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49
4월3일[성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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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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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dT7gR06Jq0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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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베타니아는 예수님께 아주 친밀하고 각별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인지라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힘겨운 신경전을 치를 때면 더욱 그랬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즐겨 찾으셨던 곳이 베타니아였습니다.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께 일종의 편안한 쉼터 내지는 포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밤늦도록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푸셨을 것입니다.
특히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방문하실 때마다 지극정성을 환대하였고, 예수님께서 세상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환대하고 그분의 쉼터가 되어 드린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개인적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집요하게 졸라대기만 했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틈만 나면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지고 대들기만 했던 지난 시절이 송구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제 집, 곧 제 영혼의 집에 오셔서 편히 머무쉬고 쉬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내 집에 영접하고 환대하고 배려해드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준비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기꺼이 환영하고 배려해야겠습니다.
수난의 때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결전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마리아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민감함으로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이 지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예수님의 방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 남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예수님을 위한 송별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식사가 무르익어 가고 있던 어느 순간, 마리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진 물건인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왔습니다.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왕창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가져왔던 향유가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었던지,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탄식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니라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심 없는 사랑과 철저하게도 세속적인 유다 이스카리옷의 음흉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 인물에 더 가까이 서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실 정성이 담긴 예물입니까? 그저 마지 못해, 아까워하면서 툭 던져버리는 영혼 없는 봉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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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citZzD0t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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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아끼는 자녀가 형제에게 아끼지 않을까?>
영화 ‘라이언 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파사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으로, 아들 심바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린 심바는 세상을 발견하며 성장하고 있고, 아버지 무파사는 그에게 왕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가르칩니다. 하지만, 무파사의 동생 스카는 왕위를 탐내며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스카는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무파사를 살해하고, 심바를 쫓아내어 왕위를 차지합니다. 심바는 삼촌 스카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지 못하고 삼촌 스카의 말대로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프라이드 랜드를 떠납니다. 스카는 심바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심바는 목숨을 건진 덕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친구 품바와 티몬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며, ‘하쿠나 마타타’라는 철학에 따라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장한 심바는 운명적으로 그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고 어린 시절의 친구 나라를 만납니다. 나라는 프라이드 랜드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며, 심바에게 왕의 자리에 서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스카가 하이에나와 결탁하여 프라이드 랜드가 황폐해졌기 때문에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바는 처음에는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려 하지만, 무파사의 영혼과의 만남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책감과 삼촌, 그리고 하이에나들과 대결을 해야 합니다. 결국 심바는 나라, 품바, 티몬과 함께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와 스카와 전투를 벌입니다. 스카는 패배하고, 심바는 왕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영화는 새로운 왕실의 탄생과 함께 평화롭게 회복된 프라이드 랜드를 보여주며 끝납니다.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의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부끄러움도 무릅써야 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 대한 효성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는 품바와 티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길은 부모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대상에게 자신을 봉헌합니다. 부모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들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2~3천만 원 상당의 상당히 고가인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예수님께 아끼는 자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봉헌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성경에서는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막달라의 마리아가 다른 인물처럼 나오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책에는 동일 인물로 나옵니다. 곧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봉헌이 곧 사랑입니다.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정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자녀는 당연히 형제들에게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의 의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아끼지 않는 자녀가 형제 간에도 아끼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 봉헌함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시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예수님에게까지 질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은 형제에게도 아낍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도 아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떤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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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주관하는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이 있습니다. 지난 3월 12일에는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의 강의는 미주지역의 교우들에게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 강의를 해 주셨고, 교우들의 질문에도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주교님은 ‘숨’으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숨이 고르면 건강하지만 숨이 차거나, 불규칙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숨이 멎으면 세상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흙에서 온 사람이 생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숨’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에 의지하면, 하느님의 숨과 함께하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니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믿고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가질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마리아의 잉태로 현실이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한다고 강아지가 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보았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죄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셋이서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는 미사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도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하는 제사입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하는 축제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 나도 걷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던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베드로 사도는 이내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지 못하면 우리들 역시 유혹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욕망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르자,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자 주님께서는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빛이 9개 있고, 어둠이 1개 있을 때 어둠만을 바라보면 빛에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9개 있고, 빛이 1개 있을 때라도 빛을 바라보면 능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둠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빛은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독백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독’을 만지려고 하면 어머니는 못 만지게 합니다. 아이가 독에 감염되어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예방주사가 무서워서 맞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서 예방주사를 맞게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사생활’입니다.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미리 죄를 성찰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하며 고백성사를 보면 좋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 좋습니다. 미사 시간 전에 미리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셨으니, 성사 생활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와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셋째는 ‘성경읽기’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성서에 있습니다. 성서를 읽고, 쓰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서읽기는 내 신앙의 여정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강의를 마치면서 로마의 카타콤베(지하묘지)에 있는 벽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원래 묘지는 죽은 자들의 도시로 불렀는데 신앙인들은 묘지를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머무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벽화들에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그 벽화들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간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신앙이 사랑으로 열매를 맺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마치 주교님께 하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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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1-11: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여기서도 시중을 들지 않고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이렇게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훔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 아닐까?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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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1-3)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다음에 공개적으로 지명수배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공개적으로 지명수배를 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라고 표현되어 있는 그 잔치는 겉으로는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잔치였을 것이고, 또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잔치였을 텐데, 실제로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한 고별 만찬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의 심정은 무척 침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의 이례적인 행동은 사도들과 신자들의 침통한 심정을 대변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것이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신앙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예수님께 표현하려고 최고급 향유를 사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비통한 심정을 생각하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일이나, 그 향유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정말로 사랑이 크고 깊으면 사랑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게 되고, 사랑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게 됩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4-8)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앞당겨서 거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장례를 위한 일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에 근거해서 니코데모가 한 일과 마리아가 한 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39-40)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한 리트라’였는데,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는 ‘백 리트라’였습니다.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는 당시에는 최고급품이었습니다. 가격도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의 백배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에 비하면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가격도 양도 적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유다가 살아서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를 보았다면, 펄쩍 뛰면서 너무 심한 낭비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어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봉헌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마음만 보시면서 그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마르 12,43-44)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가난한 과부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마리아가 한 일은 가난한 과부가 한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든지 적게 바치든지 간에 마음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유다가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면 좋지 않은가? 내가 좋은 일에 잘 쓸 수 있는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마리아가 평소에 항상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예수님에게만 돈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배반자 유다의 말은 마리아가 한 일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돈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아라. 마리아의 행동을 겉으로만 보지 말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라. 나의 죽음을 죽음으로만 보지 말고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여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연결됩니다.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중에 부활하실 예수님께 미리 경배를 드린 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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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 가까이 올라가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에 대한 언급은 다가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합니다.
복음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는 유다와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약 320그램)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삼백 일의 품삯에 상응하는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를 지닌 향유였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행위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최고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유다는 부정적입니다. 그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여기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쓰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있었고 정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에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이 말씀은 향유를 붓는 행위를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함으로써 확인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유다의 모습은 대조적입니다. 마리아가 헌신적 봉헌의 표양을 보여 주었다면, 유다는 탐욕에 빠진 배반자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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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수난여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이 인류최대의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보게 된다.
때론 그 주인공이 되다가 때론 조연이 되다가 때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오늘은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유다가 그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 어치(노동자의 1년 품삯)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다.
유다는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한다.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텐데 하는 그럴싸한 비판적 논리로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세와 거짓으로 사랑하는 자세를 엿보게 된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유다는 거짓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돈이 얼마나 들어도 문제가 없다. 아니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아깝지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따져본다. 요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핑계를 댄다.
말로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예수를 진정 사랑한 것도 아니란 말이다.
이미 유다의 이러한 가식적 사랑의 자세는 예수를 배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다의 예수께 대한 사랑은 전폭적인 사랑이 아니라 계산된 정략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치 정치가들이 정략적으로 이합집산하듯이...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라자로의 누이였고 마르타의 자매였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마리아는 예수를 참으로 사랑한 여인, 예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언니 마르타처럼 예수님께 무엇을 해드릴 여유조차도 없을 정도였다. 그냥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유다에게는 마리아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애정 체험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계산적으로 저 양반을 따르게 되면 뭔가 한자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며 길을 찾는 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 전폭적으로 몸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때가 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위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성주간을 시작하며 복음은 우리에게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유다를 먼저 내 세운다. 나는 누구에게 가까운가?
죄 많은 인간이지만 주님으로부터 구원과 은혜를 체험하고 전폭적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돈도 재산도 몸도 마음도 그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유다처럼 기회주의자인가?
신앙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치면 헌금 조금, 교무금 조금 바치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냉담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인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금 촉구하신다. 유다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논리적으로 이게 옳니 그러니 따지면서 사랑은 하지 않는 그런 위인이 되지 말고 말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그냥 사랑하라고... 오늘 또 다른 베타니아의 마리아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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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효경 다윗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줍니다. 발에 향유를 붓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데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 준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의 여성이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것은 빈축을 살만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의 자신은 가장 비천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감사행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가리웃 사람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 이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인도 북부지방에서 자라는 나르드 나무의 뿌리로 만든 비싼 향유입니다. 유다는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비싼 향유임에 틀림없습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이 하루에 받는 품삯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노동자들의 1년 치 월급에 해당되는 상당한 고가의 향유인 셈입니다.
마리아의 집 형편이 어떤지 몰라도 그런 향유를 발라 드렸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덥고 건조한 기후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특히 목욕 후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서 피부가 건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향수 전문 업자들이 만든 향기 나는 기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발에다가 기름을 바르는 것은 죽은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인데, 시체를 씻은 후에 온몸에다 기름을 발랐습니다. 향기 좋은 기름을 사용하는 것은 시체에서 풍기는 좋지 않은 냄새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이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서 하는 일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향유의 물질적 가치 이면에 있는 의미를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바른 이 날은 파스카 축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십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신앙인이었기에 그분의 죽음을 준비하고서 자신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2천년 전 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 자신으로서는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행동으로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정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바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도 그분 앞에 낮아지는 낮추인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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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장환 마르티노 신부님]
우리는 어제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시작으로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1년 중에 가장 거룩한 성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전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예수님의 죽음 예고(월요일), 제자들의 배반(화요일), 유다의 배반(수요일)을 알립니다.
성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고, 성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성 토요일에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그리고 부활 성야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께서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주셨음을 경축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며 지내온 40일 간의 사순시기를 마무리하고 그 결실을 맺는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된 장소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적이 있는 베타니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유명인사가 된 라자로를 보기 위해서 많은 유다인들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유다는 이것을 보고 그 향유를 살 돈이면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라고 불평을 하자 예수님께서 내 장례 날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마리아를 놔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마리아의 행동과 유다의 불평에 대하여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도 아니고 발에다 붓는 것은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리는 행동은 지극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오늘 보여준 행동은 겸손과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눈에 비친 그 값비싼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는 있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일반적으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5천명을 먹이신 이적 사화(요한 6장)에 보면 그 군중을 먹이는데 2백 데나리온 어치 빵도 부족하겠다고 필립보는 말합니다. 아마 삼백 데나리온이면 5천명도 넉넉히 먹일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 정도면 유다의 불평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편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편을 드십니다. 평소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왜 그렇게 하셨나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는 유다와 예수님의 관점의 차이에서 찾아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서 오직 경제의 논리만을 생각하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진심을 보십니다.
경제논리만으로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경제논리에는 사랑이 빠져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예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한 생명을 살리고 여관에 지불한 경비로 단 두 데나리온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간 사제나 레위사람에게 그 단 돈 두 데나리온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급 향유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표현한 지극한 사랑을 보고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편을 드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다로부터 배반당하시고 베드로로부터도 외면당하실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그런 지극한 사랑을 바라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난의 길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수난의 길에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들과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으니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그 지극한 사랑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마리아의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의 향기로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을 가득 채워보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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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성당 주변에 많은 꽃이 피었습니다. 개나리, 목련, 벗꽃, 진달래의 순서인줄 알았더니 올해는 순서도 없이 마구 피었습니다. 들에는 복숭아도, 배꽃도 만발입니다. 각자의 색깔대로 아름다운 만큼 열매도 풍성히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우리 마음의 꽃도 활짝 피어나길 갈망하며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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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어 박탈 실험’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7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황제는 어떤 언어에도 노출되지 않은 아기가 내뱉는 말이 최초의 언어일 것이라면서, 갓난아기 둘을 산속 오두막에 가두어 키운 것입니다. 모든 언어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 아기가 처음 내뱉은 말은 ‘베코스’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프리기아어로 ‘빵’을 뜻합니다. 그래서 프삼티크 황제는 프리기아어가 최초의 언어라고 발표했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실험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아기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끔찍한 실험이었지요. 그리고 두 아기라는 표본만으로 최초의 언어가 프리기아어라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근거 없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500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단, 이번에는 아주 많은 갓난아기를 한 방에 가둬서 키웠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보모와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기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황제는 아기들의 첫 언어가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살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방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함께 잘 사는 것이 하느님 창조 사업에 부합한 모습이며, 생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함께’ 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함께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의 세상이 될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최고 존경의 표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300일치 노동자 품삯으로 현재 약 3,000만 원의 가치)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 자기 혼자 옳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팝니다. 이 액수는 당시 노예의 가격으로, 노동자 120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을 노예 취급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팔아넘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과연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해야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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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사람>
요한 12,1-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유다인들이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목숨마저
스스로 바치러
먼 길 떠나는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사랑하는 벗과
헤어져야하는
가슴 미어지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바쳐
함께 가난하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가난한 벗들을 모욕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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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주간에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주자 유다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면 더 값어치 있을 텐데 주님께서는 왜 그 짓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냐는 말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유다의 말이 맞고, 주님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사랑의 주님, 평소에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주님,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준 거라고 하신 주님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질책하지 않고 두둔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마리아가 맘껏 사랑을 표하라는 허용입니다. 마리아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사랑을 귀히 여기고 받아주신 겁니다.
상대의 사랑을 귀히 여기고 받아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의 사랑을 하찮게 여기거나 귀찮게 여길 것이고 아예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여간 지금 주님은 죽음을 앞둔 시점이고, 그래서 지금은 당신을 하게 내버려 두시며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도 성주간에는 이웃 사랑도 좋지만, 주님 사랑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다음에는 이웃 사랑을 열심히 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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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는 모두의 고향>
- 하느님, 예수님 역시 모두의 고향 -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 중 한 말마디가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위로와 치유를 받은 듯 마음이 참 편안했고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Church, home for all(교회는 모두의 고향)” 즉시 하느님도, 예수님도 모두의 고향이라는 생각에 다음 글을 전송했고 공감의 글도 받았습니다.
-“Church, home for all
교회는 모두의 고향
God, home for all
하느님은 모두의 고향
Jesus, home for all
예수님은 모두의 고향
Coming home(컴잉 홈)
고향에 돌아올 때 힐링(치유)의 구원이다!”-
이에 대한 답신도 나눕니다.
“태능 요셉수도원이 마음의 고향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신 고향입니다. 마음이 힘들 때 요셉수도원에서 치유의 은총을 받아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부님들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참으로 본향을 깨닫게 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시 가는 곳마다 성전에 들어갔을 때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수십년 동안 휴가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도 고향집 같은 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윗글에 이어 어느 환자분과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치유되신 듯 하여 기쁩니다! 최고의 명약 셋은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희망, 기쁨, 감사가 우리를 치유합니다.”
“신부님, 약먹을 때마다 외치겠습니다. 희망, 기쁨, 감사!”-
Coming home(컴잉 홈) 집에, 고향에 돌아올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고향집과 같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될 때 병들고 아픈 이웃들에게 치유의 구원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절친이 될 때 이웃에게 고향집같은 치유의 구원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우리의 고향입니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치유의 구원임을 치유의 고향집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 졌을 때 마리아의 반응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바로 치유의 고향집,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이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참 아름다운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향유냄새가 그대로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고향집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지 않는가?” 일견 유다의 말이 합리적인 듯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참된 고향집임을 몰랐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다.”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이미 사랑하는 분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으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치유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제1독서 이사야서의 나오는 주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모든 분들이 잘 마음에 새겨할 내용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이런 주님의 종같은 분들과의 만남은 그대로 치유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여기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이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껴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온유하고 겸손하고 섬세하고 자비롭기가 그대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은 주님의 종입니다. 이런 고향집같은 예수님을 닮은 주님의 종인 사제를, 형제자매를 만나면 저절로 치유의 구원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종으로 불림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베푸시는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고 이웃을 위한 세상의 빛으로, 치유의 구원자로, 치유의 고향집으로 파견하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치유의 고향집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Church, home for all
교회는 모두의 고향
God, home for all
하느님은 모두의 고향
Jesus, home for all
예수님은 모두의 고향
Coming home(컴잉홈)
고향에 돌아올 때 힐링(치유)의 구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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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여라."(요한12,7)
성주간 둘째 날인 오늘 복음(요한12,1-11)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행위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베타니아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와 그의 두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약 320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돈에 관심이 많았던 도둑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 거룩한 행위에 못 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12,5)
'삼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00만원'에 해당됩니다.(1데나리온=노동자 하루품삯=10만원)
'예수님의 장례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일,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3일 후인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리아의 거룩한 행위'는 '당신의 장례날을 위한 행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장례날을 위해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선물은?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우리의 선물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회개의 선물', '회개의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이사42,1-7)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공정을 세우러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으로 파견되셨음을 선언하는 노래입니다.
공정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신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회개의 선물을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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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UE3mA-4q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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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 3)
마음의 가치를
만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간절한 향유처럼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직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리아의 향유가
유다 이스카리옷의
욕심을
일깨워 줍니다.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마음이
성주간의 마음입니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영원한 것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잠깐 피었다
떨어지는 봄꽃처럼
우리의 시간은
참으로 빠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마음의 시작입니다.
영원한 사랑에
동참하듯 우리
마음의 사랑을
이제 꺼내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려야 할
시간과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마음을
씻어주는 것은
마음이고
향기를 더욱
향기롭게 하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씻어야
찾을 수 있고
씻어 주어야
흠뻑
젖을 수 있는
마음의 이치입니다.
소중히
간직해야 할
마음의 길
그 길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사랑도
마음인지라
씻어주고
닦아주어야
더욱
향기롭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 하시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사랑은
이미 부활의
향기로운
마음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만나는
마음의 일치입니다.
마음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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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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