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화 초기 중국의 불교 탄압
작년부터 기획중이던 포스팅인데 공산화 이후 중국의 종교들이 어떻게 탄압받았는가를 디쾨터의 저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알아보려는 것. 중심 출처가 되는 디쾨터의 저서도 그렇고 본인의 시각도 그렇고 객관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출처 접근의 애로로 인하여 단독 출처만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주십사 합니다. 근래에 나온 제 포스팅이 다 그렇듯이 추후에 더 많은 연구와 공부를 통해 보충될 예정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949년 시점에서 중국에는 본토 지역에 600만의 불자, 신장, 내몽골, 티베트에 700만의 불자가 있었으며 승려의 수는 50만 명, 사원의 수는 23만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화 이후 불교는 공산당의 철퇴를 맞았다.
주요 종교들 중에 조직화되어 있지 않던 불교는 공산당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공산당은 사찰 소유의 재산을 압수하였으며 절을 불사르고 불상을 압수하여 녹였으며 대장경을 태우고 승려들을 폭행하거나 죽였다. 특히 상당한 사찰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만큼, 사찰들은 공산당의 토지개혁에도 걸려들었다. 난징의 경우에는 공산당원들이 승려들을 잡아 상의를 벗기고 손과 다리를 묶어 인민재판을 행하며 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항저우의 가장 큰 절인 영은사에서는 다섯명의 승려가 4천명의 군중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군중들 앞에서 공산당원들이 외쳤다.
"여러분도 저자가 얼마나 뚱뚱하고 고생 한번 안한 얼굴인지 보일 것이다. 저토록 뚱뚱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사람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착취자이며 나쁜 인간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민 정부는 도량이 크다. 따라서 저자를 노동 수용소로 보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것이다."
불교 탄압은 윈난과 티베트의 소수민족 박해에도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었다. 공산당은 윈난의 고도 리장에 거주하는 나시족의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금지하고 나시족의 불교 사원과 불화들을 불태웠다. 전통이 말살된 자리에는 공산당이 강요한 가요가 나타났다. 공산당은 비판대회를 열고 불법적인 체포와 처형을 자행했다. 사원들은 징발되어 학교, 감옥, 군부대로 개조되었고 승려들도 체포되었다. 체포된 승려들은 비판대회에 끌려나가 총살당하거나 혀를 잘리는 고문등을 겪고 사망했다. 이런 식의 탄압이 공포정치 내내 지속되었다.
1949년부터 1950년대 초반의 공포정치가 완화되면서 공산당은 불교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을 내놓았다. 1952년 11월 중국 공산당은 중국 불교 협회를 설립하고 불교를 어용종교화하였다. 공산당은 불교에게 명상과 묵상 대신에 토지개혁과 반동 척결 운동, 6.25전쟁 동참 등을 요구했다. 승려들에게 자아비판이 의무화되었고 1954년부터 불교협회가 앞장서서 전통적인 지전 태우기, 불교 축제, 제사 등을 폐지해나갔다. 그리고 탁발 행위는 비생산적인 이유라고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 시기의 승려들은 전통적인 수입원이 모두 공산당에 압수당하여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가장 유명한 사찰인 바오화산의 승려들도 이미 하루에 묽은 죽 한그릇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불교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환속하여 농부, 군인 등의 새로운 길을 찾거나 명목상 승려로만 남아 결혼을 하고 생산활동에만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자들의 경우에도 일부 연로한 공산당원들에게 계속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으나 절대로 새로운 불자가 생기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공산화 이후 1950년 2월까지 난징의 2천명의 승려 중에 500명이 환속의 길을 택했고 이 숫자는 차차 엄청나게 불어났다. 1958년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은 승려의 수가 50만명을 유지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1955년 3월 18일 비밀회의에서 민족위원회 담당자 왕펑은 승려의 수를 10만명으로 줄여버린 것에 대해 담당자들을 크게 치하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해외의 눈과 중국 내부의 여론을 고려하여 이러한 작업들을 공개적으로 해나가진 않았다. 승려의 수가 50만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짓 선전이 대표적인 예였다. 사찰들에 대해서 윈난과 티베트의 라마교 사찰들은 파괴와 개조를 면치 못했지만 베이징을 비롯하여 대도시와 국경지대의 100여개의 사찰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지보수되었다. 이들 사원은 1951년부터 1958년에 걸쳐 수리되었다. 공산당조차 무시할 수 없었던 일부 역사적 건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는 외국을 고려한 조치였다. 특히 동남아시아가 그 대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미얀마, 스리랑카, 일본, 인도의 불교도를 초청하여 중국의 사원들을 보여주었고 부처의 유골과 치아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불교는 단기간에 뿌리뽑히지 않았다. 1953년 허난성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뤄양의 백마사는 순례객으로 붐볐다. 3월 25일 하루에만 2만명의 순례자들이 백마사를 찾았고 중국 공산당은 이에 대해 불쾌해했다. 위에서 언급한 1955년 3월 18일 비밀회의에서 왕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숭배의 의미로 또는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거나 향을 피우기 위해서 또는 부처에게 절을 하기 위해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린다."
공산당은 이러한 경향을 잠시는 용인했다. 1966년이 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