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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신앙의 출처
거짓신앙과 관련된 예배를 우리가 생각하는데 거짓 신앙이 어디서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자기중심에서 나타난 신앙이 거짓신앙입니다.
자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삶 자기 미래를 자기가 책임지려는 삶입니다.
자기중심성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에 아담의 타락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먹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 하나님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이 아니라 자기 자원으로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지요. 사단의 유혹은 항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옵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담적 실존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자기 길을 열심히 찾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지혜를 의지하고 자원을 의지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자리로 갑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자기중심이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자리로 갑니다.
성취감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기를 원하는 자기 미래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기의 먹거리를 스스로 보장하려는 실존으로 갑니다. 자기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되는데 자기가 목적이 되면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먹거리를 위해 힘써야 할 때 그때부터 자기를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자기가 일인자가 됩니다. 자기가 최고고 다른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사실 자기를 기쁘게 하려 할 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또 자기의 자원을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내힘으로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많이 모아야 자기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잇기 때문입니다. 땅을 많이 파고 열심히 일해서 많이 모아야 많은 수확을 해야 좀더 오래동안 평안하게 잘먹고 잘사는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타락전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살았습니다. 생명나무 과실과 그 외 풍성한 생명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믿음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인간은 자기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내 목적과 의도를 어떻게 성취할까 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자기 방법을 가지고 나옵니다.
자기 방법과 자기 지혜에 기초한 자기 길을 갑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과신하고 자기 힘과 능력을 의존하며 자기 방법을 찾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거짓 신앙입니다. 자기가 목적이 될 때 나타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자기 자원을 따라 갈 때 율법주의입니다. 자기 길을 따라 갈 때 인본주의가 나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나타난 특징이 자기중심입니다.
거기서 나타난 아담적 본성을 따라 나타난 것이 왜곡된 신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떠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헌신이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짓신앙에 빠져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한 마음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특징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30장 16절부터입니다.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돌아가는 것이 떠나는 것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떠나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길 것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섬기게 된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그렇게 될 때 반드시 망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떠나는 순간 자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안떠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요 생명이요 주권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서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내 유일한 기쁨이요 만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목적이 앞섭니다. 내 미래에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에
관심을 갖습니다. 순식간에 올라옵니다.
그리고 초점이 그리고 가고 우리가 보는 것, 내가 어떻게 해야 미래를 보장받고 잘 살까에 관심이 갑니다. 아담적 실존으로 갑니다. 자기가 자기 하나님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목회자라면 교회성장과 사역확장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역이 수단이 됩니다. 기도도 수단이 되고 설교도 수단이 되고 예배도 수단이 되고 성도들도 수단이 됩니다. 무엇을 위해서? 내 입지를 위해서 내 미래를 위해 내 앞날을 위해 수단이 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 교회를 잘 세울 수 있을까? 하면서 머리가 바쁩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지 않으니까 나라도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나라도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하나 보면 탈진합니다.
가족들이 희생을 당합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자기 자원을 가지고 한 결과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늘 평가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우월감에 빠지고 영적인
열등감에 빠집니다. 자기 관점으로 육체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교인수 헌금액수 교회건물로 평가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분주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날 때 자기가 전면에 드러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상이 함께 옵니다. 무엇이 우상인가?
출32장 8절입니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을 위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은 우리들의 관심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너희의 신이라 하리라.
즉 영향력을 갖습니다. 내가 하나님중심적일 때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할까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면 자기의 목적에 초점이 있어요. 그러면서 그 목적을 위해 돈이 교회성장이 사역이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힘을 가집니다. 그것이 잘되어 가면 힘이 생깁니다. 안될 것 같으면 낙심이 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만 나의 힘입니다.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이 힘이 아니랄 그것이 나의 힘입니다. 돈이 나의 힘입니다. 사역이 나의 힘입니다. 교회성장이 나의 힘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나의 힘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우상은 우리 마음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심각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힘입니까? 하나님만이 힘이라면 하나님만 100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과 자유를 누립니다. 그런데 놓지를 못해요. 이것이 내 힘인데 내 자원과 노력으로 어찌하든지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놓아지지 않으면 우리 삶에 진정한 자유와 안식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우상이라면 사역이 우상이라면 돈이 우상이라면 떠난 것입니다. 중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사역이 돈이 우리의 우상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도 교회 때문에 사역 때문에 돈 때문에 찾을 것입니다. 교회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하게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방법과 내 길대로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탈진하고 지칩니다. 원망과 쓴뿌리가 나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상급은 주님이십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와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상급이 되어야 하고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우리 인생을 마감하는 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중심일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타락 전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타락 전 아담의 상태와 같은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입니다.
통치는 몇 가지 계명과 규례를 단순히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는 것은 타락 전 아담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존재를 다해 하나님과 인격적이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은 부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관계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아빠로 소개합니다. 인격적 관계로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몽땅 달라고 하는데 하루하루 하나님과 동행하며 공급해주시는 양식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100으로 신뢰하는 관계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단순히 몇 가지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실제적인 관계에서 오는 삶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았더니 하나님 중심은 곧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입니다.
1.오직 하나님이 목적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삶입니다.
2.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3.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
이때 하나님의 관점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분안에서 내가 누구은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된자 그리스도 없이는 어떤 선함도 없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자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힘씁니다. 자기가 스스로 미래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분주해지고
스스로의 방법을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에 추구하는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 보기에 우상인 자리로 가버립니다. 자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우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의식이 수단이 되는 자리로 갑니다. 사실 무서운 일입니다.
때때로 제가 자기중심으로 가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성령님이 비추시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제가 설교할 때 돈있고 힘있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반응이 좋지 않고 인상을 쓰면
낙심이 되는, 두 사람이 심방을 와달라고 하면 돈있고 힘있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있는,
먼저 가려고 하는. 저는 이런 부분을 보면서 야 목사 쉽지 않다.
나중에 하나님이 이런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많이 말씀하신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섰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래서 언제는 제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뭐가 교만합니까? 교만한 것 알려주세요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호주에
가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타자마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비추셨어요. 열시간 동안 영화도 못보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비추시니까. 우리도 모르는 순간에 자기중심적으로 갑니다.
2.인격적인 주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 행위를 신뢰함으로 영적우월의식이나 죄책감에 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3.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 선별적으로 순종하게 되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변호사의 소리를 듣고 타협하거나 자기 만족의 길을 찾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결국 자기 관점으로 성경도 보고 하나님도 보고 이웃도 보고 환경도 몸으로 믿음의 관점으로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합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거짓신앙입니다. 기복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짝을 이루고 나타납니다.
3.율법주의 예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식들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식들이 많아도 본질에서 떠나있다면 그 모든 의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그런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져서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래서 의식을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의식을 잘 지키는 것으로 자기를 평가하게 되고 잘하면 우월의식을 갖고 못하면 죄책감에 빠집니다. 육체의 관점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1)의식으로 본질을 대체한 예배, 형식적인 예배
사29:13절입니다.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였다.
렘7장 2절입니다.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성전 문 앞에서 서서 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외치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이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가 예배하러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어떤 인간이 서서 이렇게 외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랬는지 선지자를 그렇게 하게 하셨는지. 얼마나 쉽지 않은 상황입니까?
이 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거짓말인지를 여기서 살펴보기에는 시간이 그렇고요. 과거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그 약속을 근거로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황에서는 그 약속이 거두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부지런히 말씀했는데도 듣지 않았고. 그러면서 뭐하고 하느냐면 에브라임 자손을 쫓아냄같이 너희도 쫓아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실로에서 행함같이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을 멸시하고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현실에서 돌이키기를 말씀하셨지만 돌이키지 않은 시대입니다.
승리할 줄 알고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했다가 대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깁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법궤를 믿은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 왜곡된 신앙입니다.
대패하고 깨집니다. 그런 과거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로에서 엘리 제사장 시대를 기억하고 너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드리는 예배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고 성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전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성전 자체에서 봉사한다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성전에서 예배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의식을 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하고 있다. 봉사 헌금 졸지 않고 예배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도우실 것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심에서는 하나님을 떠났으면서.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나누어진 마음을 가지면서도. 이것이 바로 타락한 예배이며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예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의식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성전을 의지하고 예배를 의지하고 의식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2)자기 의에 기초한 예배
행위를 기초하여 영적우월의식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온전히 예배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예배입니다.
눅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경건한 사람이고 세리는 죄인중 죄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한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응답되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행위를 기초하여 올라갔습니다. 자기 자원을 의지하여 나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칩니다. 하나님 제가 저 죄인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자기 의를 기초하여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행위에 기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행위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자가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런데도 오늘날 자기 의 사실 자기의 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책감에 빠져있는 자들은 금방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혹시 2% 부족한 것 같이 느껴집니까?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주님의 보좌 앞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2%가 아니라 100%부족한 인생입니다. 항상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사64장 6절입니다.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는 걸레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로 주님 앞에 설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의를 의지해서 서려고 합니다.
저는 요8장을 보면서 복음이 선명하게 깨달아졌어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집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간음하다 잡히면 상채를 벌거벗깁니다.
바리새인들이 끌고 옵니다. 칠까요 말까요.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합니다.
다 떠나갑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우리입니다.
주님 앞에 가면 갈수록 우리안에 얼마나 선함이 없는지 알게 됩니다.
자기 눈에 볼 때는 괜찮아 보이지만 비추시면 얼마나 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자꾸 깨닫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행동합니다.
자주 정죄합니다. 저런 인간 저런 인간 이런 인간이 다 있네. 하나님이 뭐하시는지 몰라.
하나님이 적극 개입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부터 만지실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럽니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돌을 집어던질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내가 너를 법으로 대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것이라는 말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자들입니다. 우리의 선함 의 잘남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법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주님이 법으로 대하셨다면 우리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적인 우월의식과 죄책감에 얼마나 많이 빠집니까? 주님의 기준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하나님의 법으로 보면 우리안에 아무런 선함도 없는데.
우리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사랑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랑을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 부분을 보면서 사랑이
선명하게 깨달아졌어요. 이중표목사님이 단독목회를 갔는데 장로님 한분이 힘들게 해서 새벽기도하면서 기도했답니다. 강대상 뒤에 이름을 써놓고, 하나님이 저 인간 때문에 목회 못해먹겠습니다. 데려가시든지 고치시든지해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나도 저 장로를 못고쳤다. 그래서 내가 저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 너도 죽어라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별세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즉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죽은 것처럼 내가 너희를 법으로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신 죽음으로 사랑한 것처럼. 너희가 서로 죽으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합니다.
옆에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번에 바꾸어서 다시 인사합시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목사로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할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사랑하기 보다 정죄합니다. 사랑한다면서 이기적입니다. 정죄합니다.
4.기복신앙과 예배
1)자기목적과 소원성취를 위해 나가는 예배
이렇게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겠지 이렇게 예배하면 문제를 해결해주시겠지.
이것이 기복신앙적 예배입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한 율법주의 이면에는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야망이 시커멓게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의 한 축으로 기복신앙입니다.
이사야 1장 11절 이하를 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2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왔다. 왜 보이러 왔을 까요. 도장찍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보인 것입니다. 왜 보이러 왔어요. 중심이 없이 진짜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인사하듯이 인사성으로 왔어요. 그런데 그냥 인사가 아니라 14절을 보면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짋어지기에 곤비한 예배였습니다. 이 말은 뭔가 조건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부탁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뭔가를 얻기 위해서. 과거에 어떤 분이
식사대접을 해서 갔는데 맛있게 식사했는데 마친 후에 집회 한번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도 식사하고 또 집회 이야기를 해요. 못한다고 하자 기도하도 해 달라고 해서 기도해주었습
니다. 그 다음부터는 맛있는 것 먹자로 하면 겁이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조건을 가지
고 나가는 것입니다.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했으니 저를 이쁘게 받아주
세요. 사실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먼저 우리
를 위해 풍요를 준비해 주십니다.
신30장 19-20절을 보면,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분이 임재하면 생명의 징조들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6장 24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그 분 자신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주권아래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생명이 흘러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렇게 할테니 봐주십시오 합니다.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요한복음 8장 29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을 말합니다.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의 것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뭐가 두렵겠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있을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할 수 있습니다.
고전10장 31-33절까지입니다.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2)기복신앙을 조장하는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배
렘6장 13-14절입니다.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중심에 탐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강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상태는 말기암 환자와 같았습니다. 심각한 죄의 억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여 나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당대에 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일 없는 것처럼 평강의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심에 탐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세상에서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집회에 참석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복적인 메시지를 전함으로 사람들로 완전히 기복주의로 빠지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시대는 이런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소경됩니다.
또 신앙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사30장을 보면, 당시 선포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그들이 그렇게 말했을리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겠어요. 그런데 그들의 중심에 있었던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자기중심적으로 타락하면 하나님의 말씀듣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죄가 드러나는 설교 듣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대신에 무슨 설교를 듣고 싶어 합니까? 세상에서 잘되는 설교 자기들이 잘하고 있다는 칭찬하는 설교를 듣기 원합니다.
이런 메시지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메시지를 전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는 선지자들도 타락하기 쉽습니다.
사5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거짓된 선지자 영적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이익만 구하고 날마다 술에 취하며 이런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서 22장에도 보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해서 모든 사람을 심판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이 타락했고 방백들에게 회칠한 무덤처럼 사는 그들을 향해 잘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돌아간 시대는 정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메시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죄가 다루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의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 목적을 뒷받침해줄 기복적인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자아실현 자기마음에 있는 만족 위로의 메시지를 원합니다. 자기중심에 탐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기복적인 메시지를 조장하고 그렇게 전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서 성장한 교회모델을 따라합니다. 여과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런 예배는 매우 타락한 예배입니다. 거짓 신앙에 의한 예배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산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제가 청년 때 어떤 교회 철야기도를 갔습니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일찍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제 옆에 앉았는데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저를 향해서 기도했어요. 본의 아니게 기도를 다 들었습니다. 아침에 보니 제가 검은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이쪽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침이 튀어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그분 기도를 들었습니다. 기도 진짜 잘하더라고요. 말이 하나도 꼬이지 않아요. 엄청나게 기도를 많이 했나 봅니다. 누구 이름만 대면 똑같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 종말 하나도 안틀리고 똑같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서 그만 하라고 종을 치니까 그분이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 밤새 구한 것 모두 주시고 미처 구하지 못한 주실 줄 믿습니다. 제가 속으로 앉아서 미쳐 구하지 않는 것도 없겠구만. 하나님 오늘 엄청 바쁘시겠구만요 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하고 계속해서 주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목적이 세상에서 자기 잘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시커멓게 살아있습니다. 그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모든 주고 사는 값진 진주 비유나 보화 비유를 설교하면 그것을 누가 살아 그럽니다. 우리 목사님은 사회생활을 안해봐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어떤 분이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사회생활을 안해봐서 그렇게 설교하시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막 웃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제가 성경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맞나요. 맞다고 그래서 아이 하나님은 사회생활을 안해봐서 이렇게 성경에 써놓으셨어. 그랬습니다.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 탓을 하고 설교자 탓을 합니다. 그분은 결국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설교를 하니까 못견디고 나갔습니다. 그분이 나가면서 자기는 유치원생인데 목사님은 고등학생설교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유치원 고등학교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느냐 못들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전하면 사람들이 안좋아합니다. 축복의 메시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을 따라 갈 것인데요. 교회성장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는 한 사람이 나가면 죽을 것 같았고 한 사람이 들어오면 너무 기뻤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겠어요. 100명쯤 나가면 죽을 것 같을지. 그러나 주님을 봅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이니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이 세우실 것을 믿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주님이 기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십일조 설교를 잘 못했습니다. 오래전에 일인데 주일설교를 해야 하는데 엎드렸는데 하나님이 십일조 설교를 하라는 감동을 주셔요. 그래서 토요일날 심방을 했는데 새신자가 온다고 했는데 해야 마느냐 매우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하고 전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분이 전의 교회에서 십일조 때문에 시험에 자주 드는 분인데 그런데 새로운 주일 처음부터 십일조 설교를 했으니 설교 중에 유아실로 가더라고요. 그러더니 가자마자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본 교회로 가야할 것 같아요. 왜요? 그랬더니 그 교회 목사님이 오래요. 예 가십시오. 그날 이후에 하나님이 제 마음에 이런 마음을 주셨어요. 십일조에 대해서 설교 안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런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5.인본주의와 예배
인본주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고전 14장 26절입니다.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초대교회의 예배를 말합니다. 찬송시가 있었어요. 경배와 찬양이지요. 가르치는 말씀 즉 설교가 있었습니다. 계시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예언 사역 방언 통역. 이런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예배였습니다. 너희가 모일 때는 초대교회의 예배입니다. 그들이 모일 때에 성령님이 나타나는 예배가 드려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예배 성령님이 이끄시는 예배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예배였습니다. 예배의 주권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빌3장 3절에서 성령으로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예배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반면에 인본주의 예배는 인간의 방법과 생각으로 프로그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 쓰레기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예배가 없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합니다. 모든 일을 질서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능란하게 할지라도 문제는 그 요점에 있어서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엉뚱하게 다른 거짓된 것으로 넘어가버립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교회에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해서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과 시간이 사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시작해서 어느 시점에서 마칠지 정해져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어떤 친구들은 나에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이런 일들이 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 마져도 복음을 전하러 오는 강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지대로 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했다가 정확하게 12시에 마칩니다. 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처럼 같이 하는 설교가 길지 않은 설교가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설교의 길이를 위해서 설교를 길게 느려뜨리는 것은 아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도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에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할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이처럼 묶어놓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현실입니다. 50년 전에 영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토요일에 리허설을 합니다. 12시에 정확하게 끝내려고. 성령님이 전혀 없는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인 예배입니다.
사실 예배의 주권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예배 가운데 임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입니다. 성령이 주도권을 갖는 예배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겠어요. 여러분 사실은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 주도권을 가지고 일해 가실 때 실제로 놀라운 임재가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향교회는 예배의 부름을 하고 묵상으로 기도한 다음에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예배의 부름을 하는데 허리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라는 감동을 주셨어요. 그래서 예배중에 허리 아픈 사람은 일어나십시오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만지셨습니다. 한 분은 한 주 내내 허리가 아파서 고통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앉아마자 허리 아픈 사람은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는데 허리 치유되고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가지 않고 인본주의 예배 프로그램에 기초해서 따라갔다면 무슨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겠습니까?
성령님이 주도권을 갖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잘해야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멸시하는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의 예배입니다.
인본주의적 예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 길을 따라 가는 예배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넘어갑니다.
거짓 신앙의 예배가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자기 목적을 위해 나가는 예배.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가는 예배. 자기 자원을 따라 가지고 가서 형식적으로 앉았다가 오는 예배. 나름대로 찾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필요를 채워주는 매시지를 듣기를 원하는 예배. 또 그런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지 않고 프로그램을 따라 드리는 예배. 감정에 호소하는 자리에 머무는 예배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길수 목사-
첫댓글 우리의 현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요즘 듣기 힘든 귀한 설교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