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야마구치 3 - 구로후네가 출현하자 조슈번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다!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하기(秋 추) 시는 옛 조슈번(야마구치) 모리씨의
수도 로 현재 인구5만의 소도시인데.... 마을을 구경하면서 메이지유신 을
일으킨 주역 중에 주역인 조슈번의 옛 수도 하기시를 걸으면서 옛일을 생각해 봅니다.
조슈번(야마구치) 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 은 번주의 허락을 받아 유람하다가 1853년
에도(도쿄) 만에서 미국의 페리 제독 이 이끄는 이양선인 구로후네 를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다음해 다시 일본에 흑선이 오자 이즈 반도 시모다 로 달려갑니다.
요시다 쇼인 은 에도에서 스승 사쿠마 쇼잔 과 상의한 후에 미국 밀항 을 결심하고는
노를 저어 배에 다가가서는 고함쳐서 오르기는 했는데, 막부와의 관계를 생각한
함장의 거부로 실패 해 내리고는 새벽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냥 가면 됩니다?
하지만 "정직을 생명" 으로 생각하는 성품 탓인지.... 궂이 에도 봉행소 에 출두하여 자수하는데
처형 당하기 직전에 쇼인의 스승인 사쿠마 쇼잔 이 연루된 사실 이 밝혀지자 에도 막부도
여론 때문에 저명 인사인 쇼잔을 죽일수는 없으니 감옥에 갇히는데.... 그후 감옥
에서 풀려나 조슈번에서 연금당해 자숙한 후에는 쇼카 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사숙을 엽니다.
맹자를 강의해 "선비는 죽을 때를 알아야 한다" 고 가르쳐 90명 제자를 기른후 막부를 무느뜨리는
거사 를 계획하다가 다른 일로 소환 받자 이번에도 스스로 자복해 사형 을 당하는 것이지요?
두꺼비는 능구렁이를 도발 해서 삼키게 한 다음에 독을 뿜어 능구렁이를 죽이고는..... 알에서
깨어난 두꺼비 새끼는 능구렁이 몸을 파먹고는 나오는데 요시다 쇼인은 두꺼비 역을 자임한 것이라?
요시다 쇼인은 29세로 처형 당할 때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평생 닦은 학문은 천박하여
지성이 천지를 감격하게 하지 못하고 비상의 변고 에 이르렀다. 막부의 정의는 쓸모없고
이적(미국)은 종횡자재로 에도를 발호 하고 있다 해도 신국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위로 성천자가 있고 아래 충혼의백 이 있으면 천하 일을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 입니다.
1853년 미국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개항 을 요구한 것은 미국에서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 에는
집의 등불에 고래 기름 을 사용했는데..... 남획으로 대서양에서 고래 씨가 마릅니다.
해서 미국 포경선들은 북태평양 으로 진출하는데 포경선 들이 석탄과 물이며 식량등
보급항 이 꼭 필요했으니..... 허만 멜빌의 모비딕(피쿼드호) 은 이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또 중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 미국 상선 이 태평양을 건너자 마자 연료인 석탄 이 떨어지기
때문에...... 도쿄 부근의 보급항 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일본에서
석탄과 식수며 식량 을 보충할 보급항 을 구하지 못하면 고래 포경과 중국 무역 이 다 허사라!
페리 제독 은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였고 동인도 함대 사령관 이 되자 일본 파견 특파 대사
를 겸임해, 1853년 일본 우라가항에 입항해서는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 를 전달합니다.
1854년 2월 페리가 다시 에도만에 나타나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 하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하자 막부는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즈반도 시모다 下田(하전)에서 조약을 체결합니다.
사람들의 이목 이 있으니 가급적이면 남들의 눈에 뛰지 않는 먼 한적한 바닷가를 원한 것이지요?
그리고 시모다와 북해도의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했던 것인데, 이후 1858년에 통상조약 이
체결된 후에는 미국의 요구로 개항장은 에도 에 가까운 요코하마로 변경 되었습니다.
태평양 에 면한 일본에 비해 조선은 외진 곳 에 위치하므로 미국 으로서는 조선에서
보급항의 필요성 이 없었기 때문에 1871년 강화도 를 침략해온 신미양요 때에도...
미군은 강화도의 초지진과 광성진을 점령 하여 포대를 파괴함으로써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태에 보복 하는 정도에 그치고는 통상조약 체결을 관철하지 않고 물러갔던 것이지요?
만약 조선의 수도가 내륙인 서울 이 아니고 인천 이었으면 미국의 요구에 굴복 했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한국 그 자체로는 전략적 가치 가 없으나..... 미국은 2차 세계대전시
태평양을 횡단한 일본군으로 부터 하와이 진주만과 미드웨이가 급습 당한
사태에서 충격 을 받았으니 "태평양을 내해" 로 만들어 지배할 필요가 절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친미국가 여야 하고, 그 일본을 대륙으로 부터 지키는 방파제
로서 한국의 역할이 필요 하니 소련과 반쪽씩 갈라먹어도 충분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한국 그 자체는 전략적 가치 가 없으나 일본을 지키는 교두보 역활은 있다는?
미국 은 에도(도쿄) 입구 시모다(요코하마) 와 북해도 하코다테(포경선) 개항만
달성하고는....... 영국 이 중국에서 자행했던 치외법권 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불과 몇년 전에 멕시코와 전쟁에서 승리해 탈취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여러 주를 개발하는 것 만도 힘에 부쳐 해외에 영토욕심 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멕시코와 전쟁해 빼앗은 저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는 데에도 미국의 힘이 달렸으니 해외영토야?
이후 남북전쟁때 북군 사령관 이었던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는 퇴임 후인
1877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미일 친선 을 도모하였으니..... 후일 미국이
필리핀 식민지 관리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자 일본의 조선지배 를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지 하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 협정의 씨앗이 이때 뿌려집니다.
1905년 러일전쟁 시 이토 히로부미 는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 문제 로 어렵다고 보고는 전쟁
전에 법부대신을 지낸 하버드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 를 미국에 보내는데 가네코는
하버드 동문이자 절친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니토베 이나조 의 무사도 책 을
선물하니 사무라이 정신에 뿅 가서는 러일전쟁 평화협정 중재에 나서며 친일파를 자임 합니다!
조선이 쇄국정책 을 고집할때 일본은 만난을 무릅쓰고 개국 해 젊은 인재들을 미국과 유럽에
유학 시켰으니.... 그들의 친구 가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결실 을 보게된 것이라?
가네코 겐타로 가 하버드 동창생인 루즈벨트 대통령 을 만나고 있을 무렵.... 조선에서도
이승만 이 선교사 소개장 한장 달랑 들고 미국을 방문했지만 가네코의 상대가 될수 없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성립 3년 후인 1871년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가 구미시찰단 을 꾸려 2년간이나
미국과 유럽을 시찰 하는데 젊은이 50명 을 데려가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했던 것이라?
이 시찰단을 계획하고 수행원과 유학생등 참가할 인사들을 선발하며 각국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지휘한 자가 바로 영국에 유학한 "이토 히로부미" 였으니 그의 심모원려 를 알만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의 중재 요청을 받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미국의 포츠머스 로 러시아와 일본 대표를 오게 해서 평화조약 을 맺게 하는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 을 받지만 일본에서는 폭동 이 일어납니다.
협정은 일본에 유리 했지만 전쟁중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과장 보도 로 일본인의
눈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저 정도로는 여론을 만족시킬수 없었으니 폭동은 필연적 이라!
그리고 이런 인연이 쌓여 일본 총리 조슈번의 가쓰라 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 가
필리핀과 조선 을 각기 차지하기로 약조한 후에는..... 을사조약(늑약) 이 체결되는 것이지요?
1892년 필리핀 에서는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카티푸난 이 결성되고 1896년부터
전투에 돌입하여 1899년 공화국을 수립 하나.... 1898년 스페인과 전쟁 을 벌여서
승리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를 수중에 넣고는 필리핀 마저 지배하려 하니...
미군은 아귀날도의 필리핀 독립군을 공격해 3년반 동안 반군(독립군) 2만명을 사살 합니다!
그리고 민간인 수십만을 강제수용소 에 가두는데, 미군이 공격을 받자 마을에 10세 이상 주민은
모두 죽이는 학살 을 벌입니다. 우린 일본군이 조선인에게 잔인하게 대했다지만...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와 미국은 훨씬 더 잔인무도 했었습니다! 밀림으로 쫃겨간 필리핀 독립
전쟁 은 1913년에야 최종적으로 진압되니 필리핀 식민통치에 일본의 도움 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이 무렵 미국의 아시아 순방단 이 일본에 오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가 있었으니.....
일본을 거쳐 서울을 방문하자 고종황제는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극진히 환대 합니다.
서울 거리 에는 조선 사람들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의 장명등과 성조기 를 흔들었으며
오찬장에는 고종황제 가 앨리스와 같은 테이블 에 앉았고 선물 을 전합니다.
고종황제로서는 공주의 마음을 잡아 일본의 야욕을 미국이 막아주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고종황제의 조선 정부는 미국인들에게 자연스레 일본 만행 을 알리려고 "명성황후의 무덤 홍릉"
에서 야외만찬 을 열었는데...... 자욱한 먼지와 함께 말을 타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채찍 을
들고 능에 들어선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능에 세워진 석상 위에 올라타고 사진 을 찍습니다.
샴페인 을 마시고는 조선인 대신들로 부터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명성황후가 어떻게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됐는지 말을 꺼낼 틈도 주지않고 말을 타고 일행과 함께 쏜살같이 질주해 사라져
갔던 것이라! 도쿄에서는 이미 한달전에 조선을 일본에 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 맺어졌거늘....
고종만 몸이 달았던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 는 “연약한 미국 공주가 이런
장거리 항행을 해서 한국에 온 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일 이다” 라며....
“그녀의 방문으로 한국의 산천은 더욱 빛나고 초목이 영광을 품었다” 고 보도했으나
미국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 는 이러한 앨리스에 대한 한국 방문 환대 는
마치 “황달에 걸린 그들의 상상력에 구명대” 같은 것이었다고 묘사했던 것이지요!
그녀는 1934년 자서전 에서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손아귀로 끌려 들어가고 있으니
이 황실도 얼마남지 않았다” 라고 적었으니 망국을 알면서도 환대를 즐겼던 것입니다!
두달후 을사조약 으로 황실과 조선이 망할것 을 알면서도 즐겼으니 파렴치한 이 따로 없네요?
애가 탔던 고종 황제 는 그후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기독교 선교사 헐버트 에게 친서를 주어
미국 대통령 에게 보냈으나 도착도 하기 전에 을사늑약 이 체결되는 것이지요? 한국이 망하지
않았을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전쟁 대신 개항해 서구문명 을 받아들였어야?
역사는 되풀이된다 고 했던가요? 예전에 바이든이 한국이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걸 경고하더니
한일간의 오랜 대립에 피로감을 느끼는지...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의 한국 정상 싸구려
박수 비난에 이어.... 미셀 오바마 가 일본에서 국빈 대접을 받으며 아키에 여사 손등을
토닥이더니 한국의 집요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 미 상하원 합동연설 이 성사되었었지요?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은 미일 전략적 파트너쉽 과 군사협력에 만족을 표시하며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이 "나는 친일파 이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열렬한 아베 지지자" 라고 공개적으로 자랑스레 말했었는데.... 아베
연설 성사를 저지하려는 한인 회합 에는 혼다 의원 만이 홀로 참석했던게 현실 이라?
미일 개항조약 체결기념으로 미국이 증기 기관차 모형을 선물하니 일본은 불과 18년 후인 1872년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간 철도 를 유학생 출신들의 기술로 건설해 개통합니다. 일본의 이런
기술력은 100년 넘는 기업 이 한국은 두산과 동화약품, 조흥은행 3개 에 비해 일본은 3만 3천
개나 되고 천년이 넘은 기업도 여럿이라 수백년간 기술 축적 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 오랑캐(미국) 에 무릎을 꿇자 전국에서 거부운동 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조슈번(야마구치현) 은 현장을 목격한 선각자 요시다 쇼인 으로 인해 존왕양이운동 이
거세집니다.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 는 군대를 교토로 올려보내 궁궐을 경비 하면서
일왕(천황)을 움직여 막부의 쇼군이 양이를 천명 하도록 해서 몇년후 양이 결행을 공표 합니다.
조슈번(야마구치) 이 교토의 궁중을 움직여 막부 쇼군이 억지로 양이를 선포 하기에 이르자
조슈번의 경쟁국 인 사쓰마(가고시마) 번주 히사미쓰 는 조슈번으로 부터 정국 주도권
탈환을 위해서 1862년 대포 4문에 1천명 병사 를 이끌고 덴유마루를 타고 교토 로 올라옵니다.
일본에서 도쿠가와 막부 아래에 전국에 270개 번이 있었으니.... 그 중에 하나인 사쓰마번 은,
예전에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에게 은거를 명했던 쇼군 이에요시가 페리 제독의
침입 와중에 죽자 기세가 올라,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에 임명 하라며 막부 정치에 간섭하고
귀국중이던 1862년 8월 나마무기에서 영국인 4명 이 말을 타고 행열을 가로지르자 살해 합니다.
다음해인 1863년 7월 살해된 영국인에 대한 보복을 위해 7척의 영국 함대 가 가고시마를 습격 하니
사쓰마번은 결사항전 하는데.... 비록 조슈번의 군함은 나포됐으나 해안 포대는 집중 포격으로
영국 기함을 대파하고 함장에게 부상을 입혀 상륙은 저지했지만 가고시마 시내는 불바다 가 됩니다.
이에 사쓰마번 은 천만 뜻밖에도 조선의 대원군 과는 달리 영국에 보복 하는 대신에 서양의
위력을 절감 하고는 방향을 크게 전환해서는 적국인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15명의
젊은이 를 뽑아서 쇄국정책 중인 막부 몰래 비밀리에 적국이었던 영국에 유학 을 보냅니다!
에도막부에 들키면 여러 사람들이 배를 갈라야 할 큰 사건이지만... 배움의 욕구 가 더강했다는?
1840년 아편전쟁 의 충격을 받은 중국의 웨이위안 이 해국도지 를 1844년에 출간하자 바로
일본 나가사키에 수입되어 막부 로쥬는 물론이고 시판되어 일본에서 널리 읽힙니다.
유성룡의 징비록 은 조선에서는 필사본 몇부 베끼고는 사라졌지만,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
하니 길거리 책방에서 저 징비록이 출판돼 평범한 일본인들도 사서 읽는걸 보고는 경악합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이지만, 유성룡의 징비록 첫 출판은 1695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大和屋) 이고 조선에서 첫 출판은 1936년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에서
출판한게 처음이며,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도 박영효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로
부터 금속활자와 인쇄기에 잉크와 종이 그리고 기사 이노우에를 데려와서 간행했다는 사실이....
조선 금속활자는 하루에 25부 정도 밖에 인쇄를 못하니 신문 발행에는 무용지물이라? 구텐베르크는
인쇄기를 발명 했기 때문에 대량인쇄가 가능했지만, 조선은 목판에 활자 배열이 끝나면 공간을
죽목으로 메워 고정시키고는 편편하게 고른후 먹솔로 활자면에 먹물을 칠한 후에 종이를 놓고
헝겊뭉치로 누르는 식이니 책 한부 인쇄에 비용은 2천만원 이라 대량인쇄는 목활자 를 사용했습니다!
아편전쟁에 관해서는 조선 에서는 그 몇년후 사신 이 다녀와서 "북경 시내가 예전처럼 조용하다"
고 보고하니 국왕과 신하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끝났지만....
중국과 일본은 전쟁을 연구하고 침략에 대비 했으니 무사안일로 넘어간 조선 과는 다른 점 입니다.
일본에서는 “해방(海防) 의 방법으로 이정(夷情) 을 아는것 만한게 없는데, 해국도지
만큼 상세한게 없다” 고 번주와 지사들에서 말단 사무라이들 까지도 다투어 읽으며
서양침략에 대비 하는데 이무렵 해국도지 는 북경에 간 사신을 통해 조선 에도 들어옵니다.
사학(邪學, 천주교) 을 배척한 책으로 해국도지 만큼 분명한게 없으니 사교 뿌리를 분별할수 있다고
승정원 일기에 적혀있으니! 서양 문물 에는 관심이 없고 천주교도 탄압 에만 기세를 올리는데,
이슬도 뱀이 먹으면 독 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 가 된다 했던가요? 똑 같은 책을 읽고도
한쪽은 서양세력으로 부터 나라를 지킬 방책을 보는데, 다른쪽은 천주교 탄압의 단초만 본다는?
1801년의 신유박해 와 1839년의 기해박해 에 이어 고종 때인 1866년 부터 1871년 까지...
4차례 병인박해 가 일어나는데.... 1866년 봄과, 1866년 여름부터 가을 까지,
1868년 무오사옥 과 , 1871년 신미사옥 으로 이어져 도합 만여명의 처형자 를 냅니다!
처형된 사람 외에 체포과정에서 죽거나 산속으로 도망쳐 병들고 굶어죽은 사람들은 또 얼마냐?
개화기에 서양 천주교 배척 보다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는데 열심이었던 일본은 오늘날 기독교
인구 가 1% 도 안되는데 비해... 그토록 사교(邪敎?) 인 천주교 탄압 에 혈안이던 한국은 이제
기독교 인구가 전체 국민의 30% 를 초과하니 무었이 잘못된 것 일러나? 길 가는 행인의 외투를
벗기는건 사납고 거센 바람 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 이라? 그러고는 이제 걸어서 하기시 를 둘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