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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 조설영시인님의 카톡에서]
성악가 조수미(曺秀美)
세계 Top Class인 Opera가수 조수미 (曺秀美)를 우리 모두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조수경이었는데 발음이 부자연스러워 조수미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경남 창원 동면 본포리가 고향이며 서울 선화예술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녀는 원래 피아노 신동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아름답고 노래를 잘 해 주위에서
노래를 시켜야 한다고 적극 권유했다고 합니다.
이미 어릴 적부터 천재성이 보였으며 그런 이유로 서울대학교 음대 성악과에 합격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같은 학교 경영학과 남학생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조수미의 모든 것이 달라졌고 예전의 조수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교수와 부모님은 상의 끝에 조수미의 장래를 생각해서 서울대를 중퇴시키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있는 이태리 로마의 명문대학인 산타체칠리아 (Santa cecilia Conservatory of Music) 음악원에 강제 유학을 보냅니다.
그때부터 조수미는 본격적인 재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조수미는 지독한 결단을 하면서부터 음악원의 5년 과정을 단 2년만에 조기 졸업하는 놀라운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고 교수 전원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합니다.
세계 무대를 활보하며 결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한 그녀의 열정이 오늘의 조수미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로 한국을 널리 알리며 최정상의 대우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조수미씨가 대단히 자랑스럽고 우리의 롤 모델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1962년생으로 회갑을 훌쩍 넘겼는데 아직도 미혼의 청춘 성악가입니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스물 여덟 살 때 이미 세계 정상에 있었던 조수미 씨의 수많은 일화 가운데 유명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 영국의 가장 큰 음반 회사에서 조수미 씨에게 레코드를 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가수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음반회사에서 자신의 레코드를 내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오면, 조건없이 환영하면서 좋아서 즉시 수락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조수미씨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조수미씨는 레코드 회사 사장에게 ''조건이 하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레코드에 ‘보리밭’을 넣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레코드 회사 사장은 이 분야에서 50년 동안이나 종사했지만 '보리밭'이라는 곡은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던 생소한 곡이었습니다.
“조수미 선생, 그 '보리밭'이라는 노래가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Aria)입니까?”
“그것은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가 아니라, 내 조국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가곡(歌曲)입니다.”
조수미씨의 제의를 듣고난 레코드 사 사장은, “이번에 제작할 레코드는 한국의 서울에서 팔 레코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도시인 파리에서, 런던에서, 로마에서, 빈에서도 팔고, 뉴욕에서도 판매할 세계적인 레코드가 될 것입니다. 그 레코드에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아무도 모르는 ‘보리밭’을 넣는다면 그 레코드의 성공은 커녕 팔리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만 두시지요.”조수미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레코드 회사 사장은 “앉으세요. 꼭 원하신다면 제의하신대로 ‘보리밭'을 넣도록 합시다. 조수미 선생, 그럼 이제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조수미 씨는 여기서 그냥 끝내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레코드 재킷에 인쇄되는 '보리밭'이라는 타이틀 글자은 대한민국 국어인 한글로 인쇄해 주셔야합니다.”
레코드 회사 사장은 비서실에 전화를 하는 등 한참 수선을 피웠으나 지금 영국에는 한글 활자가 없다는 이유로 조수미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조수미 씨는 물러서지 않고 ''사장님! British Airway (영국 항공사)에 가면 한글 활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라고 맞섰습니다.
그래서 조수미씨의 해외 첫 번째 레코드에는 '보리밭'이 수록되었고, 자켓에는 '보리밭'이 영어도, 불어도, 이태리어도 아닌 한글로 선명하게 <보리밭>이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로 조수미 씨의 위대한 애국정신입니다.
이런 내용의 요구는 일국의 대통령이 레코드사를 방문해서 부탁해도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 지구촌 한 변방 국가의 여성가수가 자기 조국(祖國)에 대한 자긍심과 열정과 깊은 애국심을 품고, 자신의 재능을 담보로 한 대단한 뚝심을 가지고 밀어 붙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화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수미 (曺秀美)씨는 88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전야제 그리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에 이태리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그 바쁜 일정에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단숨에 서울로 달려와 행사가 빛나도록 노래했습니다.
조수미 씨는 조국에서 부르면 어떤 선약 (先約)도 뒤로 미루고 언제든지 달려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인성을 길러내는 것이 우리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식과 기술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정교육과 공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심겨져야 합니다. 장차 국가를 책임질 세대에게 경쟁력 있는 각자의 품성을 고양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들 인격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대한민국에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고 아름답게 성장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정체성과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에 따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떠한 형태로든 충성하고 봉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괴테가 유명한 희곡인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80세가 넘어서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Dome)을 70세가 넘어 완성했습니다. 헨델과 하이든같은 유명 작곡가들도 고희(古喜)의 나이를 넘겨서 불후의 명곡을 썼습니다.
모세도 80세에 민족을 위해 장정 60만명 (실제 숫자는 200만명)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했으며, 가나안 복지를 취하고 유대 민족을 구출하는 대역사를 이룩했습니다. 당시 모세의 나이는 지금의 나이로 환산하면 100세가 넘는 노령이었습니다.
우리는 노년을 여유롭고 화평하게 보내지 위하여 온유한 마음과 세상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심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수미 씨처럼 우아한 여생을 보내겠다는 결단을 하고 좋은 생활습관이 몸에 배도록 매일 훈련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 모두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천손민족 후예인 우리는 성취할 수 있고 결국 성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보리밭"을 조수미가 부릅니다.
https://youtu.be/ln6cei3vblA
기쁘고 행복한 주일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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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마음! 마음!
오늘 하루도
고마운 마음으로
시작 하여야 겠네요
즐거운 일도 없겠지만
슬퍼할 일도 없겠지요
오직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하루동안 지내면서
몸과 마음이 아무런 탈없이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가 서산에 저믈고
잠자리에 누워서
평정심을 유지 한체
잠을 청 할수만 있다면 다행 스럽고 고마울
따름 입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청승 맞다고
느낄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매일같이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삶속에서
뒤늦게 나마
깨닳은 지혜라고
자문자답 해봅니다.
이를테면..
썩~ 즐거운 일이
생기지 않터라도
우울 하거나 슬퍼할
일이 없이 그져 몸과
마음이 평정심을 유지
하면 되는것 입니다.
군자의 마음 이란?
적은 일에 화내지 앟고
기쁜 일에 좋다고 경솔하게 흥분하여 날뛰지 않는
그야말로 평정심을
갖도록 노력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추스린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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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음 "
마음! 마음! 마음!
참으로 알수가 없구나
관계가 좋아 마음이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줄것
같이 하다가도
조금만 관계가
나빠지면 마음이
옹졸하여 다시는
안 볼것 같이
외면하며 돌아선다.
너그러운 마음은 군자요
옹졸한 마음은 졸부인데
한번 밖에 못 사는 삶
기왕이연 군차처럼
살다가면 얼마나
좋을 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2024년 초여름
덕암/조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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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 !
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우리 딸이 며칠 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합니다"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른기침을 뱉어내는 아기는 한눈에 봐도 병색이 역력했다.
숙직 의사는 청진기로 이리저리 아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닙니다. 백일해입니다"
"백일해요? 안 좋은 병인가요?“
"연령이 낮을수록 위험한 병입니다. 기관지 폐렴이나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인 무기폐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이 아이는 조금 심각한 상태입니다"
의사에 말에 아기의 엄마는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 아기만은 꼭 살려주세요"
다행히도 아기는 의사와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걸음마도 떼기 전에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아기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 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게 된 것이다 .
나치 추종자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발레리나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 녀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었다.
헵번은 짐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갔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즈음 우연히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캐스팅이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로마의 휴일〉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를 일약 은막의 여왕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공주님의 사랑이라는 동화 같은 주제가 로마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숱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역의 <그레고리 팩>은 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 는 소위 '헵번 스타일'이라는 솟커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운도 좋았다. 영국 왕실의 유명한 로맨스인 마가렛 공주와 타운젠드 대령의 비련이 이슈가 되고 있을 때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원의 벽에서의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26회 미국아카데미와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 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언제나 둘이서>,
<백만달러의 사랑>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9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우정 출연으로 등장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영회는 오드리 햄번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제2막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해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었다.
우연히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에서 자신의 영화배우 경력이 세상 사람에게 관심과 신기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구나. 영화의 힘이란 정말 놀랍네!"
그녀는 유니세프를 찾아갔다. 유니세프가 그녀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에 손을 내민 것이다.
헵번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이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보수는 1년에 1달러뿐이었고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정을 다해 헌신했다.
"오드리 헵번이 인기가 떨어지니까 별 쇼를 다하는구만."
"몇 달 저러다가 말겠지"
"자기가 아직도 앤 공주인 줄 아나봐"
언론과 세상사람들은 그녀의 행보를 곱지 않게 보았다.
과거의 은막 스타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곤경과 죽음에 처한 아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게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에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기부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요?"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했을 때 마을 공터 구석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자루꾸러미를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원주민에게 웃으며 물었을 때 그녀는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시체였다.
"오마이갓" 오드리 헵번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았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부터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을 향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이 소말리아 방문이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을. 사실 헵번은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되는 것이 두려워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녀는 아랫배에 강한 통증을 느낄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오드리 햄번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명망 있는 의사들이 앞 다투어 그녀를 살려보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암이 워낙 온몸에 널리 퍼져 있어서"
오드리 헵번은 고개를 떨군 의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그 것이 제 숙명인걸요. 그래, 신이 제게 주신 시간이 얼마쯤 남았지요?"
"한 3개월쯤 남았습니다."
"3개월이라 ...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충분하군요."
오드리 헵번의 암소식이 알려졌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돕는 거죠?"
오드리 헵번이 대답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기족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있어. 한번 들어보렴 ."
그녀는 유언처럼 시를 읇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이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93년 1월 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였다.
그날은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던 날이었지만
그녀의 사망 기사가 클린턴 대통령 취임 기사보다 먼저 다루어졌다.
그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티파니 보석가게는 일간지에 광고를 싣고 전 세계의 매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였다.
"오드리 헵번. 1929 ~ 1993. 우리의 영원한 친구. 티파니 사."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 은 장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
https://youtu.be/1yV-Mr2D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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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생각
good idea
💌 감사한 하루의 행복
이른 새벽 눈을 뜨면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밥과 몇 가지 반찬...
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오늘 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누군가 나에게
경우에 맞지 않게
행동할 지라도
그 사람 으로 인하여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태양의 따스한
손길을 감사하고,
바람의 싱그러운
속삭임을 감사하고,
나의 마음을 풀어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음을
또한 감사하렵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 가야겠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 났음을
커다란 축복으로 여기고
가느다란 별빛 하나,
소소한 빗방울 하나에서도
눈물겨운 감동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맑은 영혼의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고
나에게 확신을 갖는일입니다.
가치있는 인생을 살면서
가치있는 사랑을 하는것이
최고의 삶이고
행복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감사(appreciation).
福된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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