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처럼 빨간 가선을 그리고 타들어 가 벌집모양이 되었다가 무너져 내리는 종이의 소각모습, 스스로를 불태워 버리는 담배와 화산의 이미지들은 인류의 자기파괴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세상을 향한 거부의 몸짓
라우리의 “화산 아래서”는 그 정교한 예술성에 있어 모더니즘 시대의 거장인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혹은 T S 엘리엇의 작품에 필적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들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 이 작품만이 유일하게 명작의 대열에 낄 수 있는 수월성을 지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혹은 이 작품에서 알코올 중독자였던 작가가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공의 혼돈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건강한 감각을 지닌 독자들에게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라는 영화가 최근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냉혹하고 몰인정한 기능 위주의 사회에서 부드러운 연민으로 가득한 감성을 지닌 인물이 갈 수 있는 길은 세상에 대한 거부의 몸짓밖에 없다는 설정에 대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이것은 “화산 아래서”도 공유하고 있는 설정이다.
“화산 아래서”는 1930년대 말의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주인공은 멕시코 주재 영국 영사인 제프리 퍼민(Geoffrey Firmin)이다.시인적 감수성과 깊은 정감을 수줍음 속에 감추고 있는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외롭게 자란다.1차대전중 그는 영국해군 소속 ‘사마리탄 호’의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중 독일의 대형 잠수함을 나포하게 되고,그의 부하들은 체포된 독일 장교들을 배의 화덕 속에 넣고 태워버린다.그 일로 제프리는 처음에는 군사재판을,후에는 훈장을 받게 되는 묘한 운명에 처한다.그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전력과 관계가 있음을 작품은 암시한다.
○파시즘시대 폭력성 은유
작품의 도처에서 우리는 “올락의 손”(Las Manos de Orlac)이라는 영화광고 포스터에 접하게 된다.이 영화에서는 한 피아니스트가 손에 손상을 입어 새로운 손의 접합수술을 받게 된다.이 피아니스트는 그 손이 살인자 올락의 손이라고 생각하여,손의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노상 손을 씻는다.이것은 예술과 철학으로 높은 수준의 정신문화를 창출한 독일에서 나치즘이 팽배해 가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상징한다.
자신의 지휘하에서 자행되고 있던 잔학행위로 훈장까지 받은 제프리의 경우도 “올락의 손”이 상징하는 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이것은 또한,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파시즘의 도래를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여러 나라의 상황을 대변한다.멕시코에서는 사회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파시스트 세력이 사회 각층에 침투하여 그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공화파가 프랑코가 지휘하는 파시스트와 싸우고 있었고,중국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제프리의 이복동생이자 신문기자인 휴는 이 사건의 현장들을 오가며,세계의 정치세계를 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제프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끔찍한 폭력과 잔학한 세상을 만취의 상태에서 너무나도 역력히,그러나 무기력하게,그래서 비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제프리의 사생활 또한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제프리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절망하여 제프리와 이혼했던 부인 이본느는 제프리에 대한 깊은 사랑을 버릴 수 없어 재결합을 시도하려 돌아온다.그러나 이본느를 숭배하며,그녀에 대한 지순한 시적 사랑을 지닌 제프리는 살인자의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처럼,알코올로 자신의 삶과 이본느와의 재결합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만다.
○비극적 종말 상징한 화산
작품의 도처에서 라우리는 다양한 소각의 이미지를 사용한다.지렁이처럼 빨간 가선을 그리고 타들어 가 벌집모양이 되었다가 무너져 내리는 종이의 소각모습,스스로를 불태워 버리는 담뱃불,그리고 화산의 이미지는 인류의 자기파괴성에 대한 은유가 되고,그 이미지를 포착해 내는 라우리의 예리함은 비감한 전율을 일으킨다.
유원지의 놀이기구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채로 술이 취해 방황하던 제프리는 파시스트 경찰들에게 스파이로 몰려 즉결처형을 당하고,화산 아래 있는 깊은 골짜기에 버려진다.같은 날 휴와 제프리와 외출을 했다가 제프리를 잃은 이본느는 어둠과 천둥,번개 속에서 휴와도 갈라져,거친 날씨에 놀라 날뛰는 말에게 밟혀 죽는다.라우리의 파괴와 비탄의 미학은 이렇게 멕시코의 명절 ‘죽은 자의 축제’ 속에서 마감된다.
출생-사망 1909.7.28 ~ 1957.6.27 국적 영국 출생지 영국 체셔주(州) 버컨헤드 주요작품 《울트라마린》(1933) 《화산 밑에서》(1947)
체셔주(州) 버컨헤드 출생.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후,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다가 캐나다로 이주, 1939∼1954년까지 밴쿠버시(市) 교외에서 살았다. 심한 알코올 중독과 편집병(偏執病)으로 고생하였으며 생존시에 출판된 것은 약간 자전적(自傳的)인 소설 《울트라마린》(1933)과 알코올 중독자가 된 외교관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멕시코의 풍물을 배경으로 묘사한 소설 《화산 밑에서》(1947)의 2편뿐이었다. 유고로 단편소설집 《주여, 당신이 살고 계시는 천국에서 귀기울여 주소서》(1961) 외에 E.버니가 엮은 《선시집(選詩集)》(1962)과 미망인이 엮은 《서한선(書翰選)》(196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