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은 600년에 백제왕이 되어 641년에 죽었으므로 무려 42년을 재위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의자는 재위 33년(632년) 정월에 태자가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그저 封元子義慈爲太子라 하여 간략히 적고 있으나 왜 이렇게 늦게 태자가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무왕 33년이면 의자왕자는 이미 장성하여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자나 차자가 아니고 원자라는 것도 이상하다. 의자왕은 즉위 후 4년째 태자를 세우는데 이것이 정상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서기는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의자왕자가 태자가 되기 바로 전해인 631(또는 632)년 3월조의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百濟王 義慈入王子豊章爲質)고 기록되어있다.
의자왕의 태자책봉은 무왕이 한 것이 아니라 의자왕이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의자왕자에 의해 왜국으로 추방된 왕자 풍장은 의자왕자에게 밀린 무왕의 다른 왕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무왕은 왕비가 여럿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부여 풍에 대하여 古王子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왕의 아들이라는 말인지 의자왕의 아들이라는 말인지 혼란이 온다.
의자왕자가 태자에 오를 정도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무왕 31년인 63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무왕 31년(630년)을 보면 “봄 2월, 사비의 궁을 중수하였다. 왕이 웅진성에 갔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역사를 중지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웅진성에서 돌아왔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630년 2월과 7월 사이에 왕이 수도를 비운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리고 632년에 의자왕자 태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직전인 631년에 태자 즉위의 걸림돌이 되는 풍장을 왜국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무왕은 별로 힘이 없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후의 무왕 행적은 정치를 떠나 유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무왕 33년 7월, 왕이 생초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35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 37년 3월,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복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 39년 3월, 왕이 왕비와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서 배를 띠우고 놀았다. 42년 3월, 왕이 죽었다.” 630년을 기준으로 무왕의 행적이 바뀐다. 630년 이전에는 사냥도 없었다. 신라에 대해 힘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630년 이후에는 마치 인생을 포기한 사람 같다.
익산은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있다. 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물난리가 안 나는 곳이며 눈사태도 없는 지역이다. 남으로는 김제평야가, 서쪽으로는 금강하류에 군산항이 있고, 동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인 전주가 있다. 수도로서 지형적 요건을 제대로 갖춘 곳이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무왕이 임시로 천도를 하였다고 하고, 이기백 교수는 무왕대에 웅진, 익산, 사비 이렇게 3경제를 실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무왕 때 익산으로 천도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는 당시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이는 천도를 계획한 세력이 사찰을 건립했다가 실각한 결과라고 본다. 6세기 후반,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즉위 후 곧 죽음으로써 백제는 왕통이 단절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몰락 왕족인 부여 장이 추대되어 즉위하니 이 분이 무왕이다.
무왕은 즉위하였으나 세력이 약해 왕권강와 차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세력은 처음부터 천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절을 지었다. 절이 완성되자 별궁을 지었다. 즉, 반대파를 무마하기 위해 서서히 천도를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630년에 천도 반대파를 등에 업은 의자왕자에게 밀려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백제 지배층 입장에서는 신라와 국운을 건 전쟁 중인데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