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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숭사리 교회개혁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찬바람
* 기독교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기독교 예정론을 믿으면 역사의식을 상실하고 현실의 삶에서 나태와 방종을 갖고 오게 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 할 때 따라 나오는 귀결이다.
이 장에서는 기독교 예정론이 성도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박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 모체가 됨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의식 태동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 보고 난 후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1. 역사의식 태동의 역사적 기원
20세기의 저명한 역사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의 날카로운 지적에 의하면, 서양 세계에서의 역사의식은 실상 그리스·로마시대가 아니라 기독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4∼5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역사관은 기독교 사상의 혁명적 영향을 받아 혁신되었다고 한다.(R. 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1946, p. 46)
그것은 바로 어거스틴이 최초로 시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색을 시작하고, 시간의 태초와 종말을 의식하는 역사 신학적 사고가 생겨날 무렵이다.
그 이전에는 사실 상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사색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서 사색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에 대한 사색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썩게 하고 죽게 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루타르크는 ‘시간은 인류의 원수이며 모든 것을 부패시킨다’ 라고 말했다.
기원전 5세기 인물인 서양철학의 대부격인 플라톤은 변화하는 ‘시간의 세계’ 를 타락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참된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역사 안에서 철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플라톤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르도토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역사의식은 현재나 과거가 천편일률적으로 영원히 순환하는 것으로서 역사는 마치 꽃이 피고 지는 반복적 흥망성쇠의 기록으로 볼 뿐 어떤 의미가 깃든 것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것을 콜링우드는 희랍사상의 반역사적 경향(anti-historical tendency) 이라고 지적했다.(앞의 책, pp. 20∼21)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진리가 희랍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변화하는 시간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리는 내세의 세계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세계에 대한 새로운 혁명적인 관념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려 간다는 것이 이제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망적이며 긍정적인 것으로 역전되며 죽음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소망적 과정이었다.
이 뿐 아니라 철학자 칼 뢰비트(K. Löwith)가 잘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사관만이 역사과정의 중심점(그리스도 사건)을 정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점을 기점으로 한 이전(과거)와 이후(미래) 즉 현재, 과거, 미래라는 역사의 관념이 탄생할 수 있다(K. Löwith, Meaning in history, 1949, p. 182)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인 사관들이 여러 가지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직선적 사관(linear view of history)이고 다른 하나는 순환적 사관(circular view of history)이다.
엄격하게 이야기해서 기독교 사관과 그것의 영향을 받은 사관 이외에는 전부 순환적 사관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순환적 사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혹은 유사한 사건이 언젠가 또 다시 반복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역사의 진보라든가, 역사를 통한 반성의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지금의 삶이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반복 재생된다고 믿고자 하는 근거없는 신념일 뿐이며 시간의 영구한 연속에 자신을 심리적으로 맡겨 버리면 나약하고 허황된 사고와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반면에 기독교에서만이 직선적 역사관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역사의 시작인 태초로부터 과정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합목적적인 의미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진행시킨다.
이러한 기독교 사관에서라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명확한 직선적인 시간(역사) 개념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점에 서 있는 신앙인은 과거의 사건을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고 성숙시키려는 섭리로 감사히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나님 나라의 의의 도구로서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미래의 삶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장중에 맡기고 소망가운데 바라 본다.
이러한 직선적 역사의식의 원형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 성도에게서도 명확히 발견되어진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다윗왕조 이후의 백성들은 그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이 과거 그 열조와 맹세하사 약속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과거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현재의 삶의 문제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더 나아가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할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 책망하고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그 결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약속대로 70년이 차면 회복될 것을 바라 보았다.
이는 더 나아가 장차 미래에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바벨론에서의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지자와의 약속대로 장차 하나님께서 예언한 약속대로 메시야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미래의 소망 중에 살아가는 진정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원형적 역사의식은 예수님 안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러 오시되 그 분은 과거 구약의 언약을 자신의 온몸을 통해 성취하고 계시는 분이요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해 미래의 역사를 빚어 가실 것을 잘 알고 계셨고 마침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을 예언적으로 언약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언약 성취의 역사적 의식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의식하고 계셨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지는 역사의식은 바울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바울의 모든 글은 구약의 언약과 예언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차매 모든 일이 이루어지며 미래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뜻에 의해 진행됨을 믿었다.
그것이 신약 성경안에 구체화 된 것이다.
구약 성도의 메시야 대망이 신약성도에게 와서는 메시야 재림 소망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성경 안에 드러나 있는 언약에 근거하는 역사의식은 예수님 오신 후 4~5세기 무렵 어거스틴에게 와서 보다 확실하게 구체화 되어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적 사관에 의한 역사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역사의 주관자가 존재하지 않는 순환적 역사관에서는 생겨날 수 없으며, 시간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 사관에서만 태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19세기 서구라파의 진보주의 사관이나 마르크스주의 사관 등의 미래 지향적 직선적 사관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기독교 사관의 철학적 변형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권 밖의 동양 세계에서는 도무지 직선적 사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기독교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 -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
위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최초로 역사에 대한 언급을 한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을 강렬하게 주장하면서 동시에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사색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예정론과 역사의식 양자간에 모종의 긴밀한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도대체 예정론과 역사 의식 이 양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이 글에서는 어떤 신학자나 역사 철학자의 논의를 빌리지 않고 오직 성경의 논리에 근거하여 논증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양자의 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밝혀 보도록 하겠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義)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義)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이 믿음이 인간편에서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됨을 확실히 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함으로가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못박는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세우심이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것이며 그런즉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도 하심을 명백히 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해 반문하는 인간을 향해 바울은 지음을 받은 진흙덩어리 같은 인간이 지은 자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할 권한조차 없음을 말했다.
그런 반문 자체가 이미 자신이 자신의 존재에 근본적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는 피조물이요 또한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인정치 않으려는 죄의 근성에서 나온 그릇된 질문임을 말하는 것이다.(롬 9장)
이런 주장을 한뒤 바울은 하나님의 의(義)의 실현, 즉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라는 것이다.(롬9장 후반부)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의 언약의 성취인데 이때 구약의 언약은 다시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다름 아닌 창세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기초한다.
이 글은 예정론을 주로 신약을 근거로 전개했으나 실제 구약의 언약 역시 예정을 근거로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G.H.Clark의 저서 Predestination의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예정이 구약에도 편재된 교리(pervasive doctrine)임을 분명히 했다. (p205)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미 전제되고 있으며 이 내용은 에베소서에 가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까지에서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논한 후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찬양한 다음 12장에서 성도의 생활을 권면하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정론과 성도의 실제적 신앙과의 관련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앞절에서 밝힌대로 기독교 예정의 목적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이를 깨달은 성도는 바울이 했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때의 찬양과 감사는 반드시 성도로 하여금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있는 삶의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정은 성도의 참된 열심있는 삶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예정론을 배운뒤 모든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열심도 없어지고 나태하게 된다는 것은 예정론을 로마서에서 처럼 성도의 참된 열심을 가져오는 성경적 은혜의 원천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는 이방종교의 숙명론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에베소서의 증거를 통해 좀더 상세히 확인해 보기로 하자.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으로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땅의 교회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며, 또한 어떻게 교회의 생활을 해 가는 것이 올바른 가를 가르쳐 주는 체계적이고도 장엄한 교회론에 관한 서신이다.
바울은 1장에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1장 3~13절에 이르기까지 곧 바로 교회의 영원한 기초를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그 내용 중 첫번째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엡 1:3~6)
그 다음 7~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죄사함도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1~14절에서는 이 예정을 따라 약속의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인치시고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장엄한 사역의 내용은 서신의 중·후반부에 전개되어갈 교회의 성장과 윤리부분의 기초가 된다.
즉 현재의 교회의 성장과 생활은 이미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정의 시점이 역사 내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영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듯 그의 계획과 예정 또한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기에 불변적이며 그 계획은 역사 내에 실현될 때 한치의 착오없이 이루어질 성실한 계획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역사 안에서의 어떤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구원의 계획은 창세 전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즉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구원의 실현은 영원한 경륜의 때가 찬(카이로스적) 실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명백한 성경이 증거하는 기독교 예정론의 진수이며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되게 하는 핵심적 성경진리이다.
이것의 부인은 구원의 문제에 인간의 계획과 선행과 공로를 내세우고자 하는 자고한 인간철학의 장난이거나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는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구원론과 교회론은 장엄하고도 영원한 예정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을 말하지 않는 구원과 교회에 대한 언급은 뿌리 잘린 나무의 가지와 열매의 시한부 생명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구원의 즐거움과 교회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근본 뿌리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말미암은 예정에 돌리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이 영원하고도 장엄한 예정론을 말하고 나서 4장 17절 이하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권면하는 과정에서 5장 15절에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권고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세월이란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며 그것을 아끼라는 말은 어리석게 낭비하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 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15절 앞부분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세월을 아낄 수 있는 것, 즉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지혜를 가질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지혜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적인 슬기로움이나 영리함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에베소서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갖고 계셨던 창세 전의 은혜로운 예정의 경륜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예정을 따라 은혜의 선물로 거저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즐거움을 갖게 하고 비록 삶의 여건이 어려울지라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성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욕을 위해 세월을 낭비해 왔던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역사적 사명의식에 불타는 아름다운 삶을 점차 지향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과 성도가 갖게 되는 역사의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을 깨닫고 난 후 삶에 방종과 나태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으로 오해하여 가르치거나 배울 때 생겨나는 일이다.
오히려 기독교 예정론만이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본 원천이 되기에 성도로 하여금 현재의 역사적 삶에 대한 성실한 삶의 근거가 되며 또한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신앙적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현재의 삶이 어떠한 고난에 있을지라도 영원한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은 현실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두 철미 확신했던 바울의 실제의 삶은 이를 너무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바울은 그토록 무수한 삶의 역경과 고비를 거쳐 갔으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었기에 세상은 바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상 바울처럼 역사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은 찾아 보기 드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짚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바울에게서 영원과 역사 (시간)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즉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은 영원(내세)을 택하면 역사에 소홀하게 되고 역사에 관심을 두면 영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역사는 영원안에 일원론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영원한 은혜의 예정을 깨달을 수록 역사 현실에서 참된 열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바울에게 역사 현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고 발견하고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육적 실천적 현장인 것이다.
지금 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이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 역사의 흐름을 자기 중심적으로 파악하려는 왜곡된 철학적 역사의식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함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경륜, 그리고 그 경륜대로 역사의 현장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지금의 역사에 맡겨주신 아름다운 주의 뜻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신앙적 역사의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정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세월을 아낄 줄 아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기독교 예정론은 올바른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모체이자 원천이 된다.
Ⅳ. 성경적 역사의식의 정립
지금까지 우리는 성도가 성경대로 예정론을 믿게 되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도피적이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도피주의적 신비주의 신앙에 빠져 탈역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마치 역사만을 위한 종교인 것 같이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평면화, 역사화시켜 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양극화된 두 부류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 우리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잘못된 역사 의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서 성경대로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1. 신비주의적 탈역사의식 비판
신비주의적 신앙지도자들은 자충족한 문자적 성경계시보다는 현재의 신비주의적인 잘못된 계시와 체험을 더욱 중요시 함으로 말씀에 의한 인격적 신앙성숙이 아닌 비정상적인 체험과 갑작스런 변화 그리고 신비스런 황홀경을 강조하게 된다.
성도는 그러한 체험과 황홀경 속에서 현실적 삶의 어려움을 일시적으로 마취시켜 잠시 위로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마취의 효과는 점차 현실에 대한 신앙적 감각을 무디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데 심각한 장애를 가져 온다.
약 20~30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오순절 운동과 그와 유사한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도로 하여금 역사적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신앙 성숙의 교육적 무대로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에 의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속된 것으로 보아 기피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신앙 공동체라는 미명 아래 자기 폐쇄적이며 위축된 삶을 영위하고, 소위 속세를 떠난 수도원 운동, 불건전한 은사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경원시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 신앙운동에 현실 도피적이며 탈역사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의 해독성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 보다 훨씬 심각하다.
한번 신비주의적 신앙에 접하게 되면 점차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며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바로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양상을 띠게 되고 더 나아가 역사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탈역사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고도의 신앙수준인 영적 황홀경의 세계에 있다고 착각하며 현실을 직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건과 건강으로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고 노력하려는 신앙적 의지를 갖기보다는, 기도가 자기 욕구나 자기 소원을 채워주는 만능의 도구인 줄로 착각하고, 반신앙적인 이방 종교의 주문같은 기도로 삶을 영위한다.
이쯤 되면 현실 감각을 상실한 일종의 정신적 장애자 내지 몽상가인 셈이다.
결국 성도가 극단적 신비주의 운동에 빠져 버리게 되면 역사적 사명의식을 상실한 채 자신의 영적 황홀경의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이기적 신앙 양태에 몰입해 들어가는 심각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신비주의적 신앙 양태는 세상의 학문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변혁적이고 일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의한 세계관이나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
최근 이원론적 신앙 문제를 의식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일원론적 성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진정한 세계관의 정립은 개혁 신학이 주창해온 하나님 절대 주권과 그에 따르는 예정의 문제가 정립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해로서는 제임스 사이어(김헌수 역)가 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
2. 해방신학적 역사의식 비판
해방신학자(사회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포함)들은 성경의 말씀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정황에서 쓰여진 역사적 문서(historical document)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도덕적 실천가로서의 역사적 인물로 간주될 뿐이다.
해방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나 천국이 비과학적 신화에 불과한 무의미한 사실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의 역사 현실 뿐이며 이 시대의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역사적 실천 뿐이다.
남미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출애굽 사건을 장차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 양의 피흘리는 사건으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사건으로 취급한다.(구티에레즈, 1977, p200)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지배를 언급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성경적이 아니라 다분히 신은 역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신관(Deism)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창조 후 피조물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고 이제는 역사가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 진행되고 변혁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철학자 칼 막스의 유명한 발언인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철학이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라는 말은 매우 매력있게 들린다.
칼 막스의 철학체계 안에는 하나님이나 그의 주권적 역사섭리가 존재치 않기 때문에 역사의 궁극적 동인은 물질적 하부 구조에 영향을 받는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즉 역사변혁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철저한 반성경적 인본주의 역사철학을 주창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인본주의 역사철학이 오늘 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본 신조가 되어있다.
신학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한 인본주의 역사철학이 은폐되어 있다.
신은 이제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허수아비일 뿐, 실제 역사의 변혁주체는 맑시즘으로 무장된 인간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역사주관을 믿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아니라 인간의지의 자율적 역사변혁 능력을 믿는 철학적 역사의식이다.
3. 성경적 역사의식의 정립을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양극화되어 있는 두 부류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두 부류의 공통된 오류는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내세의 소망을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된 논리적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섭리에 의한 직선적 역사관을 믿지 않을 때에는 모든 역사의식이 시간 내의 한 부분을 절대화 내지 영원화하여 균형을 상실하고 만다.
신비주의자들은 현실을 절대화하고 해방신학자들은 미래를 절대화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바탕으로 현실을 극복해 가는 확신을 지니지 못한 채, 인도의 신비주의 명상가들처럼 현재의 황홀경에 자신을 몰입시킴으로써 현실을 신비화 내지 환상화시켜 버린다.
그 결과 올바른 역사적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나아가서 부닥쳐 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도피해 가는 탈역사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반면, 해방신학자들은 내세의 영원한 천국 소망을 부정해 버리고 단순히 평면적 미래에 소망을 두고 역사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 내적 역사철학을 갖고 있다.
헤겔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은 초월이 모두 내재화 되었다.
이 철학의 영향 속에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철저히 내재 신학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사 현실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고자하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 올 미래를 미화하여 영원화시켜 유토피아로 그려낸다.
미래의 주관적 환상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현실의 모습은 참담하게만 느껴지며 따라서 그들의 사고와 행위는 매우 현실 부정적이며 과격하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불만을 심리적으로 보상해 주고 현재의 자기 모순을 은폐시켜 주는 자기 기만적 장치일 뿐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19세기에 꿈꾸었던 구시대적 철학적 낭만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두 부류의 오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예정과 천국의 소망이 확고하게 될 때까지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빠져들어갈 수 있는 함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믿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현재의 안락하고 안일한 삶에 자신을 무비판적으로 맡겨 버리는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행습을 할 때가 허다하다.
또한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서 천국의 소망은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역사의 주체가 마치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여 자신의 뜻과 고집대로 일을 성취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본주의적 역사철학 사고 방식에 사로잡힐 때가 무수히 많다.
육신의 정욕이 남아 있는 한 이기적이며 자기 영광적인 역사의식의 위험성이 우리 자신 안에 항상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들은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과 순수한 복음진리에 의해 부단히 잘못된 철학적 역사의식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과 절대주권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져 가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의 도구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역사적 사명의식을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식은 복음진리로 성숙해 가는 성도에게 맺혀지는 구체적인 아름다운 열매이다.
예정론에 근거한 복음진리에 의해 진정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성도는 역사 무대에서 도피하거나 미래의 환상에 빠져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역사 현실을 자신의 신앙적 성숙의 무대로서 감사하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를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예정론을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에게 결코 나태하고 안일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바울 처럼 살든지 죽든지 역사 현실에서 가장 치열한 복음적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Ⅴ. 결론
오늘날, 신학자에게나 성도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예정론에 대한 오해는 깊고도 심각하다.
특히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하여 예정론을 수납하게 되면 역사적 사명의식이 박탈되고 나태와 안일한 삶에 빠진다는 비판은 그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데 겨냥하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글은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인 구원의 예정을 믿을 때라야 성도는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역사적 삶에 무궁한 원천적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기독교는 이방 종교처럼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인본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오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정하신 예정을 따라 이루어진 유일한 신본주의적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도 영원한 예정의 결과이며 그 예정에 기초하여 구약은 예수님이 역사 안에 오실 것이 언약했고 그 언약은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신 속성대로 성취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 졌다.
그것을 통해 역사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계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며,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영원한 예정과 역사 안에 이루신 구원의 확증을 깨달은 성도는 참으로 삶에 역사적 사명을 느끼게 된다.
진리를 깨닫기 전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 가던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이 이제는 성령의 소욕에 의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으로 전회하게 된다.
말씀에 의해 예수의 형상이 자라감에 따라 성도의 역사적 삶은 점점 무게를 더해 가며 먹든지 마시든지,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며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이웃의 짐을 지고자 하는 아름다운 수고와 자기 희생의 삶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늘 날 한국의 기독교는 양극화된 잘못된 두 부류의 신앙운동에 의해 심히 오염되어 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영원한 천국을 제거하고 기독교를 평면적 역사 차원에서만 취급하여 이 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유주의 신학와 그 유파인 해방신학이 탁류처럼 몰려 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신비화라는 미명 아래 현재의 잘못된 영적 황홀경 속에 빠진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의식을 망각하는 무속적인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적인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전자는 기독교에서 영원을 제거시켰고 후자는 역사를 제거시켰다.
이 양극단의 잘못된 흐름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의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정립과 이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확립과 전파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 기독교의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첫댓글 암쪼록 윗 글은 다 읽지도 못했지만.... 궤변론은 그만 두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귀처럼 둔갑시키는 예정론을 아무리 포장해봐야... 운명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개인의 운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란 절대적인 신에 의해 정해졌다면.. 이건 운명에 불과한 것이지... 무스거 운명이 아니란 말인지......? 운명의 정의는 정하는 신이 없다는 것이고.. 예정론은 그 운명을 정한 신이 있어서 운명론이 아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삼류소설같은 발상입니다.. 그 운명을 정한 신이 없다면 비난받을 대상도 없겠지만.. 그 운명이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니.. 하나님을 비난의 대상, 불공의한 대상, 마치 마귀의 짓걸이나 하는 대
상으로 격하시킨 것이지요.. 거룩하시고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을 이런 더러운 이론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키면서.. 무슨 자칭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론이라는 것인지.......... 좀 솔직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정론자라도 제대로 자신의 이론이 이런것이다라고 양방면을 동시에 살펴가면서 진실한 주장을 해야 될 것인데... 천국 예정된 소수의 특권세력의 입장과 편에서만 한정하고 이 이론의 모든 것이다고 몰고가고 정의내리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반쪽자리 옹호논리를 어찌 옳다.. 진실된 글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1000미터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100명 참가했지요.. 그리고 절대자가.. 그중에 5등안에 드는 사람만 상을 받고 95명은 사형에 처한다고 정했습니다.. 달리기가 끝났네요.. 선착순으로 다섯명은 살림만 받은게 아니라 상까지 받았네요... 정말 멎진 법칙이고 정말 달콤하고 소망이 넘치고 감사한 법칙을 정했더군요.. 정말 그 다섯에겐 정말 소망이 넘치는 법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95명에겐 그 법이 뭐지요? 정말 소망이 넘치는 법이겠네요.. 다섯에게도 소망이 넘쳤으면 95명에고 넘쳐야 되는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 예정론 옹호자들은.. 특권 세력의 특수한 관점안에서만 열거할줄 알지.. 이 이론의 진실성면에선 전혀 편협한 궤변론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달리기 이론은... 그래도 기회라도 주고 판단하지... 천국, 지옥 예정론은 기회도 주지 않고... 5명의 살림도 받고 상까지 받게 운명을 결정해버리고.. 나머지 95명은 기회도 없이.. 이미 사형을 언도 받고 집행에 끌려가면서 출생한 자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5등안에 들지그랬어? 하면서... 이미 운명적으로 신에의해 사형으로 결정된 예정된 자들에게 약올리더라는 것입니다..
레마님은 기독교교회를다니시는지,아니면 지방교회나,형제교회를다니는지,정규코스 신학공부를하신건지,아니면 자유주의신학이나, 해방신학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봅니다 답좀해주십시요?
여보세요 믿음님? 암쪼록 몰고가는데에는 일각이 있으시군요.. 누가 칼빈의 후예가 아니라 할까봐서 그러는건지.... 제발 저급한 관점에서 눈을 뜨십시오.. 님은 마음의 근본과 태도 자체가 이미 주님과는 상관이 없으십니다.. 제가 무슨 님처럼 그런 저급한 신학들에나 의지하시는 자로 보이시나요? 이보십시오 믿음님... 저는 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랍니다.. 님의 왜곡되고 그릇된 관점으로 보지 마세요.. 그리고 말씀을 보세요.. 거짓된 이론과 철학을 자랑하려 들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전 못속입니다.. 암튼 웃겼습니다...
질문에 답을 못하는것은 자신이 없기때문이며, 답을 말할수 없는입장같으니 안물어볼께요 그런데 저한데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자신있게 답해드릴께요.
좋습니다.. 장담하셨으니 물어보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존재론적으로 세분의 신이십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론적으로 한분의 신이십니까? 제가 물어본적이 언젠데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은 한명도 않하시더군요.. 기대해보겠습니다..
아이구....레마님 답을 해드렸는데 또해드려야 되는가요 답글을 보세요
흐미.. 김폴님이나 똑같이 말씀하시는군요.. 제 질문을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삼위일체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먼저 공부해보시고 답하시든지... 아니면 제가 질문하는 답변을 그대로 답해보세요.. 성부, 성자, 성령이 세분의 신이십니까?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의 신이십니까? 님이 말하는 것은 언어유희적인 철학적인 답변에 불과합니다.. 님께서 답변이라 하시는것 전 뭔 의민지 다 알고 있으니.. 이미 파악한 것 물어보겠는지요? 제 질문데 다시 묻는대로 답해주시지요.. 아직도 분별이 않되신다면.. 삼위일체공부 다시 하시길 조언드립니다..
이런 거짓되고 망측한 이론에 제발 눈을 뜹시다.. 삼위일체론인 삼신론과 마찬가지로.. 이 예정론도 제발 무지에서 눈을 뜹시다..
눈을 뜰수 있도록 관련 구절들에 대한 바른 해석된 글이 있으면 안내좀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니면 레마의 말씀 님께서 풀어주셔도 좋고요... 댓글을 보면 바른 해석 내용이 아니라 반론적인 내용이라서 눈을 뜨는데 지침으로 삼기는 좀...
그럴수밖에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해야 온전한 답변이 만들어질수있지요, 내가 레마님을 나쁘다 평하는게 아닙니다 레마님의 가장큰 단점은 나름데로 해석하고 결론도 아닌것을가지고 빙빙돌리기만 하기에 염려되어 글을씀이지요.
그것보다 더 기절 초풍하고 짜빠질 일이 만세전에 예정되고 스케줄이 정해진 일에 예수님이 중간에 나타나셔서 예정에서 탈락된 자들을 구원하러 오셨는지 아니면 예정된 자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구원하러 오셨는지? 예수님의 오신목적이 도대체 왜오셨는지 알수가 없군요,,,창세전에 정해진 일을 예수님이 변경하러 오셨는지? 정해진일에대하여 십자가까지 져가며 다시금 구원 시킨다 하는 일은 원맨쇼를 만드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입니다,,,,, ,,, 예수님과 십자가의 구원론은 무용지물이요, 아들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악론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구원자와 탈락자들의 이름이 정해져 있는 마당에 예수님은 그명단에서 추가할 사람을 찾으러 오셨는지? 아니면 인간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손들어 하고 인간의 의사를 확인하고 손드는자(믿음있는자)들을 더 확보하기위해 오셨는지 알수가없습니다, 하나님의뜻에서 탈락된자들은 다시금 인간의 호소를 따라서 구원이 더되는지?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셔서 인간의 의중까지 확인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발버둥치면 추가로 더많은 인원을 모으시려는 뜻인지? 예정된 구원과 믿는자의 구원은? 또 십자가의 실효성과 예정론의 실효성은 어느쪽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꽃 한송이님의 댓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네요! 기막힌 명문입니다.
더~초풍할 일은? 아예 천사의 타락도 예정되었었고..선악과도 따먹게 예정되었었고..인간의 타락이 예정되었다는 전적인 예정론도 주장합디다! 말하자면..공의와 자유의지는 없다는 겁니다. 난리가 아닙니다. 지가 하나님해뿌지???
그렇군요,,,
한수 더 나가서~, 예수님은 찾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도..그 영혼이 찾고 구하게 예정되었다고까지 할겁니다. 환장하것 습니다^^ 이것의 시발이 자기의 노력과 의를 뭉개기위한 론 같은데~, 아무래도 좀 지나쳤지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만 말입니다. 참새 한마리도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정되어 떨어진다고 하면 우짜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모든 신앙론에서 다 나오는 인간들의 교만이라 봅니다. 뭔가 유추확대가 심하죠?
따먹을 줄 아시면서도 따먹지 말라고 부탁 하신 일은 정말 야비하신 일로 만드는 것 아닌가?,,,가인도 아벨을 죽이기로 되어 있는데 뭘,,,그뒤에 꾸중하시는것은 그냥,,,,
하나님의 예정을 사람의 입장으로 잘못 인식하다 보면 말도 안되는 주장이 나옵니다..처음과 끝을 다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정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정이 아닙니다..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 안믿느냐....사람의 관점에서의 예정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못하는 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이지요..아마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믿지 못하도록 예정해서 믿지 않게 된것이니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항의 한다면 그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하나님은 지옥갈 자로 태어나기도 전에 개인의 운명을 모두 모두 결정하지 않기때문에.. 그런 항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정론 자들중에 천국갈자로 예정되었다 생각했다가... 근데 혹 지옥에 들어가면... 그들은 왜냐고 따지면서 이를 갈면서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난 세상에 살때 천국갈자로 예정되었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지상에선 이중 예정론 찬양, 소망을 거품물고 찬양했었는데.... 아니 웬글 지옥에 들어와 있는거 아니겠어요..? 그때에도 이중 예정론은 참 소망이 넘치시고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이론이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황따라 변해지는 웃기지도 않은 위선이지요..
맞습니다...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러한 헛된 논리가 정당한것처럼 여겨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한 것을 하나님에게로 전가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된 자들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자신을 예정하셨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사람인것입니다..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때 변명할 수 없도록 핑계를 댈수 없도록 무수한 증거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증거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만천하에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작은나라님... 그렇게 보실 문제가 아닐듯 싶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중예정론이 맞다는 전제하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말하려 해도.. 이중예정론은 이중예정론이며.. 인간은 멍청해서 지상에선 모르고 있지만.. 이미 지옥갈 운명으로 정해진 자는 지옥가고 천국갈 운명으로 정해진 자는 천국간다는.. 하나님이 지옥갈 운명으로 정해진 자들을 다 정해놓아서.. 지옥의 방도 그 수만큼 정했다는 논리밖에는 아니되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포장하고 아무리 합리화로 해석하려해도..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파괴시키고 축소시키는 이 이론이 긍적으로 바뀔 수는 없답니다. 몇몇 복음적인 교사들도... 이 누룩적 교리들을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는데... 그들이 그랬다고... 이 누룩이 진리라고 단정해선 않될 것입니다..
공원에 가며는 여러 가지의 개들을 끌고 나오는 풍경이 보입니다...그중에는 핍보등등의 투견개를 끌고 오는(주로 깡패들이 많이 기릅니다...유사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사람들을 조심하나.......그리고 신문에서도 그렇게 떠들고요
그런데 정작 개를 잘아는 사람들이 조심하는 개는 쉐파드입니다......잘 같이 놀다가 ...갑자기 무는경우가 생기는 개가 바로 독일의 쉐파드이기때문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개신교의 친구인것 같으나 ...언제 변하여 물어버릴지???....태생적으로 ...캐톨릭의 어거스틴의 피가 섞이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의 예정론...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식으로 미리 정하여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미리 작정하신. . 예정 // 사실 제가 아직 감을 못잡고 있어서 이 글을 보다가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에 올렸는데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다셨네요...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댓글들을 보다가 드는 느낌은 '삭막, 흥분, 조소' 등... 그리고 얻을수 있는 가르침은 '인간의 정황을 바탕으로한 반론' 등이라고 인식이 되는군요 (저의 인식능력 문제도 있겠죠만) // 성경에 나타난 관련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을 안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정론에 대해서 관심도 없이 살아오던 사람이라서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깨닫기로는 하나님이 애초부터 이 세상이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예수님도 거론하신 창세전에 계셨던 영광의 나라)에 우리들을 이끄시려고 잠간 세상에 거치게 하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고 '믿게' 하사 믿는자마다 오게하시는 예정이라고 정리합니다만..
그리고 제가 이글을 퍼나른 것은 이 주제로 다루어진 내용을 잘 보질 못해서 (그리고 낙오자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식의 예정론만 주어 듣다가 이건좀 다른것 같다는 급한 판단에) 퍼왔슴을 설명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이참에 좀 배울수 있겠군요
제 생각에는 그런것 같습니다. 전적인 예정론을 설파하시는 분들은..하나님을 너무 신뢰하다가 보니 자신의 노력(자유의지)을 아예 배제하는 쪽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듯 싶습니다. 하여~전적인 예정론으로 흘러가나 봅니다. 이땅에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측면으로 말입니다. 인간적인 아니 하나님의 주권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나빠 보이질 않으나~뭔가 치우쳤다 봅니다. 성경을 통체로 먹어본다면 그런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로움을 동시에 행하심으로 사단이 참소치 못할 완전함으로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에 말입니다. 성경 어느 어느구절을 들이댈 것두 없이 공의로움속에 역사인 줄 압니다
레마님 착각하면안되요 ,님은 나의질문에는 하나도 답한것이 없군요 ,다시 님의질문에 답하지요, 님의질문"성부, 성자, 성령이 세분의 신이십니까? " 나의대답: 신이라고 하지마세요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신이 아닙니다,오로지한분 하나님의본체안에 계신하나님입니다," 아마도 님은 믿지를 않으니 이거이해 안될걸요 ,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3개의신으로 해석하지요 ,그래서 사람의지혜와 학식으로는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이해못하고 안다고 자부할수없습니다 이것이 신비중에신비요,비밀중에 만천하에 알려준 비밀입니다 ,그러니오직 하나님말씀데로 순종하고 따르고 믿어야 합니다.이에서 벗어나면 잘못되는 것이랍니다.
믿음님.. 님은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뭔지부터 다시 공부하고 깨닫고 오셔야 될듯 싶습니다..
님께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신다면 님의 말에 근거해서.. 제가 몇여가지 물어보지요.. 님께선 하나님이란 용어를 짬뽕으로 뒤죽박죽 혼용으로 썩고 계시고 계시기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2.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의 본체'안에 계신다.. 질문드리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신데.. 그분들이 들어가 계신 '하나님의 본체'라는 그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의 정의와... 이 개념을 설명해주시지요.. 이미 말씀드린대로... 전 삼위일체론자들의 언어유희를 다 알고 묻는 것이니.. 이해를 못하니 이런 말은 하지 마시기를.. 하나님의 본체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관계성이 무엇이길래... 그분들이 이 또다른 명제의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의 안에 계신다는 것인지? 언어유희가 아니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또 다른 삼위일체의 언어유희는 그 다음 질문드리지요..
묻는 김에 하나 더 물어보지요.. 신이라는 용어를 싫어하시니 다른 표현으로 묻겠지만.. 두번째입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객체적으로 서로 다른 세분의 영들이십니까? 아니면 한분의 영이십니까? 신이라는 용어는 않된다? 하나님께서 신이 아니시고 무엇이란 말씀이신지...? 제가 삼위일체론의 삼신론적 증거에 대한 핵심을 짚어드리니... 피해가시려 노력하시는데...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왜 그렇게 질문을 드렸던 것인지를요.. 스스로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보면서 다시 생각났는데.. 그럼 하나님께선 한분의 신이십니까? 아니십니까?
도대체가 님의질문의도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하네요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수차례말해도 믿지도않고 엉뚱한 유치원생같은 질문으로 대단한것처럼 마구글으쓰니 어찌대답해야하나요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님이말하는세분이아닙니다 님은 성부하나님.성자하나님.성령하나님 하니까 신은셋이요 하나님의영도셋이고,하나님도세분이시다, 이렇게말하고 있잖아요, 이러니 내가 어찌 님과입씨름이되도록 말할수있는지요 그래서 이제그만할렵니다 대꾸할 맘이별로 없어지네요 .
이 질문도 신이라고 물어서 않된다고 하실건지요? 하나님이란 말씀을 써면서.. 언어유희 속에 들어가려니... 신이라는 존재론적(개체론적) 개념을 피해가야만 그 삼위일체론의 삼신론의 실상을 감출 수 있는 것이랍니다.. 제가 다 알고 있답니다.. 글나, 삼위일체론자들의 언어유희 속에서도 한번 이 이론의 삼신론의 실상을 들추도록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마님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께요 성경을 외곡되게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말씀은 영원토록 알파와 오메가요, 교만한사람들의 글과 입방아 재주에 움직여지는것이 절대 아니랍니다.
누가 드릴 말씀을 누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앞에 겸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세상이론과 철학과 언어유희적 철학 용어에 넘 기대를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시고... 말씀보다는 철학적 정의를 더 치중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철학보다 못하게 보시면 아니될 것입니다.. 앞으론 철학은 내려놓으시고... 영원한 생명과 능력과 진리의 말씀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기계적 예정론은 삭막합니다. 한국교회 수준을 다운시키는데 공헌했다고 해야 되겠지요. 독버섯은 이쁘다?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다? 이런 따위의 궤변을 타파 하느라 수고하시는 여러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