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냅니다.
이 축일로 인하여 예수님의 유년기를 묵상했던 성탄시기를 마치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성탄을 기다리던 대림시기에 접어들면서 ‘교우분들은 아기 예수님께 무얼 예물로 드리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대림, 성탄을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세례 축일을 맞아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를 잠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칠성사는 세례, 견진, 고해, 성품, 혼인, 성체, 병자성사입니다. 세례 예식 때 우리가 봉헌하는 기도가 있죠.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버립니까?”
“예, 끊어 버립니다.”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하여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예, 끊어 버립니다.”
“죄의 근원이요 지배자인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예, 끊어 버립니다."
사실 이게 ‘구마 예식’입니다.
드라마 프리스트, 손 더 게스트나 영화 엑소시스트,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에 들린 이를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바로 구마 예식입니다.
왜냐하면 성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옛 본성을 버리고
새 본성을 입어 사람의 자녀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성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대부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동물도 죽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본성’이에요.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극히 본성에 충실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원죄로 물든 나의 이기적인 본성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본성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눈앞에 보이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나를 내어주는 사랑’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본성이죠.
이건 엄청난 변화입니다. 어쩌면 ‘변화’가 아니라, ‘변모’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듯 해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세례성사를 준비했고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세례명의 성인이 우리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하는데
가끔은 소위 ‘간지나는 세례명’, ‘이것하면 이쁠 것 같은 세례명’, ‘멋진 세례명’,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유니크한, 독창적인 세례명’, ‘생일과 가까운 성인’을 고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수호천사인 하늘나라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면서
그 성인처럼 살아가겠다는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인들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본성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본성을 따라 살았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품에 오르신 것이죠.
내 세례명의 성인을 잘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아가서 그분의 모습을 닮아살겠다는 각오와 의지는 더 중요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 아들이다.”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쏟아주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죄를 끊어 버리는 것’,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악마의 유혹을 끊어 버리는 것’,
‘죄의 근원이요 지배자인 마귀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가 무엇이며 악마와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나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품 안으로 부르시고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면서
세례 받을 때의 첫마음을 회복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을 결코 잊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례를 주신 주님의 사랑에 희망을 두면서 평화로운 연중시기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