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54]일꾼의 탄생 ‘옥수수전투戰鬪’의 작은 승리勝利
쓰잘 데 없는 별곡別曲을 쓰고자, 신새벽 오랜만에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맛 좋은 미백옥수수’를 맛보자고 하는 친구와 지인들은 주문을 하라했더니, 이삼일 사이에 200상자 주문이 ‘쇄도殺到’했습니다. 그 명단을 작성하느라 워드작업은 했지만, 졸문의 생활글 쓸 여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수확 작업이고, 땄어도 다듬고 포장하는 게 어디 장난이겠습니까? 작년에 해봤어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논산의 막내매제에게 SOS를 쳤습니다. 중고교 교장선생님인 그 친구는 프로 농사꾼 못지 않은 건실한 농부입니다. 엄마를 닮아 밖의 일 하기를 좋아하는 동생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이것을 하루이틀 사이에 어떻게 딸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때 ‘구원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남원 아영에 사는 친구의 카톡입니다. “옥수수는 언제 수확할 건가? 난 요즈음 한가하네. 막걸리만 있으면.”오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막걸리 몇 병이 문제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데리러 가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는 동생의 포도농장 일을 돕기도 하고, 지리산 속을 제 집처럼 다니며 온갖 약초를 캐며, 문화재 발굴조사요원으로도 활동하는 ‘한량’입니다. 월요일 오전 도착하자마자 달려든 옥수수 수확은 탄력을 받았습니다. 산처럼 쌓이는 옥수수를 다듬는데, 동네 ‘늙은 아가씨(대개 56년생)’들이 달라붙었습니다. 물론 저 혼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짠하게 여긴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새꺼리는 큰여동생의 몫. 점심은 인근 한식뷔페식당에서 해결하며, 하루종일 매달려 월요일 130상자를 작성해 택배로 전국각지에 보냈습니다.
남원 송동면에서 이장을 하는 친구에게도 SOS를 쳤더니 달려왔습니다. 운반 이송작업은 이웃마을 친구가 트럭을 갖고 와 두 번이나 도와줬습니다. 구원투수로 와준 친구는 2박3일동안 사랑채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진짜 ‘뺑이’를 쳤습니다. 날씨는 너무 더워 하루에도 서너 번 샤워를 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막걸리는 연신 들이켰지요. 작업현장은 혼자 보기에 아까운 ‘장관壯觀’이었지요. 너무 바쁘고 정신 없어 사진 한 장을 남겨놓지 못하게 아까웠지요. 전주시청에서 정년퇴직한 꾀복쟁이 친구도 박스작업(테이핑를 하고 30개씩 담는 일)을 하느라 땀 꽤나 흘렸지요. 산처럼 쌓이는 옥수수껍질은 소가 좋아하는 먹이이기에 동네형이 실어갔습니다. 동네 누님(할머니도 포함)들의 협조 덕분에 다음날도 나머지 작업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모두 170상자를 해치웠습니다. 지나가는 행인 몇이 현장판매를 원했습니다.
조금 부실하다 싶은 옥수수는 30여개씩 담아 인근에 사는 지인 20여명에게 무료 배달하는 수고도 기쁘게 헸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괴로워도 무언가를 누구에겐가 주는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입니다. 돈으로 따지면 5만원도, 3만원도 채 안되겠지만, 정성과 배려가 아닐는지요?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운암에 사는 친구도 도착,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6상자가 필요하다고 떼를 써 물량에 약간의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날이 마침 초복(11일)이었는데, 저녁을 사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옥수수는 씨앗을 심어 100일쯤(95-105일)이면 수확을 합니다. 첫 번째 마디에 열리는 옥수수만이 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번째 마디에 달린 옥수수는 먹는데는 지장없지만, 첫마디 것처럼 수술 부위까지 잘 익지 않아 팔기는 좀 거시기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입니다. 이모작(옥수수 포기 사이에 콩을 심어야 함)을 해야 하기에 옥수수 대를 빠른 시일 내에 베어내야 합니다. 전주 친구에게 교회 신자들에게 알려 맘껏 따가라고 했더니 5명이 ‘횡재’를 했습니다. 이것 또한 좋은 일, 적선積善이겠지요.
아무튼 나흘에 걸친 작업이 모두 끝났습니다. 내 고향은 중국의 만주 봉천奉天(현재의 심양瀋陽)이 아니고, 임실 봉천鳳泉리 냉천冷泉(찬샘)마을입니다. 하여 2023년 ‘봉천의 옥수수 전투戰鬪’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여름철 제법 센 노동이 끝났습니다. 생각해보니, 연인원延人員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2박3일 재능기부를 기꺼이 해준 친구와 또다른 친구 3명, 두 여동생 부부(4명), 동네 ‘늙은 아가씨’들과 할머니, 아주머니, 동네 형, 트럭을 몰고 달려온 이웃마을 친구 그리고 마당에서 수많은 옥수수를 다듬느라 아무 정신이 없으셨던 아버지 등이 전투요원이었습니다. ‘작은 승리勝利’라 부를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 고향 출신 인척인 동생은 자기 회사원들에게 선물하겠다며 42개를 주문했습니다. 이러니, 사람이 어떻게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 동물’인 게지요. 사람과의 얽히고설킨 ‘이런 관계’의 재미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일머리가 좋은 친구와는 죽이 잘 맞았습니다. 새벽 5시 반이면 작업장으로 직행입니다. 8시 아침 먹을 때까지 땀을 흠뻑 흘리며 두시간 여 작업하는 것을, 우리는 ‘해장 한 따까리’라고 합니다. 아침을 먹자마자 또 일터로 향해 ‘두 번째 따까리’를 하면 오전이 갑니다. 수요일 오전, 옥수수 대를 낫으로 쳐내 고랑에 눕히는 작업을 둘이 3시간 넘게 했습니다. 들판이 훤해졌습니다. 친구는 낫질도 잘 합니다. 80m나 되는 긴 줄을, 내가 두 줄 간신히 해치울 때 세 줄 반이나 가볍게 해치웁니다. 그런 후 들이켜는 막걸리 한 잔을 몸에 ‘보약’이 되고 감로수甘露水겠지요. 반려동물 때문에 가야 하므로 ‘콩까지 못심어줘 미안하다’는 친구를 그저 보내줄 수가 없기에 남원까지 전송하며 점심을 사주려 했습니다. 우리 둘이만 먹으면 당연히 재미가 없겠지요. 남원병원 원장친구를 불러내고, 서예가 친구부부에게도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니 금세 5명이 되어, 작은 동창회를 합니다. 병원장은 아직까지 자기가 현역이라며 점심값을 내버려 졸지에 소집한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그런들 어찌하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좋은 재미’를 내년에는, 아니 다시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친구는 “옥수수만큼은 심으라”고 하지만, 옥수수 농사도, 쌀농사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7학년이 되어가는 나이에 ‘편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소득所得하고는 전혀 무관합니다. 우리 나이에 시골에서 ‘돈 만들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인생2막’에 마음대로 해외여행 등 놀러가지도 못한다고 속상해하는 옆지기 성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 안해 봤던 농사일을 ‘경험’으로 3년 해봤으면 됐지, 하는 마음과 솔직히 힘들어서도 못하겠더군요. 아무튼, 이런저런 농사(작두콩, 서리태, 대봉시 등) 경험도 해보며, 귀향 4년이 금세 흘러갔습니다. 정치야 아무리 개같이 돌아가도 세월은 갑니다. 세월은 잘도 간다. 아이- 아이. ‘옥수수 전투’의 작은 승리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장마와 무더위에 일상이 지치기 쉬운 여름입니다. 여름 잘 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