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웃음을 긷는 사람
창세기 26:12-16, 23-2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11월 첫 주일이다. 일 년 중 가장 밋밋한 달이다. 기대할 만한 휴일도, 축제도, 기념일도 없다. 날은 어둡고, 밖은 점점 춥고, 움츠러든다.
11월은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대입 수능시험도 코앞에 닥쳤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면 비로소 겨울옷을 챙기고, 목도리를 두를 것이다. 늘 겪는 일이지만, 미리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교회력으로 보면 11월은 마지막 달이다. 한해의 끝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을 돌아볼 기회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내 영적 상태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감사절기가 11월에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대림절도 다가온다. 한 마디로 ‘내 영혼에 등불을 켜는 시간’이다.
새 신자 초청주일이다. 올해는 열심을 내지 못했다. 흔히 “망치 든 손에 못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흔한 못도 찾으면 안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막상 일하려고 망치를 들면 그제야 못이 눈에 뜨인다는 것이다.
목적이 생기면 목표가 보이게 되는 법이다. 먼저 망치를 들어라. 그러면 감춰진 못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라. 그러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낯선 이웃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늘 그랬듯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정현종 님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1)
오늘은 가족예배이다. 그래서 가장 기분 좋은 한 가족을 소개한다. 그는 이삭이다. 마침내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이삭은 거듭된 약속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의 일이다. 죽은 몸과 다름없었으니, 이삭의 출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 오직 은혜였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음’이다. 아브라함 가정에 진정한 웃음이 찾아왔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그래서 이삭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을 찬양하는 환희의 웃음이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기록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음’과 ‘기쁨’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창조질서에 따라 산다는 것은 처음 창조와 같이 내 안에 ‘좋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실한 웃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좋은 음식을 구하듯, 내 안에 웃음을 장만하라. 단지 웃음의 소비자일 뿐 아니라, 웃음의 생산자가 되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일용할 웃음을 간구하라.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약이다. 그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갈 5:22). 웃는 집에 만복(萬福)이 깃들고, 웃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환영받는다.
웃음꽃이 사라진 공동체는 먼저 건강한 즐거움을 만들어 나가야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비결은 ‘약방의 감초’처럼 단맛, 웃음을 긷는 사람이다.
2)
이삭은 ‘웃음’을 긷는 사람이다. 이삭의 특징은 ‘우물을 파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자기 목만 축이려고 우물을 파지 않는다. 브엘세바에 있는 이삭의 우물은 여전히 그 터가 남아있고, 그의 아들 야곱의 우물은 예수님 시대에도 이용하였다.
이삭은 우물을 파는데 열심을 낸 사람이었다. 유목민에게 우물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웃, 다른 세대에게, 가축들에게까지 샘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이삭은 복의 씨앗이 된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선민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바로 이삭의 자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란 약속의 씨앗을 주셨다.
하나님께 신실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은 ‘웃음’(좋음)이란 우물이었다.
이삭 이야기를 읽으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이삭의 생애는 복의 원리를 전해준다. 그 시작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놀랍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 26:12-13).
성경에 있는 대표적인 경제적 축복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배의 수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30배, 60배, 100배’ 중 최고의 수확이다. 창세기가 사용한 표현을 보라. ‘창대하다’, ‘왕성하다’, ‘거부가 되다’ 참으로 부러운 낱말들이다.
이삭이란 인물은 창세기 족장사에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과 비교하면 그 비중이 낮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연 ‘제단을 쌓은 사람’이라면, 아들 야곱은 민족 이스라엘의 지평을 연 ‘은혜의 대명사’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삭 없이는 족장사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의 육신적 계보를 잇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다. 아들 이삭이 없는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없는 야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한마디로 아버지 세대의 선물이요, 아들 세대를 위한 마중물 같은 존재였다.
이삭은 대표적인 씨앗이지만, 사실 우리도 모두 씨앗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씨앗처럼, 희망의 존재로 살아간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씨앗인 줄 아는가? 나도 아주 우연히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부르더라. “송병구 씨!”.
여러분도 이삭과 같은 축복의 씨앗같은 존재로 살기를 바란다. 가정마다 ‘좋음의 씨앗’이 자라나서 사랑, 기쁨, 평화, 행복이 창대하고, 왕성하며, 마침내 거부가 되길 바란다.
3)
만약 이삭이 없었다면, 오늘 히브리신앙의 중요한 부분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위대한 신앙의 상속자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이어받아 유지하고 그리고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유대교의 관점에 따르면 그는 신앙의 우수한 전파자였다. 그는 신앙 전통에 생명의 등불을 계속 켰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유산은 유대교의 가정교육으로 대표된다.
누구나 아브라함과 같은 종교적 천재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삭과 같은 신실한 전파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이삭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축복의 전수자로 살았다.
이삭은 그 가문, 유대인에게만 믿음과 축복의 계승자가 아니다. 그는 위대한 평화의 원리를 가르쳐준 장본인이다. ‘웃음’이란 이름처럼 이삭은 화해의 원리를 삶으로 가르치고 있다. 웃음은 삶의 평화를 가져온다.
본문에서 보듯이 이삭은 농사와 목축에 크게 성공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손대는 일마다 잘되었다. 우물을 팔 때마다 샘물이 솟았다. 그런데 그 풍요로움이 종종 화근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 땅의 원래 주인인 블레섹 족이 시기하였다. 우물을 메워버리기도 하고, 이 땅에서 떠나라고 쫒아냈다.
이삭의 엄청난 재산조차 그 가족의 안전을 지켜 주지 못하였다. 세상에! 도리어 그 풍요함이 문제가 되어 그의 가족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젠 부자가 되었으니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남보다 말 잘하는 것이 화근이 되고, 잘 생긴 것이 타락의 실마리가 되며, 똑똑한 것이 고난의 문이 되고, 출세한 것이 몰락의 뿌리가 된다.
그럼에도 이삭은 미련스럽게도 우물을 팠다. 우물을 지켜야 할 상황에도 싸우지 않고 번번이 양보하였다. 그 까닭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이삭은 무능한 사람이거나, 비겁한 자는 아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능력과 희생으로 이 만한 부유함을 일구어 놓았다고 생각하여, 집착했다면 그는 쉽게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가 버텨낸 힘은 바로 자신의 노력과 열매의 밑바닥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에는 자기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에 양보가 가능하였다.
말씀을 보라. 우리는 이삭을 통해 실패조차 유익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웃음의 사람, 이삭은 자신의 아픔을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여러 차례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만을 더욱 바라본다.
비록 여러 차례 우물을 빼앗기고, 블레셋 땅 그랄에서 쫓겨난 듯하지만, 결국에는 가나안 중심이요, 남방인 브엘세바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단을 쌓게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를 쫓아낸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왔다. 그 목적은 둘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자는 것이다. 적들은 이삭에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28-29).
이제 이삭과 블레셋족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삭을 보라. 내가 얼마나 커다란 궁지에 빠져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지레 우물 파는 일을 포기하지 마라! 애써 판 우물을 누군가가 메워 버렸다고 분노하며 주저앉지 마라! 우물을 빼앗겼다고 절망해 하지 마라!
우물이 메워졌다고, 그것을 뺏겼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더 이상 파 내려갈 의지와 기운을 잃었을 때 죽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용기와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언제든 우물을 팔 수 있는 그런 의지와 힘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길 바란다.
이삭은 한마디로 ‘웃음의 우물을 긷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난 중에도 자기 우물에서 하나님의 웃음을 길어냈다.
이삭의 웃음은 이렇게 축복의 원리, 온유의 원리, 평화의 원리를 가르켜 준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 가운데서도 현명한 자일수록 잘 웃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지혜의 사람으로 살만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모범 사례를 보여준다. 나는 날마다 무엇을 길으며 살고 있는가? 평화, 기쁨, 감사, 만족, 웃음... 하나님은 바로 내 안에도 웃음을 창조하신다. 그런 기쁨의 원리, 평화의 원리로 내 삶을 새롭게 고치라.
이삭을 얻은 어머니 사라의 심정이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내 삶 속에서도, 우리 가정을 통해 그런 웃음을 고대해 보라. 모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셔서 평생 그런 웃음과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의 가정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