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은 10일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뿐 아니라 여러 제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발발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위스 TV 채널 RSI(스위스 공영방송 SRG SSR 산하의 이탈리아권 방송국 RSI)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책임이 러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전쟁의 배후에는 여러 제국들간의 이해관계 대립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세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다"며 "1914~18년(1차대전), 1939~45년(2차 대전)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도 세계 대전이다. 이제 누구도 이 전쟁을 세계적인 전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모든 강대국들이 여기에 관여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그들의 전쟁터이고, 모두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전쟁은 오래된(재고) 무기를 팔고, 새로운 무기를 시험하는 곳"이라며 "우크라이나는 시장이다. 전쟁이 터지고, 무기가 팔리고, 새로운 무기가 시험되고 있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출처:SNS
교황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시작한 러시아를 지지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시각은 객관적인 제 3자의 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 등 나토(NATO)와 러시아 간의 묵은 감정과 이해관계(안보 문제) 충돌 등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일부 서방 지성인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즈음 구소련 국가들에서 터져나온 반정부 시위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북카프가스 지역의 그루지야(조지아)와 흑해 연안의 몰도바에서 최근 잇따른 반정부 시위들이다.
친(親)러시아 정권의 그루지야에는 친서방 야권이, 친서방 정권의 몰도바에선 친러 야권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러 양국도 각기 자기 입맛에 맞는 시위를 지지하거나,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0일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반(反)러시아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말할 것도 없이 보이지 않는 손은 미국이다. 그는 "(살로메 주라비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이 어디서 국민에게 연설하는지 주목한다"며 "대통령은 조지아가 아니라 미국에서 연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무소속의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은 집권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소위 '언론·비정부기구(NGO) 통제법'(정확하게는 '외국 영향력의 투명화에 관한 법'이다. 이를 야권 세력과 서방 외신이 '언론·NGO 통제법'이라는 프레임으로 규정했다)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시위대를 고무시켰다.
집권여당이 추진한 '언론·NGO 통제법은 반정부 시위의 명분에 불과하다는 걸 구소련 국가들은 다 안다. 미 뉴욕타임스(NYT)도 조지아 집권 세력의 친러 성향에 대한 분노가 분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국기를 불태우는 등 반러 성향을 드러낸 그루지야의 반정부 시위/SNS 영상 캡처
스트라나.ua는 이날 그루지야 시위 분석 기사에서 "야당은 이미 정권 퇴진과 조기 총선 등 더 많은 정치적 요구를 하고 있다"며 "(2008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내준) 압하지야 자치공화국에 대한 (그루지야) 통제권의 반환 요구도 터져 나왔다"고 전했다. 또 "수도 트빌리시에는 그루지야판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나왔다며 "정권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를 (정권 퇴진이라는) 최상의 시나리오로 연결시키기 위해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루지야는 '풍운아'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이 2003년 11월 총선을 앞두고 대규모 반정부 시위(장미혁명)를 이끌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도 2008년 러시아와의 전쟁, 2012년 총선에서 친러 세력에 패배하면서 정권을 내놨고, 우크라이나로 도피했다가 귀국한 뒤, (부패 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 중이다. 그의 세력이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루지야로 귀국한 뒤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인스타그램 영상 캡처
2012년 의회 다수당을 차지한 친러 정당 '조지아의 꿈'(당수 이바니슈빌리)은 사실상 10년째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권력체제를 바꾸면서 그루지야는 지금 대통령은 무소속, 집권여당은 '조지아의 꿈'이다. 그동안 수차례 친서방 야권세력의 길거리 시위 도전을 받곤 했는데, 이번에도 '언론·NGO 통제법' 위기를 무사히 넘어갈지 궁금하다.
그루지야의 '언론·NGO 통제법안'을 놓고 집권 여당은 외국(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에이전트'(대리인)의 등록을 규정한 미국의 'FARA'(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야권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외국 에이전트(대리인)' 제도를 본딴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리고 법안 철회 시위에 나섰다.
스트라나.ua는 집권 여당이 시위 이틀만에 법안 추진을 포기한 것은, 시위대에 밀린 게 아니라, 서방의 제재 경고에 두 손을 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법에 관심이 있는 그루지야인은 전체 인구의 30% 정도이고, 시위 규모가 가장 강력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루지야 당국이 시위대에 양보한 것은, 유럽연합(EU)와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스트라나.ua는 분석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EU는 그루지야의 정치·경제판을 뒤바꿀 만큼 강력한 수단을 하나 갖고 있다. EU-그루지야 간의 비자면제 제도다. 많은 그루지아인들은 이 제도를 이용해 일자리를 찾아 유럽으로 나간다. 또 그루지야는 서방의 가혹한 대러 제재 조치 하에서 러시아 쪽으로 상품이 들어가는 루트로, 경제적으로 러시아의 '병행수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여차하면 EU가 이 루트를 막을 수도 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가 "이(언론·NGO) 법은 EU의 가치와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게 결정적이라고 한다.
또 다른 구소련 공화국 몰도바는 그루지야와 '데칼코마니'(정반대) 처지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조정관은 10일 "우리는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친러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몰도바 정부를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고 믿는다"며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련된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반정부 시위의 원인인 몰도바의 에너지 문제 등과 관련해 미국이 3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등 주요 산업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몰도바는 지난 2020년 11월 대선에서 친서방노선을 지양하는 야권의 마이아 산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듬해 7월에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친서방 연합이 승리했다. 몰도바는 의회(총리)가 내정을 책임지고, 대통령이 외교권과 군 통수권을 갖는 이원집정부제를 취하고 있다. 친서방 세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몰도바는 인구가 330여만명에 불과한 소국으로, EU와의 관계 강화와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호 관계 유지 사이에서 오랜 내홍을 겪어왔다. 최근의 반정부 시위는 그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
산두 대통령의 입간판을 짓밟는 등 몰도바를 휩쓴 반정부 시위/SNS 브콘닥테(vk) 영상 캡처
친러 정당 주도의 반정부 시위/사진출처:친러 정당 사이트 spartidulsor.md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는 천연가스 등 값싼 에너지 공급을 중단했고, 에너지 가격 급등에 놀란 몰도바 시민들이 길거리로 몰려 나왔다. 그 중심에는 권력을 빼앗긴 친러 정당이 있다. 그루지야의 반정부 시위와 같은 규모는 아니라고 하지만, 만만치 않는 규모에 가브릴리타 총리가 지난 2월 경제난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안보 불안도 계속되고 있다. 러-우크라 양측이 서로 상대국이 몰도바 침공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안보 분쟁의 씨앗은 몰도바 동부 드네스트르강 동쪽에 있는 친러 미승인 공화국 '트란스니스트리아'(러시아어로는 프리드녜스트로비예)다. 러시아계 주민들이 몰려사는 이 곳은 몰도바가 독립을 선언하자, 곧 몰로바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몰도바 정부군과 내전을 벌이다가 1992년 러시아의 개입으로 휴전한 상태다. 지금도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주둔하고 있다.
이후 러시아는 '프리드네스트로비예'에 자본을 투입해 산업 시설을 재편하는 등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해왔다. 사실상 러시아 조차지(租借地)나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일부 강경세력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초기에 크림반도에서 서쪽으로 우크라이나 남부(자포로제주와 헤르손)를 거쳐 몰도바의 프리드네스트로비예까지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산두 몰도바 대통령을 만나 공개적으로 몰도바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에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서방이 몰도바를 반러시아 국가로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길을 따르게 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은 몰도바의 정정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