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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를 기억하라 본문: 마태복음 24:37-39
1985년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 폭발 (무시된 경고)
콜롬비아의 이 화산은 폭발 전 수개월 동안 연기를 내뿜고 작은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지질학자들은 "곧 대규모 폭발이 있을 것이니 대피해야 한다"고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시장과 지역 지도자들은 경제적 손실을 우려해 "상황은 통제되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방송했습니다. 심지어 폭발 당일 아침에도 사람들은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출근했습니다.
결과: 화산이 폭발하여 진흙더미가 도시를 덮쳤을 때, 2만 3천 명의 시민은 "진흙이 코앞에 들이닥칠 때까지" 대피하지 않았습니다.
1. 일상의 함정: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노아 시대 사람들의 모습은 의외로 평범합니다.
그들이 대단한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묘사 대신,
주님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일상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없는 일상에 매몰되어,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도 바쁜 일, 경제적 고민 등 '당장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내 영혼의 목적지와 하나님의 심판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한 인생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최종 목적지는 나를 만드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영혼의 목적지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목적지입니다
2. 무관심의 결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본문에서 가장 무서운 표현은 **"깨닫지 못하였으니"**입니다.
노아가 산 위에 거대한 방주를 짓는 1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은 끊임없이 '시각적인 경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거나 무시했습니다.
영적 무지: 홍수가 나서 물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까지도 그들은 그것이 심판임을 몰랐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적당히좀 해...라는 안일함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홍수가 발등상에 닿을 때까지
"그저 비가 좀 많이 오나 보다"라며 일상에 머물렀습니다.
깨닫지 못함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경고: 하나님의 사인(Sign)은 지금도 도처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시대의 징조로, 양심의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소리에 반응하고 있습니까?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는 추측이 아닌 명확한 명령[기준을 세워줌 (절대적 기준)]이었습니다.
산 위에 지어지는 거대한 방주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시대의 징조였습니다.
또한 갈수록 극심해지는 죄악과 포악함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근, 지진, 전염병, 전쟁, [때를 분별하게 함 (시급성 알림)] 그리고 사랑이 식어가는 사회 현상 등을 통해 성경이 예언한 '마지막 때'의 특징들을 보게 하십니다.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며 비웃던 사람들도,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불안함이나 '이게 아닌데' 하는 찜찜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돌이키라고 하시는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이 생기는 것이 양심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거역하는 것' 혹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매우 엄중하게 다뤄집니다.
특히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했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내 고집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상: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고 영적인 불편함(죄책감)이 찾아옵니다.
성령을 소멸함 (데살로니가전서 5:19)'소멸하다'는 것은 '불을 끄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내 안에서 뜨겁게 일어날 때, 의도적으로 그 불을 끄는 행위가 반복되는 상태입니다.
영적인 무감각이 찾아옵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고, 죄를 지어도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위험한 상태입니다. 의미: 하나님과의 소통 채널이 녹슬어가는 과정입니다.
성령을 모독함 (마태복음 12:31-32)
*'성령의 사역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악한 것(귀신의 일)이라고 끝까지 거부하고 비방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차단되므로 용서받을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됩니다.
"내가 성령을 거역해서 용서받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 드시나요?
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성령님이 당신의 양심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진짜 성령을 거역한 사람은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귀'**를 닫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3. 노아의 방주: "들어가는 날까지"
창세기 6장 8절의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절에서는 그를 **'의인',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묘사합니다.
1. 의인 (히브리어: 차디크, Tsaddiq)'의인'은 도덕적인 결백함보다는 **'관계적 올바름'**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당시 세상은 자기 욕심과 포악함(Hamas)이 기준이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통치와 기준을 인정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세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완전한 자 (히브리어: 타밈, Tamim)'완전'이라는 말 때문에 죄를 전혀 짓지 않는 무결점 상태로 오해하기 쉽지만,
성경적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의미: '흠이 없는', '전심전력하는', '섞이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주로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이 깨끗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해석: 노아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나누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과 순전함을 유지했다는 평가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히브리어: 할라크, Halak)이 표현은 노아의 삶의 '방식'과 '지속성'을 보여주는 가장 역동적인 표현입니다.
의미: '함께 걷다', '함께 살아가다'라는 뜻입니다.
해석: 이는 일시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7대 손 에녹 이후 두 번째로 이 칭호를 받은 인물이 노아입니다.
특징: 방주를 짓는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보조에 발을 맞추었다는 인내와 친밀함이 핵심입니다.
심판의 날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노아는 일상 속에서도 방주를 짓는 **'거룩한 구별됨'**이 있었습니다.
인자의 임함: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은 도둑같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처럼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방주(믿음의 준비)'를 짓고 있는 사람[명확한 명령[기준을 세워줌 (절대적 기준)]에게 그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닌, 눈물을 닦아주시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절대적'인 이유는 그 기준이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Character)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룩함 (Holiness):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하나님의 기준은 도덕적 흠결이 전혀 없는 완벽한 상태를 요구합니다.
공의 (Justice): 죄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물으시는 공정한 법 집행의 기준입니다.
변하지 않음 (Immutability): 시대나 상황에 따라 타협되지 않는 영원한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실 때,
단순히 "큰 배를 하나 만들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페르 나무로 만들 것,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으로 할 것(창 6:14-16).
"하나님의 기준은 100점이 아니면 0점과 같습니다. 99점도 결국 기준 미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대충'**이나 **'상황에 따른 타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완벽함을 신뢰하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최소한의 핵심기준 – 우상 숭배 하지 마라, 안식일[주일]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할 때 모세의 요구 – 절기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과 온전한 11조...쉬지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역설적 의미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표준(자)이 있어야 인간의 상태(굽은 선)가 얼마나 비뚤어졌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Grace)**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세상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상대적 기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오죽하면 요즘 중동사태, 통해,,, 전쟁의 무서움 가운데...공동된 생각,,, 나는 거기에 없으니가... 안일해요..
명령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의 홍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 가이드라인입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RMS Titanic)의 침몰은 인간의 오만이 불러온 참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타이타닉은 세계 최대 규모의 호화 여객선이었으며, '수밀 격벽(배 내부에 물이 들어와도 차단하는 벽)' 기술 덕분에 **"신조차 이 배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로 안전을 자신했습니다.
이 자신감은 독이 되었습니다.
구명정은 승객의 절반 정도만 탈 수 있는 분량(20척)만 실렸습니다.
배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와 "어차피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 때문이었습니다.
사고 당일인 4월 14일, 타이타닉은 주변 선박들로부터 빙산이 위험하다는 무선 보고를 총 6회 받았습니다. 하지만 통신사들은 승객들의 개인적인 안부 메시지 처리에 급급해 마지막 결정적인 경고를 선장에게 전달하지 않았거나 무시했습니다.
밤 11시 40분, 전방의 빙산을 발견하고 급히 방향을 틀었으나 배의 측면이 빙산에 긁히며 수밀 격벽이 차례로 터졌습니다.
배가 멈춘 후에도 승객들은 설마 이 거대한 배가 가라앉겠느냐며 실내에서 파티를 즐기거나 구명정 탑승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15일 새벽 2시 20분, 배는 두 동강이 나며 차가운 대서양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승선 인원 약 2,200명 중 1,5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닮아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취해 영적인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노아처럼 방주 문이 닫히기 전 '깨어 있는 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심판의 홍수가 시작되기 전, 오늘이라는 기회의 시간에 주님께로 돌이키고 그분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