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임금 앞에 끌려갑니다.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진다.”(다니 6,13)라는 다리우스 임금의 금령을 어기고 그가 하루에 세 번 하느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임금은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내시기를 빈다.”(6,17)라고 말하면서
하는 수 없이 그를 사자 굴로 보냅니다.
다음날 새벽, 단식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임금이 사자 굴로 가 다니엘을 부르니
그가 응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사자들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하신 것이었지요.
임금은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고, 악의로 다니엘을 고발한 이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사자 굴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날 그렇게 운명이 서로 바뀝니다.
이십여 년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저를 위하여 보험을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동생은 보험이 왜 필요한지 열심히 이야기하였고, 오빠인 저는 신부로서 보험이 왜 필요 없는지를
한참 설명하였지요. 제게는 하느님과 교회가 보험이라고요.
저를 지금까지 키워 준 큰 자비와 은혜로움을 알기에 하느님과 교회에 저를 온전히 맡기고
하느님과 교회를 믿는다고요.
만약 교회가 어려워지면 그 교회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징벌의 날이면서 또한 믿음의 자녀인 저희에게는
속량의 날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제 몸과 마음을 맡기고자 합니다.
/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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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누워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누운 채로 눈을 뜨지 못한다면 …….’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찾아옵니다. 그 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내가 이루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도시인 예루살렘의 멸망, 임신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배 속의 아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젖먹이 아이 ……,
그 소중함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그 전능한 힘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힘임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마십시오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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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0-28 참조)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당신을 맞아 변형되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