요.”(「존귀한 희생자」, 『자유신문』, 1945, 10, 9)라고 회고하였다.
해방 뒤 조선어학회가 재건되어, 일제시기 완간하지 못한 조선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원들은 사전의 이름을 우리말을 살려 『조선말큰사전』6권(1947∼1957)으로 바꾸어 출판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는 1992년 7월 9일 한징의 묘소를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부인으로 최석, 아들 한기영과 한무영, 딸 한백록과 한백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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