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VISION 2000' SLOVAKIA!!
<<슬로바키아 개황>> -1.일반 2.정치 3.경제
1. 일반 사항
o 지리적 위치 : 동경 16° 50″ ~ 22° 34″ 북위 47° 44″ ~ 49° 37″
o 국경선 : 헝가리(679km), 폴란드(597.5km), 체코(265km), 오스트리아(127.2km), 우크라이나(98km)
o 면적 : 49,035㎢
o 지형 : 북쪽 지역은 고원지대, 남쪽과 남동 지역은 저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북쪽 산악지대에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높은 스트레도슬로벤스키 주의 비소케타 트리 산맥에 속하는 2,655m의 게를라흐 봉이 위치하고 있다. 이 나라의 주요 하천으로는 남쪽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모라바 강과 도나우 강(다뉴브 강)을 들수 있고 산악지대를 흐르는 주요 하천으로는 바흐, 호론, 호르나트, 보드로크 강 북쪽으로 흐르는 포프라트 강이 있다.
o 기후 : 대륙성 기후. 연평균 기온 9°C ~ 10°C. 가장 추운 달은 1월으로 밤 기온이 -10°C에서 -15°C이며, 가장 더운 달은 7월로 가장 더운 날은 32°C정도 올라간다. 연평균 강우량 500mm 내외.
o 인구 : 5,432,383명, 인구 성장률 0.54%, 평균수명 73.24 (남성 69.15 여성 77.57) (1995년 기준)
o 수도 : 브라티슬라바 (인구 452,000명). 브라티슬라바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BRATISLAVA)
※지역별 인구
슬로바키아의 주요 대도시
브라티슬라바지역616,871명 트르나바지역547,173명 트르나바73,012명 트렌친지역608,990명 트렌친57,921명 니트라지역718,353명 니트라87,127명 쥘리나지역682,983명 쥘리나86,373명 브란스카비스트리차지역664,072명 브란스카비스트리차88,390명 프레쇼프지역763,911명 프레쇼프92,013명 코시체지역753,849명 코시체239,927명 즈볼렌 44,380명
o 민족구성 : 슬로바키아인 87.7%, 헝가리인 10.6%, 체코인 1%, 기타 집시 등 소수민족
o 종교 : 로마카톨릭(60.3%), 신교(Protestant 6%), 그리스 정교(3.4%)
o 비자
95년 7월 15일부터 비자없이 입국 가능. 입국심사는 간단하며,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o 통화 : 화페단위는 슬로반스카 코루나(SK-Slovak crown)로, 1SK는 100할레르(Haler-halierov)이다. 지페로는 20, 50, 100, 500, 1,000, 5,000SK가 있으며, 동전으로는 1, 2, 5, 10SK와 10, 20, 50할레르가 있다. 1993년부터 체코와 다른 화페를 사용하고 있다.
o 공식언어 : 슬로바키아어
o 시간 : GMT보다 1시간 빠르며 한국시간보다 8시간 늦다. 3월에서 10월까지는 summer time으로 7시간 늦다.
o 공휴일 : 1월 1일, 5월 1일(노동절), 5월 9일(종전 기념일), 부활절 월요일, 10월 28일(건국기념일), 12월 25일(크리스마스)
o 주요 전화번호
Police 158
Slovak Rescue System 154
Ambulance 155
Fire 150
Directory enquiries 120, 121
International telephone directory enquiries 149
Fax number enquiries 126
International telephone/fax exchange 0123-5
위 번호들은 슬로바키아 공화국 어디서나 유효하다.
o 영업시간 : 일반상점은 월-금 09:00 - 18:00, 토 09:00 - 13:00, 일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은행은 08:00 - 14:00, 토-일은 문을 닫는다.
2. 정 치
o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
o 국가원수 : 루돌프 슈스터 (99.6.15 취임) ; 1999년5월21일 슬로바키아 사상 첫 직선 대통령으로 당선
o 수상 : 미꿀라쉬 주린다 (98.10 취임) ; 임기 4년
o 외상 : 에두아르드 쿠칸(Eduard Kukan)
o 의회 : 단원제 (150석, 임기 4년) ; 공식 명칭 National Council
o 국제기구 가입현황 : EBRD, IAEA, IBRD, IFC, ILO, IMF, IOC, UN, UNCTAD, UNESCO, UNIDO, WHO, WTO 등
3. 경 제
o GDP : $ 207억 (98) (1인당 $ 3,840)
o 경제성장률 : 7.4% ('95년) -> 6.5% ('96년) -> 5.9% ('97년)
o 화폐단위 : Slovak Crown(SK, Kc)
o 환율 : 1 USD = 35.85 SK, 1 DEM = 19.60 SK('99)
o 인플레이션 : 13.4% ('94년) -> 9.9% ('95년) -> 5.8% ('96년)
o 산업 구조 : 농업(4.8%), 공업(28.2%), 건설(5.3%), 서비스(56.9%), 기타(4.8%)
o 교역규모 : 수출 USD106.8억, 수입 USD129.7억(1998)
o 주요 수출품 : 기계 및 운송장비(18.7%), 화학제품(13.4%), 기타제조품(13.1%), 원료(5.0%) - '95년
o 주요 수입품 : 기계장비(29.0%), 연료(18.0%), 중간제조품(17.6%), 기타제조품(8.0%) -'95년
o 주요 수출국 : CEFTA (44.3% - 체크 35.2%), EU (37.4%), CIS (7.1%) - '95년
o 주요 수입국 : CEFTA (32.9% - 체크 27.5%), EU (34.7%), CIS (18.5%) - '95년
o 경제적 강점 : 중공업 발달, 관광자원 풍부
o 경제적 약점 : 군수산업 위주의 편중된 공업구조, 과중한 외채부담, 높은 실업률
o 주요 자원 : 갈탄(9,550만톤), 석유(8.9만톤 생산)
o 외환보유고 : 약 US$ 47억(1998년말)
o 외채 : $ 118억 (98년말 현재)
<<슬로바키아의 역사>> - ~1차대전 : 1.大모라비아帝國의 성립과 멸망
2.제1차대전 以前까지의 슬로바키아
1차대전~2차대전 : 3. 체코슬로바키아 共和國의 成立과 제1,2차 世界大戰
2차대전~공산주의 : 4. 共産主義 政治時代
공산주의~연방해체 : 5. 民主化運動과 體制轉換
1. 大모라비아帝國의 성립과 멸망
西슬라브族인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의 현지정착 시기는 6세기 무렵으로, 이 지역의 先주민인 켈트族을 축출한 게르만族이 소위 민족이동시기에 남쪽으로 물러나면서 부터였다. 체코人은 서부 보헤미아지방과 중앙지역인 모라비아 지역에, 슬로바키아人은 동쪽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각각 정착하였다. 이 두 민족이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적인 결합을 이룬 것은 大모라비아帝國(Great Moravian Empire)이 성립된 9세기초이다. 모라비아제국은 다뉴브江 중류지역으로부터 엘베江과 오드라江의 상류 및 중류지역에 광대한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프랑크王國과 교황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동방 비잔틴(東로마)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특히 모라비아제국의 2代王 로스티스라프는 비잔틴(Byzantine)제국에 슬라브語로 포교할 수 있는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비잔틴제국 황제 미카엘 3세는 씨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 형제를 大모라비아 제국에 보냈다. 그들은 문자가 없는 슬라브人을 위해 문자를 고안해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포교는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로마교회의 계략에 의해 좌절된다.
大모라비아帝國은 9세기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동방유목민족인 마쟈르(Magyars)人의 공격으로 10세기에 멸망하게 된다. 슬로바키아人은 헝가리 평원에 정착한 마쟈르人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체 코지방의 체코人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일국가를 세울 때까지 거의 1,000년 동안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 제1차대전 以前까지의 슬로바키아
10세기초 大모라비아제국의 멸망 이후 헝가리王國(마쟈르人)의 지배를 받아왔던 슬로바키아人들은 그들의 독립적인 역사도 갖지 못했고, 민족의식도 상당히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그들은 대개 마쟈르人의 농노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슬로바키아인과 체코人들과의 접촉이 재개되었다. 당시 상당수의 슬로바키아 학생들이 프라하의 챨스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후스派들은 그들이 잠시 점령한 슬로바키아 지방에서 슬로바키아人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1526년 모하치(Mohacs) 전투의 패배로 터키人이 헝가리 영토를 점령하게 됨으로써 슬로바키아와 보헤미아는 합스브르크家(Habsburgs)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두 민족을 얼마간 가까워지게 한 촉매역할을 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슬로바키아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일부 체코 신교도들은 1620년 이후 합스부르크家의 反종교개혁을 피해 슬로바키아 지방으로 건너갔다. 슬로바키아에서 체코 신교에 관한 책들이 보급되고, 체코語는 점차 라틴語 대신에 슬로바키아 지식인의 文語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슬로바키아 지방에도 이루어지자 두 민족은 다시 형식적인 로마카톨릭을 신봉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로마카톨릭 사제인 베르노락(A.Bernolak)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체코語 대신에 슬로바키아 文語를 발전시키려고 시도함에 따라 최초로 민족적 동요는 나타났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1840년 쉬투르(L'udovit Stur)의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이 새로운 언어가 슬로바키아人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슬로바키아人과 체코人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유대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슬로바키아人들은 민족적 주체성의 의식을 회복하였고,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추구하였다. 1848년의 헝가리혁명 기간에 쉬투르와 여타 애국자들은 슬로바키아人들의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마쟈르人에 의해 슬로바키아人들의 민족부활의 노력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타협은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마쟈르人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절반에 대하여 무제한적인 통제를 행사하였고, 마쟈르化 정책이 심화되었다. 모든 슬로바키아人 중등학교가 폐쇄되었고, 초등학교의 수는 감소하였다. 선거권의 제한으로 인해 슬로바키아人은 심각한 정치적 불평등을 겪게 되었다.
3. 체코슬로바키아 共和國의 成立과 제1,2차 世界大戰
가. 체코슬로바키아 共和國의 성립
제1차 세계대전 以前 체코 정치가들이 연방제를 추구하긴 하였으나, 결코 독립된 체코 내지 체코슬로바키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帝國내에서 독일人과 체코人, 그리고 슬로바키아人 사이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체코人 및 슬로바키아人 약 10만 명이 오스트리아軍에 참가하였으나, 같은 슬라브系인 세르비아人 및 러시아人과의 전투를 꺼리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軍에 투항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은 주로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1914년 12월 마샤리크(T.G.Masaryk)는 투쟁을 조직화하기 위해 시민적 자유가 제한되고 정치적 박해가 심한 체코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1915년 그는 스위스에서 그의 제자 베네쉬(E.Benes)와 보수적인 체코 농민당의 듀리히(J.Durich)를 만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구상을 발전시켰다. 젊은 슬로바키아 천문학자 스테파닉(M.R.Stefanik)이 그를 도왔다. 마샤리크는 연합국과 중립국, 특히 美國에서 지내면서 체코인 및 슬로바키아人들과 계속적으로 접촉했다. 마샤리크와 베네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帝國의 해체를 주장하였고, 결국 1916년 파리에 마샤리크를 의장으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회'가 결성되었다.
1917년 3월의 러시아혁명과 美國의 對獨 선전포고는 정세를 급변시켰다. 그 해 5월 마샤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 러시아로 갔다. 수천명의 전쟁포로들이 러시아의 수용소에서 풀려나 동맹국을 위해 훈련을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여단은 최후의 러시아 공세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美國이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몇 주 후, 윌슨의 14개 조항이 발표되었는데, 그 10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내의 諸民族 自決이 명시되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국민회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러시아로부터 프랑스로 이동시켰다. 마샤리크는 美國으로 건너가 1918년 5월 체코와 슬로바키아 조직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얻어 내었으며, 5월 31일 피츠버그協定이라고 불리는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의 정치적 연합을 지지하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軍의 전과와 국내외 독립투쟁에 힘입어 191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한 연합국 정부의 지지가 확고해졌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지하는 수개의 선언이 발표된 이후, 프랑스 및 여타 연합국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적 이해를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인정되었다. 국민회의는 1918년 10월 임시정부로 재조직되었으며, 10월 18일 마샤리크와 베네쉬는 워싱톤과 파리에서 동시에 독립선언문을 채택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베르사이유條約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어 1920년에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국헌법이 제정되었다.
나. 민족 국경문제
각종 근대화정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수준이 1차 대전 以前의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이에 따라 경제활동 역시 西歐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수준으로 향상되어 체코슬로바키아는 서구형 의회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헝가리, 폴란드와의 영토문제와 非체코人 소수민족문제는 1930년대 파시즘의 대두에 편승하여 더욱 심각해졌으며, 다시 국가를 해체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민족문제로서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의 대립문제는 지금까지의 경제, 문화, 사회적 발전의 차이라는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특히 독립 당시 체코人 지도자가 약속한 슬로바키아의 自治聯邦制가 실시되지 않아 체코인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슬로바키아人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게다가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300만 이상의 독일인과의 대립도 커다란 문제였다. 이외에도 헝가리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70만 5,000명의 마쟈르人, 실레지아의 폴란드人, 소련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루테니아(Ruthenia)人의 反정부운동이 약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내질서를 내부로부터 흔들어 놓았다.
다. 獨逸의 占領과 제2차 世界大戰
1935년 마샤리크 대신 베네쉬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때부터 세계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파탄은 국내의 민족대립을 한층 심화시켰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특히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체코 정부에 대한 공격이 격화되었다. 슬로바키아인은 1935년부터 여타 소수민족, 특히 獨逸과 공동전선을 펼쳐 체코 정부를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소위 슈데텐 獨逸人黨이 나치獨逸과 연계하여 체코 정부를 압박하였고, 이에 체코정부는 프랑스 및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1938년에는 獨逸, 英國, 프랑스 사이에 뮌헨협정이 체결되어 슈데텐지방이 獨逸에 할양되었고,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폴란드, 헝가리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다. 급기야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의 전격 침공을 받고 獨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40년 베네쉬 대통령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43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蘇聯과 同盟條約을 체결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모스크바조약에 의해 루테니아 지역을 소련에 할양한 채 다시 독립하게 되고, 공산주의자와 非공산주의자간에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4. 共産主義 政治時代
가. 人民共和國의 탄생
체코슬로바키아를 獨逸에서 해방시킨 연합국측인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자, 1946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전후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어 고트발트가 이끄는 공산당이 전국 평균 37.9%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어 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경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0월 國有化令에 따라 은행, 보험, 광산, 야금부문에서는 종업원 500명 이상, 또는 업종에 따라 150명 이상의 기업이 국유화되어, 전체 공업부문 취업자의 62%가 국유부문에 종사하게 되었다. 1945년 6월 하순에는 獨逸人, 헝가리人, 對獨 協力者가 소유하고 있는 농지를 무상 몰수하여 약 170만 ha의 농지가 약 17만 명의 빈농과 농업노동자에게 분배되었고, 1946년부터는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외에도 자원이 부족한 공업국 체코슬로바키아는 對外經濟關係의 回復에 역점을 두었는 바, 이를 위해 1945년 일찌기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와 협정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이후 소련, 루마니아, 폴란드 등의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나. 社會主義國家의 탄생
1947년 6월 美國의 원조에 의한 유럽경제부흥계획, 이른바 마샬플랜이 발표되자, 정부는 선진공업국을 포함한 국제분업의 발전에 의해서만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경제발전도 이룰 수 있다는 판단하에 마샬플랜을 수용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소련으로부터 마샬플랜 수용은 결과적으로 反소련적이고 양국의 동맹관계를 위협하는 행위라는 경고를 받자, 정부는 마샬플랜의 수용을 철회한다.
1948년 2월 내무장관의 경찰관 파면을 계기로 12명의 공산당 각료가 연립정권에서 사임하는 소위 '2월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공산당은 좌파인 사회민주당과 연합하여 새로운 정권을 출범시켰다. 특히 총선에서 공산당의 득표율이 크게 신장되어 베네쉬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고트발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고트발트 대통령은 토지개혁에 의한 富農의 제거, 5개년계획에 의한 급속한 중공업화, 농업의 집단화 등을 실시하여 사회주의체제를 한층 강화시킨다. 1949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는 코메콘(COME- CON)에 가입하였다.
고트발트 정권하에서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는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며, 이는 스탈린주의에 의한 수년간의 숙청으로 이어진다. 유명한 슬란스키사건을 필두로 당시 숙청바람이 전국을 휘몰아쳤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소련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코민포름이 해산되었고, 東歐에도 反스탈린 조류가 팽배하여 같은 해 6월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反蘇운동에 기초한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고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이러한 반소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며, 노보트니를 필두로 한 스탈린주의자가 득세했다. 노보트니는 고트발트의 후계자였던 자포트츠키 死後인 1957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3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실시하였고, 일시정지되었던 농업집단화도 재개함으로써 1963년 농업부문의 94%가 국유화 내지는 협동화되었다.
1960년에는 社會主義 憲法이 채택되었고, 國名도 '체코슬로바키아 社會主義共和國'으로 改稱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체제에서도 以前부터 커다란 문제였던 체코와 슬로바키아간의 政治權力 配分 問題가 해결되지 않았고, 체코가 주도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 대한 슬로바키아 의회의 불만 역시 해소되지 않았다.
다. 프라하의 봄과 후사크 체제
체코슬로바키아의 反스탈린운동은 여타 동구국가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1960년대 초반보다는 격화되어 1968년초에는 以前까지의 경직된 관료적 통제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社會主義(Socialism with a Human Face)'化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슬로바키아人인 두브체크(A.Dub ek)가 주도하는 당내 개혁파는 노보트니를 퇴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자유화가 다른 동구국가들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은 개혁운동을 사회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이라고 비난하고 그 해 8월에 바르샤바조약군을 이끌고 개입하여 개혁파 지도자를 사임시켜 버렸다.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우는 自由化運動은 이렇게 좌절되었고, 슬로바키아인 후사크(Husak)가 두브체크 이후 당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후사크 체제하에서는 개혁파의 철저한 배제와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正常化(Normalization)' 정책이 추진되었다. 특히 1969년 1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사회주의공화국과 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구성된 聯邦制國家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외교면에서는 1970년에 소련과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면에서 兩國關係가 한층 강화되었다. 1973년에는 데탕트 분위기에서 西獨과 국교가 수립되었고, 1938년에 체결된 뮌헨협정이 청산되었다. 이어 1975년에는 후사크가 대통령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7년 1월 극작가 하벨 등이 중심이 된 반체제인사들은 인권억압에 저항하여 '헌장 77'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 운동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유럽에 있어서 인권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킬 정도로 동서 兩진영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련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보수노선유지는 정치적 무관심과 문화적 퇴폐를 만연시켰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국민의 소비생활에 대한 배려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침체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5년에 소련에서 고르바쵸프 정권이 등장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개혁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였다. 이에 따라 1987년 12월에 후사크를 대신한 야케시 서기장은 개혁추진을 표명하고 경제메카니즘의 개혁을 시도하지만, 커다란 효과는 보지 못했다.
5. 民主化運動과 體制轉換
1989년 가을 東歐國家에서 개혁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보수노선을 추구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10월 프라하를 시작으로 민주화시위가 점차 확대되어 지도부 퇴진을 요구하였고, 민주세력이 '市民포럼'(Civil Forum)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1월 23일 프라하에서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는 등 민주화열기가 고조되자, 야케시, 후사크 등 공산당 고위간부는 24일 사임을 표명하게 된다. 12월 10일 시민들의 민주화요구에 따라 공산정권이 퇴진하게 되고, 찰파(M.Calfa) 총리가 이끄는 우파 過渡聯立政府가 수립되었고, 12월 28일에는 '프라하의 봄'의 주역 두브체크가 聯邦議會 의장에, 29일에는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벨벳革命(Velvet Revolution)이라 불리우는 無血市民革命에 의해 공산정권이 퇴진하게 된 것이다.
민주화열기에 힘입어 출범한 과도연립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政治民主化와 多黨制 국가로의 이행을 국민들에게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90년 6월 8일 임기 2년의 연방의회 의원(인민회의:150석, 민족회의:150석) 및 각 공화국 의회인 民族評議會(체코:200석, 슬로바키아:150석)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을 실시한다. 1946년 이후 최초로 실시된 自由總選 결과, 벨벳혁명을 주도한 우파연합세력인 市民포럼과 슬로바키아내 연합정당인 反暴力大衆政黨(Public against Violence)은 연방의회에서 과반수를 상회하는 169석을 획득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6월 29일에는 공산당을 조각에서 완전히 배제시킨 찰파內閣이 출범하게 된다. 또한 7월 5일에는 임시내각, 두브체크 연방의회 의장으로 이루어진 우파 연립정부는 정치 경제분야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과감한 정치 경제적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한다.
6. 聯邦解體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11월의 벨벳革命 이후 시장경제체제로의 개혁을 여타 중 동구국가에 비해 순조롭게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체제변혁과 더불어 표출되기 시작한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 兩민족간의 갈등과 경제개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편중되면서 분리독립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한다. 특히 1992년 6월에 실시된 총선결과, 체코에서는 지속적인 경제개혁과 연방유지를 공약한 시민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한편, 슬로바키아에서는 경제개혁 속도의 완화와 연방분리를 주장한 民主슬로바키아運動(당수 : 메치아르, 슬로바키아 초대총리)이 승리함으로써 연방해체작업이 본격화되었다. 1992년 6월 20일 마침내 체코의 클라우스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메치아르 총리가 연방분리에 합의하고, 同年 11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가 3/5 이상의 찬성으로 연방해체를 공식 결정함으로써 지난 1918년 출범한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은 74년만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슬로바키아측 聯邦分離主義者들은 체코의 支配에서 벗어나 自國의 실정에 맞는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論理를, 체코측 分離主義者들은 연방이 분리될 경우, 체코의 西歐로의 編入이 한층 가속화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兩공화국이 분리된 가장 주요한 背景은 슬로바키아인이 과거부터 不平等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歷史的 不信感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政治的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이 多數民族인 체코人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과, 經濟的으로도 슬로바키아공화국이 체코공화국에 비해 낙후되어 있으며, 특히 체제전환과정에서 경제적인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불만 등에 그 원인이 있다.
7. 體制轉換 以後의 슬로바키아 政治動向
가. 體制轉換 以後의 체코슬로바키아 政治狀況
1) 벨벳革命
1968년에 발생한 바 있는 '프라하의 봄'의 개혁의지가 잔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1980년대초부터 시작된 고르바초프의 政治 經濟改革은 체코슬로바키아내에 또다른 개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후사크 政權은 1968년 제17차 공산당 대회에서 保守主義 路線에서 후퇴하는 일부 改革路線을 수용한다. 그러나 同 대회에서 채택된 개혁조치는 경제분야에서의 제도개선에 불과했을 뿐, 政治民主化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1989년들어 이러한 후사크 정권의 미온적인 개혁자세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불만이 주변국가인 헝가리와 폴란드의 민주화운동과 舊東獨의 붕괴에 자극을 받아 폭발하게 되고, 1989년 11월 20일을 전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총선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대규모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특히 하벨(現체코대통령)은 민주개혁의 중심체가 되는 市民포럼(Civic Forum)을 결성하게 된다.
결국 그 해 11월 27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한 후사크 정권은 야당측과의 협상에 들어가게 되고, 12월 10일 마침내 공산정권의 퇴진과 더불어 찰파(M.Calfa) 총리가 이끄는 右派 過渡聯立政府가 수립되고, 12월 28일에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던 두브체크 서기장이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임된다. 또한 12월 29일에는 시민포럼을 이끌던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내의 정치개혁은 일단락되었다.
2) 1990년 6월 總選
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출범한 過渡聯立政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민주화와 多黨制國家로의 移行을 국민들에게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自由總選을 실시한다. 이에 따라 1989년 11월 29일 이루어진 개정헌법을 근거로 1990년 6월 8∼9일 양일간에 걸쳐 1946년 이후 40여년만에 최초의 자유총선이 舊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총선은 임기 2년의 聯邦議會 議員(인민회의 : 150석, 민족회의 : 150석) 및 각 共和國議會인 民族評議會 議員(체코 : 200석, 슬로바키아 : 150석)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選擧方式은 比例代表制에 따라 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兩공화국의 정당이나 정치집단은 의회진출이 가능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체코에서는 벨벳혁명을 주도한 「市民포럼(Civic Forum)」과 이후 일련의 개혁을 주도한 세력들이 51%의 지지를 획득했다. 반면 슬로바키아에서는「反暴力大衆運動(Public Against Violence)」이 34.9%의 지지율을 얻어냄으로써 다수당이 되었다. 연방의회에서는 우파연합세력, 시민포럼,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反暴力大衆運動이 과반수를 상회하는 169석을 획득, 제1당이 됨으로써 그해 6월 29일에는 공산당을 組閣에서 완전히 배제시킨 찰파 內閣이 출범하게 된다. 또한 7월 5일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하벨 대통령이 재선됨으로써 하벨 大統領, 찰파 內閣, 두브체크 연방의회 의장으로 이루어진 우파 연립정부는 정치 경제분야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과감한 정치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3) 1990년 총선 이후의 政治狀況
1990년 가을과 1991년 봄, 슬로바키아 및 체코 兩공화국에서 이루어진 권력구조개편에 따라 슬로바키아에서는「反暴力大衆運動」이 분열됨으로써 1991년 4월 메치아르 총리가 사임하게 된다. 메치아르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줄곧 수위를 달리는 슬로바키아내의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지만, 그의 괴팍하고 선동적인 스타일과 그가 애매하게 정의한 슬로바키아의 특수한 지위에 대해 고집스럽게 방어적이었던 점 등으로 인해 메치아르는 연방정부와 슬로바키아 정부내에 政敵을 量産했다.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는 「基督民主運動」의 까르노구르스키(J.Carnogursky)가 이어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메치아르는 「반폭력대중운동」내의 자기 지지세력을 이끌고 「民主슬로바키아運動」(HZDS)이라는 新黨을 창당하게 된다. 이 신당은 슬로바키아의 主權宣布를 통한 보다 많은 슬로바키아의 자치권을 요구하였으며, 이후 연방의 형태에 관한 재협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메치아르 신당은 연방이 추진중인 경제개혁에 대한 슬로바키아의 特殊性을 부각시키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추진되고 있던 경제개혁에 대해 대다수의 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 1992년 總選과 聯邦解體의 推進
사실 舊체코슬로바키아聯邦은 1989년 11월 벨벳革命 이후 시장경제체제로의 개혁을 여타 중 동구국가들에 비해 순조롭게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舊체코연방은 공산체제 시절 40여년간에 걸친 蘇聯型 中央集權的 經濟體制를 견지하여 왔는 바, 사회주의체제 自體에 기인하는 經濟停滯(量的 發展의 限界, 技術革新의 缺如, 그리고 勞動生産性의 低下 등)를 타파하지 못했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經濟實績 역시 급격히 악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체제전환과 함께 체코人과 슬로바키아人간의 민족적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경제개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편중되면서 분리독립 요구가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벨벳혁명 이후 집권한 舊체코연방의 新정부는 거시경제적 균형을 중시하는 新古典派 경제학을 지지하는 클라우스 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급진적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石油化學 등 重工業分野에 편중된 産業構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경제로의 移行이 용이하지 않았던 데다, 중 동구지역의 체제전환, 舊소련의 붕괴, 코메콘체제의 해체 등으로 인해 슬로바키아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슬로바키아에서는 급진적 개혁에 대한 反撥과 독자 개혁을 지향하는 일종의 民族主義(nationalism)가 대두되었으며, 결국 1992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이러한 民意를 불러 일으킨 메치아르의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총선 결과 체코에서는 지속적인 경제개혁과 연방유지를 공약으로 내건 市民民主黨(ODS)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클라우스 총리를 비롯한 체코의 爲政者들은 슬로바키아를 경제발전의 장애물로 여겨왔던 바, 연방이 분리될 경우 체코의 경제발전과 서구로의 편입이 한층 가속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앞서도 잠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초 총선 이후 슬로바키아측은 체코에 대해 '보다 느슨한 國家聯合의 형태'를 주장하였지만, 체코측은 '國家聯合'은 국가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입장하에 각 공화국의 독자적인 주권을 인정해달라는 슬로바키아측의 주장을 거부하고, 국가연합의 형태보다는 차라리 聯邦分離가 체코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3년 1월 1일부로 兩공화국은 완전한 분리독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슬로바키아측 聯邦分離主義者들은 체코의 支配에서 벗어나 自國의 실정에 맞는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1992년 11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는 체코슬로바키아 聯邦共和國의 聯邦解體를 공식 결정하였다.
다. 슬로바키아共和國의 誕生과 메치아르의 失脚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兩공화국간 평화적인 聯邦分離가 이루어짐에 따라 슬로바키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1993년 2월 15일 民主슬로바키아運動(HZDS)이 추천하는 코바치(M.Kovac)가 대통령으로 被選되었으며, 그 해 3월 슬로바키아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초대총리에는 연방분리 직전에 치루어진 1992년 6월 총선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의 黨首인 메치아르(V.Meciar)가 취임하였다.
메치아르 總理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1942년생인 메치아르 총리는 원래 공산당 직원이었으나, 「프라하의 봄」사건과 관련 개혁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除名되었다. 그후 그는 제철소 보조노동자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통신교육을 통해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80년대말의 벨벳혁명 이후 집권한 「反暴力大衆運動」에 참가한 메치아르는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反暴力大衆運動」내의 자신의 지지파를 이끌고 出黨하여,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이라는 자신의 정당을 창당하였다. 메치아르는 슬로바키아의 獨立과 反급진적 개혁을 주창함으로써 그의 지지기반을 넓혔지만,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반드시 민주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의회운영을 일삼았고, 과격한 그의 言動이 간혹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는 1992년 6월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을 추종하는 소수의 가신들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켜 왔다. 이로 인해 일부 각료직이 폐지되었고, 前정권이 임명해놓은 관리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하였다. 언론의 자유가 또다시 상당히 제한되었으며, 헝가리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와 같이 메치아르의 권위주의적 정치성향이 농후해지자, 크나즈코(M.Knazko) 외무부장관이 강력히 반발하였고, 이에 메치아르는 1993년 3월 同 장관을 경질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일한 非民主슬로바키아運動(non-HZDS) 출신인 쎄르나크(L.Cernak) 經濟部長官도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따라서 비록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이 야당의 분열로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민주슬로바키아운동의 분열 이후 메치아르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협상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지지하려고 했으며, 협상이 성공을 거두어 슬로바키아 국민당(SNS)과의 불안한 동거를 통해 의회 과반수 의석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 국민당이 분열됨에 따라 종전 12명의 의원들 가운데 8명만이 남게 되었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정치행태로 黨內의 신임을 잃고 있던 중 1994년 2월 동료인 모라브치크(J.Moravcik) 외무부장관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의 탈당사태가 발생,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은 少數與黨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3월 야당이 제출한 總理 不信任案이 의회에서 가결됨으로써 메치아르가 失脚하고, 親歐美派인 모라브치크 前외무부장관이 過渡內閣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불신임안은 야당인 基督民主運動(KDH)이 상정하였으며, 역시 주요 야당인 民主左翼黨(SDL)이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78:2로 가결되었다. 이는 메치아르와 코바치 대통령, 그리고 모라브치크간의 대립과 불화가 현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메치아르 총리에 대한 비판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예를 들면, 1993년 6월 私有化部 長官의 사임을 계기로 자신이 同 장관직을 겸임한 것이 그것이다. 슬로바키아의 경우, 私有化部 長官이 國家資産基金 總裁를 겸임하게 되어 있는 바, 결과적으로 메치아르가 총리, 사유화부장관, 국가자산기금 총재를 겸직하게 되었다. 이는 메치아르 총리가 國家資産의 分配所有權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 過渡聯立政府와 메치아르의 再執權
모라브치크 과도내각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는 5개 정당으로 구성되었는 바, 까르노구르스키(J.Carnogursky)가 이끄는 중도 우파정당인 기독민주운동(KDH), 바이스(P.Weiss)의 민주좌익당(SDL), 그리고 과거 메치아르의 동지이던 코바치(R.Kovac) 前副總理, 크나즈코 前외무장관 등이 참가하고 있는 정당들이 그것이다. 연립정부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헝가리 및 체코 공화국 등과 건설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벌임으로써 슬로바키아의 대외이미지를 상당히 提高시켰다. 또한 聯政은 私有化를 포함한 경제개혁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모라브치크는 西歐 및 국내 개혁론자들의 지지를 받아 바우처사유화의 실시를 준비하였으나,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슬로바키아 獨立의 아버지', 그리고 '人民의 사람'이라는 메치아르의 이미지가 아직도 유권자들간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실업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두드러졌다. 메치아르는 모라브치크 過渡內閣이 실시하려던 바우처私有化가 大量失業사태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서방의 외국인투자자들에게 國家資産을 買占당한다고 선전하고, 국민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한다는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국내의 헝가리人 문제에 있어 슬로바키아人의 민족주의를 부채질하는 등의 선거전략을 통해 1994년 9월 치루어진 총선거에서 民主슬로바키아運動을 다시 제1당으로 올려 놓고, 자신은 총리로 복귀하였다.
총선 이후 약 10주간의 협상 끝에, 메치아르는 12월 중순 새로운 HZDS 주도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메치아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 중 일부를 자신의 연정파트너로 받아들였는 바, 새로운 연립정부는 실업방지책의 일환으로 사유화제도의 변경을 주장하던 좌파성향을 가진 슬로바키아 勞動者聯盟(ZRS), 그리고 헝가리 소수민족과 집시의 추방을 주장하던 極右 民族主義政黨인 슬로바키아 國民黨(SNS)으로 구성되었다.
메치아르의 재집권에 대한 서방이나 국내 개혁론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메치아르는 1995년 1월 중순 의회에 제출한 新정부의 政策브리핑에서 EU 및 NATO 가입이 슬로바키아의 최우선적 국가 목표이며, 외국인 혐오나 인종적 민족적 차별과 같은 부정적 현상을 일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집권정당들은 서방 보다는 러시아 등 CIS국가와의 협력에 더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 메치아르 總理와 코바치 大統領간의 不和
1994년 3월에 있었던 메치아르 내각의 불신임안 가결을 계기로 코바치 대통령이 以前까지의 지지모체이던 民主슬로바키아運動(HZDS)과 거리를 두고, 모라브치크 과도내각을 지지하게 되자, 코바치와 메치아르간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립의 일단은 1994년 총선 직후 HZDS이 코바치 대통령에 대한 사임요구안을 의회에 제출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더구나 모라브치크 내각이 추진하던 바우처私有化제도를 중지하는 대신, 국민에게 國債를 배포하는 新사유화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메치아르 내각의 法案을 코바치 대통령이 署名하지 않았다. 이는 코바치 대통령이 바우처사유화 중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대통령과 총리간의 대립이 격화일로에 들어섰다.
또한 1995년 8월 非헌법적인 방법에 의한 의회의 대통령 불신임결의가 있었고, 이러한 불화와 관련하여, 아직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건이 코바치 대통령 次男의 유괴사건이다. 1995년 8월 코바치 대통령의 차남이 프라치스라바에서 유괴 감금되어 오스트리아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도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코바치 대통령은 이 사건이 메치아르 총리가 벌인 음모라고 비난하고 있다.
바. 最近 政治動向
이러한 大統領과 總理간의 葛藤은 슬로바키아 政局을 상당히 경색시키고 있는데, 최근에는 1998년 3월 실시 예정인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現집권여당과 야당간에 大統領直選制 문제가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통령직선제로의 改憲問題는 1996년말부터 대두되어, 1997년 1월 야당인 基督民主運動(KDH)이 심코(I.Simko)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청원위원회(petition committee:8명)를 구성, 개헌을 통한 대통령직선제 실시를 위한 청원운동을 벌일 것으로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주도하에 국민투표 실시를 위해 필요한 35만 명의 서명을 얻어낸 후, 1997년 5월 23∼24일 양일간 改憲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청원에 의해 대통령직선제 찬성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10% 미만의 투표율을 기록함으로써 무효처리되었다. 당초 대통령직선제 채택여부와 NATO 가입여부 등 2가지 문제를 국민들에 물을 예정이던 국민투표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율이 낮았던 이유는 투표의 4가지 문항 중 대통령직선제에 관한 문항을 메치아르측이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메치아르의 최측근인 크라이치(G.Krajci) 내무장관은 대통령직선제 채택문제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애매한 판결을 이용하여 同 문항을 삭제하였다.
以上과 같은 대통령과 총리간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슬로바키아의 정치 및 경제상황은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슬로바키아 국민 1/2은 대통령과 총리간의 대립문제를 서방 매스컴들이 과장보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이 근대국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게임이라고 여기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권력자들간의 政爭이 체코와 같이 세련되어 있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여기서 코바치 대통령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舊체제시절 체코슬로바키아 중앙은행에 근무하였고, 런던주재원을 거쳐 국민경제 중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였으며, 1989년 12월에는 슬로바키아공화국 財務長官을, 1992년 6월에는 聯邦議會 議長을 역임한 영어에 능통한 親서방 인텔리이다. 반면 메치아르가 對러시아정책을 기본외교정책으로 한다던가, IMF나 NATO를 경시하고 국내의 헝가리人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는 점에서 서방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코바치는 善人이고, 메치아르는 惡人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다. 그러나 서방이 생각하는 것처럼 슬로바키아내에서 코바치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도가 아주 높은 것은 아닌 것같다.
슬로바키아 국민들의 생각과는 달리 西方은 메치아르의 再執權 이후 슬로바키아의 人權狀況이 더욱 악화되어 왔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는 TV 방송국이 국가통제하에 있고, 정부개입에 대한 언론의 불만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EU는 슬로바키아내의 정치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는 데에 우려를 표명하고, 슬로바키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政治的 民主化를 이루어야 한다는 견해를 전달한 바 있다. 그리고 1995년 10월에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메치아르 총리에게 국내 민주화를 요청한 바가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이미지가 서방에 좋지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메치아르는 여전히 슬로바키아 국민 1/3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모든 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와 같이 야당이 분열되어 있는 한, 까다로운 聯政파트너와의 불화 및 점증하고 있는 西方으로부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現정부는 次期總選이 실시되는 1998년 9월까지는 健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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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대외경제연구원 "슬로바키아 편람"
<<슬로바키아의 정치>> -최근 정치 동향, 주요 국가권력기구, 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
최근 정치 동향
1. 政治動向
- 1989년 벨벳혁명이라 불리우는 무혈시민혁명에 의해 共産政權이 퇴진하고 市民포럼(Civil Forum) 중심의 연립과도정부가 구성됨.
o 이에 따라 1946년 이후 최초로 실시된 1990년 6월의 自由總選에서 벨벳革命을 주도한 '市民포럼'과 '反暴力大衆運動'이 각각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에서 제1당으로 부상함.
- 벨벳혁명에 의해 탄생한 舊연방의 新정부는 클라우스 당시 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함.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석유화학 등 중공업부문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용이하지 않았고, 舊코메콘체제의 해체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됨.
o 이에 슬로바키아에서는 급진적 개혁에 대한 반발과 독자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92년 총선에서 이러한 민의를 불러일으킨 민주슬로바키아운동이 제1당이 되는 계기를 마련함.
o 1992년 6월 실시된 總選 결과, 체코에서는 지속적인 經濟改革과 聯邦維持를 공약한 市民民主黨이 승리를 거둔 한편, 슬로바키아에서는 經濟改革 속도의 완화와 聯邦分離를 주장한 슬로바키아民主運動(HZDS, 당수:메치아르, 슬로바키아 초대총리)이 승리함으로써 兩共和國間 聯邦分離 움직임이 가속화됨.
-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聯邦議會는 1992년 11월 25일 3/5 이상의 찬성으로 聯邦解體를 공식 결정함.
o 슬로바키아측 聯邦分離主義者들은 체코의 지배에서 벗어나 自國의 실정에 맞는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經濟發展을 도모해야 한다는 논리를, 체코측 分離主義者들은 聯邦이 분리될 경우 체코의 經濟發展과 西歐로의 編入이 한층 加速化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침.
- 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1일부로 구체코슬로바키아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으며, 그 해 3월 HZDS의 지지를 받은 코바치 대통령이 취임함.
- 그러나 메치아르 총리는 강력한 리더쉽에도 불구하고 非민주적인 의회운영과 권위적인 정치행태로 인해 1994년 2월 HZDS가 분당되었고, 그 해 3월 야당이 제출한 총리 不信任案이 가결되어 모라브치크(Moravcik) 前외무장관이 총리로 취임함.
o 이를 계기로 코바치 대통령과 메치아르와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함.
- 하지만 1994년 9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HZDS이 다시 제1당으로 부상하게 됨에 따라 메치아르가 총리직에 복귀함.
o 以前부터 계속되어온 대통령과 총리간의 갈등은 메치아르의 재집권으로 더욱 격화되기에 이르렀고, 1995년 8월에 발생한 코바치 대통령의 차남 유괴 감금사건을 둘러싸고 이들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슬로바키아 정국은 극도의 경색양상을 보이고 있음.
- 1998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現집권여당과 야당간에 大統領直選制로의 改憲에 관한 논의가 진행된 바 있으며, 同 개헌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청원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 찬성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10% 미만의 투표율을 기록, 무효처리됨.
- 1998년 3월 12일 현재 3차례에 걸친 대통령선거(98년 3월 12일 현재)가 議會間選으로 진행되었으나, 포가스(M.Fogas) 및 발레크(L.Ballek) 등 야당이 추천한 두 후보 모두 의회 재적의원 3/5 이상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함.
o 이로써 현재 대통령의 권한은 총리인 메치아르가 행사하였으며, 메치아르는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코바치 前대통령이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채택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前대통령 아들 유괴사건 관련 경찰수사도 중단시킴.
- 이전까지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선되었고, 슬로바키아 대통령직은 전직 대통령 Michal Kovac의 임기가 끝난 1998년 3월 2일 이후 공석으로 유지되어 왔다. 공석 중인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합의에 실패한 의회는 헌법과 선거제도를 변경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였다.
- 1999년 5월 29일 시행된 슬로바키아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57.18%를 득표한 Rudolf Schuster가 42.82%의 Vladimir Meciar를 누르고 슬로바키아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중도 좌파로서 연립여당의 일원인 Party for Civic Understanding의 現당수인 Schuster는 6월 15일 대통령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o 대통령 1차 투표는 1999년 5월 15일 시행되었다. 그 결과 Schuster는 47.4%, Meciar는 37.2%를 득표하였고, 영화배우이자 駐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대사를 역임한 Magda Vasaryova는 6.6%득표에 머물렀다. 슬로바키아 헌법은 1차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하는 자가 없을 경우 최고 득표자와 차점자를 대상으로 2주일 후 결선투표를 명시하고 있다. 前대통령 Kovac은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現정부 지지를 요청하며 일주일 전 사임을 표한 바 있다.
금번 선거의 결과로 現정부는 국민의 신임을 확보하여 더욱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형적인 의원내각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슬로바키아 대통령의 권한은 형식적이지만 대통령은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하여 1차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사면을 행하며, 대사와 공무원의 임면권을 가지고, 헌법에서 정한 사유에 의해 의회를 해산할 권한을 갖는 등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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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지의 자료는 대외경제연구원의 슬로바키아 편람을 주로 참고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주요 국가권력기구
1. 대통령
이전까지 대통령은 의회에서 비밀 간접선거방식에 의해 재적의원 3/5의 찬성으로 선출되었고, 임기 5년에 1回에 한하여 연임가능하였다. 그러나 슬로바키아 대통령직은 전직 대통령 Michal Kovac의 임기가 끝난 1998년 3월 2일 이후 공석으로 유지되어 왔다. 공석 중인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합의에 실패한 의회는 헌법과 선거제도를 변경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였다. 전형적인 의원내각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슬로바키아 대통령의 권한은 형식적이지만 대통령은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하여 1차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사면을 행하며, 대사와 공무원의 임면권을 가지고, 헌법에서 정한 사유에 의해 의회를 해산할 권한을 갖는 등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가 가능하다.
☞ 슬로바키아 헌법 규정상의 대통령의 주요 권한
- 국제협정의 체결
- 대사 및 공사와 같은 외교사절의 임명 및 신임장 제정
- 국회의원 총선 및 지방선거 공고, 국민투표 발의
- 국회출석 연설
- 임시국회의 소집
- 총리의 추천 및 임면
- 의회의 휴회 및 해산
- 총리제청하에 각부 장관의 임면
- 법률의 제안 및 거부
- 법률에 규정된 공훈표창, 표창 및 칭호의 부여
- 개인적인 사면권의 행사
2. 국회
슬로바키아 국회(Slovak National Council)는 실질적인 최고 국가권력기관이자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참정권을 가진 18세 이상의 국민이 참여한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에 의해 선출된 1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任期 4년의 단원제이다.
국민의 주권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의회는 헌법상의 사회질서를 보장하고, 정부의 조직과 정책조건 및 방향을 결정하며, 헌법을 승인하고, 법률을 제정한다. 법률은 공화국 대통령, 정부, 의회 위원회 또는 의원 개인에 의해 발의된다.
의회는 대통령, 헌법재판소 위원, 대법원장, 검찰총장, 중앙은행 총재 등을 선출한다. 또한 의회는 국가의 사회 경제적 계획의 결정, 국가예산 승인, 정부정책 결정 등을 처리한다.
☞ 슬로바키아 헌법 규정상의 국회의 권한
- 헌법 제정
- 헌법에 준하는 효력을 가진 법률의 제정
- 국가의 사회 경제계획 수립
- 국가재정 확정 및 국가예산과 그 집행의 승인
- 정부계획 승인
- 슬로바키아 외교에 특히 중요한 국제조약의 체결
- 대통령, 각료회의 구성원 및 헌법재판소 위원, 중앙은행 총재, 대법원장, 검찰총장의 선출
국회의원은 비례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에 기초한 정당별 득표율(party lists)에 의해 선출된다. 헌법에서 국회의원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각자의 양심에만 복종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국회의원의 직무는 판사, 검사, 경찰, 직업군인의 직무와 양립할 수 없고, 행정부에 입각하는 동안에는 의원의 직무가 정지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한편 선거법은 총선에서 유권자의 5% 이상 득표한 정당과 정치단체에게만 의석이 할당되는 득표하한선(minimum ceiling)을 설정하여 놓고 있다.
3. 행정부
총리와 각부의 장관들로 구성되는 슬로바키아 정부가 행정부의 실질적인 최고기관이며, 현재는 3명의 부총리, 14명의 각부 장관으로 구성(현재 경제부총리와 재무부장관 겸임)되어 있으며, 총리가 행정수반이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내각을 구성할 권리를 갖으며, 의회의 내각불신임에 의해서 해임될 수 있다.
☞ 정부조직의 명칭
- 부총리(의회, 입법분야)
- 부총리(경제외 분야)
- 부총리(경제분야) 겸 재무부장관
- 외무부
- 국방부
- 경제부
- 내무부
- 교육 과학부
- 농림 식품부
- 문화부
- 노동 사회부
- 보건부
- 교통 체신 전기통신부
- 법무부
- 행정 사유화부
- 건설 공공사업부
이외의 정부기관으로 6개 청이 존속하고 있는데, 통계청(Office of Statistics of the Slovak Republic), 反독점청(Slovak Anti- monopoly Office), 측지 및 지도제작청(Slovak Office for Geodesy and Cartography), 표준화 및 기상청(Office for Normalisation, Meteorology and Testing), 核감독청(Office for Nuclear Super- vision), Office of the Government of the Slovak Republic 등이 그것이다.
현재 슬로바키아의 지방행정구역은 8개 크라이(Kraj)내에 79개 오크레스(Okres)로 구성되어 있는 바, 크라이 및 오크레스로 구분되는 지방정부의 자치단체장의 임기는 4년이며, 주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4. 사법제도
1) 법 원
슬로바키아공화국 헌법 제143조에서 슬로바키아 법원조직은 슬로바키아공화국 최고법원과 기타법원으로 구성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 1993년의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법원조직 구조와 판사의 임명에 관한 규정이 연방시절과 다르게 변경되었다. 法院은 슬로바키아 최고법원(Supreme Court), 지방법원(regional court), 지구법원(district court), 고등군사법원, 군사법원으로 구성되고, 전시에는 고등군법회의와 하급군법회의가 설치된다.
판사는 정부의 제청으로 의회에 의하여 선출되며, 첫번째 선출될 때에는 4년 임기로 선출되고, 위 첫 임기가 종료된 후에는 종신직으로 선출된다. 최고법원의 원장과 부원장은 동일한 절차로 5년 임기로 선출되고 1회의 중임이 가능하다. 최고법원 재판부의 長은 최고법원장이 임명한다. 지방법원장과 지구법원장은 법무부장관이 임명하고 해당법원 재판부의 장은 해당 법원장이 임명한다.
2)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민주국가에서의 기본적인 기구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정권 시절에는 헌법재판제도가 법적으로만 존재하였을 뿐 헌법재판소가 설치된 적이 없었다. 체제전환 이후 1991년 2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헌법재판소법이 제정되고 브륀(Br nn)에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어 활동하였으나, 연방해체로 인하여 이 또한 해체되고, 1993년 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체코 공화국 각각의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 의하여 헌법재판소가 다시 설치되었다. 兩공화국의 헌법재판제도는 연방시절의 헌법재판제도와 거의 동일하고 몇가지 면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슬로바키아 헌법 제124조-제140조에 헌법수호를 위한 독립된 사법기관으로서의 헌법재판소 설립 근거규정이 마련되고, 1993년초 「슬로바키아공화국 헌법재판소법」이 제정되어 꼬시쩨(Kosice)에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었다. 헌법재판소의 관할은 예전의 연방헌법재판소법의 규정과 거의 동일하다.
헌법재판소는 10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고, 의회 등 여러 국가기관의 추천에 의하여 대통령이 7년 임기로 임명한다. 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재판부가 재판을 담당하고, 전원합의체의 의사정족수는 7명이다. 헌법재판관의 추천기관으로는 의회, 행정부, 헌법재판소장, 최고법원장, 검찰총장, 변호사협회 등이 있다. 헌법재판 절차는 5명의 의원, 대통령, 행정부, 법원, 검찰총장, 기본권이 침해된 일반시민의 신청에 의하여 개시된다. 신청의 허용여부에 대한 전심절차에는 공개재판을 요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은 재판절차, 재판당사자, 소송대리인, 재판관, 내부조직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슬로바키아공화국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소 직무규칙을 제정한 바, 여기에서는 직무분담계획, 재판절차, 전원합의체와 개별 재판부의 업무, 재판관의 징계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다.
3) 검 찰
1990년 5월에 과거 1965년의 검찰청법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진 바, 사회주의적 법률제도에 관한 진부한 미사여구가 삭제되고, 검사의 지시에 불응한 경우에 검사가 내릴 수 있는 질서벌에 관한 규정(200∼500코루나)이 마련되었다. 검사는 정당에 가입할 수 없고, 이미 가입되어 있는 사람은 2개월 이내에 정당을 탈퇴하지 않으면 직무를 계속할 수 없으며, 검사는 소정의 법학교육을 받았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연방분리 이후 제정된 슬로바키아공화국 헌법의 규정을 살펴보면, 슬로바키아공화국은 헌법 제149조∼제151조에서 "검찰은 국가의 권리와 법익 뿐 아니라 자연인과 법인의 권리와 법익을 보호한다. 검찰청의 최고책임자는 검찰총장이고, 검찰총장은 의회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검사의 임명과 해임, 권리와 의무, 검찰의 조직에 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슬로바키아는 연방분리 이후인 1993년 과거의 검찰청법을 개정하였는데, 슬로바키아語의 사용에 관한 용어정리와 함께 체코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검찰의 조직, 검찰총장과 그의 권한에 대하여 새롭게 규정하고 검찰의 법질서 준수에 대한 일반적 감독권을 크게 제한하였다.
과거 형사소추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법령준수에 대한 일반적 감독권까지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적 검찰의 권한을 제한하고, 다른 사법기관에 대한 지위를 정확히 규정하였다. 기본적으로 검찰의 직무를 범인의 수사와 소추에 한정하고, 과거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던 검찰의 민사소송 관련 권한은 제한되었는 바, 민사소송에서는 인지소송을 제기하거나, 이미 제기된 행위능력, 사망선고, 상업등기 관련 재판에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검찰의 조직구조는 일반법원의 조직구조에 대응하여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 지구검찰청으로 구성된다. 상급검찰청은 하급검찰청에 대한 직무상 감독권을 갖고 검찰총장은 검찰직무에 대한 전체적인 감독권을 갖는다.
검찰은 조직상 법무부에 소속되고, 검사는 검찰총장의 제청으로 법무부장관에 의하여 종신직으로 임명된다. 검사의 임용요건은 법과대학과정을 수료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최소 3년의 수습실무를 마쳐야 한다.
5) 변호사제도
1990년 兩공화국에서 공화국법률로 변호사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과거의 영업변호사를 대체하는 소위 상사변호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일반 변호사의 활동은 법률구조 및 권리보호, 법원 기타 기관에서의 대리, 형사사건의 변호, 증서의 공증 및 법률자문을 내용으로 한다. 이에 반해 상사변호사의 활동은 기업활동에 관련된 법률구조 및 권리보호에 국한된다.
민사소송에서는 상고심 및 행정기관의 결정에 대한 소송제기의 경우, 변호사 강제주의가 적용되고, 형사소송에서는 법정형이 5년 이상의 자유형인 범죄이거나 소년사건의 경우 변호사 강제주의가 적용된다.
소정의 법학교육을 받고 법규정상의 실무수습을 마친 후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야 변호사가 될 수 있다. 또한 일반변호사는 변호사협회의 변호사 명부에 등록하여야만 변호사활동을 할 수 있다.
변호사협회는 변호사윤리규칙의 준수를 감시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해당변호사를 징계할 수 있다. 변호사 명부에의 등록 거절, 적법한 징계절차를 거치지 않은 명부에서의 삭제와 정직처분에 대하여는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변호사협회 가입요구 및 권리구제수단은 상사변호사에게도 유추 적용된다.
변호사보수는 소송의뢰인과의 합의에 따라 소송전체에 대하여 또는 공판기일에 따라 계산할 수 있고, 소송물 가액에 따른 보수도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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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슬로바키아 편람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
1. 구성과 내용
슬로바키아 憲法은 前文과 9章 156條로 구성되어 있다.
前文에서는 大모라비아帝國의 역사적 승계와 國民自治의 원칙에 대하여 언급하고, 슬로바키아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어떤 이데올로기와 종교에도 구속되지 않는 국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제1장(제1조∼제10조)은 국가주권, 슬로바키아 언어, 영토, 지하자원, 국적, 국가상징 등에 대하여 일반적인 규정을 두고 있다.
제2장(제11조∼제54조)은 광범위한 범위의 基本權이 규정되어 있다.
제3장(제55조∼제63조)은 經濟憲法에 관한 규정으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관점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유경쟁을 보호하고 발권은행의 설립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제4장(제64조∼제71조)은 地方自治와 自治團體의 組織形態를 규정하고 있다.
제5장(제72조∼제100조)은 議會에 관한 규정으로 슬로바키아 공화국의회는 1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4년 임기로 선출되며, 면책특권을 누리고 각자의 양심에만 복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원의 직무는 판사, 검사, 경찰, 직업군인의 직무와는 양립할 수 없고, 행정부에 입각하는 동안 의원의 직무는 정지된다.
제6장(제101조∼제123조)은 大統領과 行政府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3/5 이상의 지지에 의해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며, 한번의 重任이 가능하다.
제7장(제124조∼제148조)은 司法에 관한 규정으로, 재판은 독립된 법원에 의하여 수행되고, 사법부는 헌법재판소, 슬로바키아 최고법원, 지방법원과 지구법원으로 구성된다.
제8장(제149조∼제151조)은 檢察에 관한 규정이고, 제9장(제152조∼제156조)은 經過 및 終結規定이다. 경과 및 종결규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의 모든 법률은 슬로바키아 헌법재판소가 신헌법에 대한 위헌을 선언할 때까지는 신헌법의 발효 후에도 그 효력을 유지하고, 위헌이 선언된 법률은 판결선고 3개월 후에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연방의 국제적 권리와 의무는 연방법률에 규정된 형식과 범위대로 승계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체코共和國 憲法과의 比較
새로 제정된 체코 및 슬로바키아 헌법은 1993년 1월 1일부로 각각 발효되었는 바, 兩공화국 헌법 모두 의회민주주의 공화국헌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적 법치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양공화국 헌법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슬로바키아 헌법은 기본적 인권과 자유의 목록을 헌법의 구성부분으로 통합시킨데 반하여, 체코 헌법은 이를 헌법속에 통합시키지 않고, 헌법질서의 구성부분을 이룬다는 선언조항을 두었고, 둘째, 슬로바키아 헌법은 독립된 경제에 관한 장을 두었으나, 체코 헌법은 독립된 장을 두지 않았으며, 셋째, 슬로바키아 헌법은 국민투표에 관한 장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兩공화국 헌법의 공통적인 특징은 헌법에 비상사태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비상사태의 규정은 기본적 인권과 자유의 제한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슬로바키아의 경제>> -슬로바키아의 경제, 주요경제지표, 현지 주요경제단체, 슬로바키아의 주요산업
슬로바키아의 경제
슬로바키아의 경제는 경제성장 저하 및 거시경제지표 악화로 크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무역적자 규모는 1998년중 808억슬로박크라운(미화 약 18억불)에 이르고 있으며 1998년중 슬로바키아 정부의 재정적자 규모는 192억슬로박크라운(미화 약 4.2억불)으로 있다.
높은 이자율과 담세율로 인하여 기업 활동이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으며 부채상환 부담으로 인해 생산이 저해되고 있는 기업들은 대량 폐업 및 이로 인한 실업율 상승 우려로 경제 전반에 걸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공업 비중이 터무니없이 높은 부적절한 경제 구조, 세계 경제의 전반적 침체 그리고 무엇보다 슬로바키아 정부의 부적절한 경제 정책 구사로 기업활동이 저해 받고 있는 실정이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팽창재정정책 및 불투명한 민영화 실시로 경제상황 악화를 자초하고 있다. 먼저 정부의 팽창재정정책으로 인하여 정작 돈이 필요한 민간기업들은 높은 이자율을 부담하서라도 대출을 얻어야 하는 등 자금 차입 여건이 극도로 나빠져 외국 차관 도입을 시도, 외채 증대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슬로박크라운화의 빠른 평가절하에 따른 외채 상환 부담 증가라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이와 함께 민영화 추진과정에서 특정 내국인을 우대, 보통 대리인을 내세워 인수과정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실소유주들은 기업인수 자금도 없이 기업을 인수,결국 인수한 기업들의 부채 증대와 장기 경영 곤란 등을 초래하여 이러한 부실기업들이 모여 슬로바키아 전체로는 경제 상황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민영화 과정에서 내국인을 우대함으로써 정작 필요한 외국자본 유입이 저해되어 슬로바키아는 인근 지역국가들중 외국인 투자 유치 실적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국인이 인수한 기업은 경영이 부실화됨으로써 슬로바키아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슬로바키아의 현 경제 난국 타개를 위해서는 먼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산업의 유휴설비를 감소시켜야 하며 자본, 노동 및 기술과 같은 생산 요소들을 향후 성장 전망이 높은 분야에 집중 투자하여 슬로바키아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폐쇄형 경제에서 개방형 경제로 전환하여야 하며 두 번째로 선별적 개입 경제정책에서 조화된 전체 경제환경 창조를 위한 경제정책이 실시되어야 하고 세번째로 단순한 선언보다는 실제적인 조치로 이어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능력이 없는 기업을 지원하고 효율이 높은 기업에 불리한 경제정책보다는 고능률 기업을 지원하고 저능률 기업을 장기적으로 시장에서 배제토록 하는 경제정책 실시가 무엇보다도 요망되고 있다.
주요경제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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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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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증가율(%) 6.9 6.6 6.5 4.4 2.0 2.0
인플레(%) 9.9 5.8 6.1 5.6 9-10 8.0
실업율(%) 13.1 12.8 12.5 13.7 14.0 14.0
재정적자/GDP(%) 0.1 -1.9 -4.4 -5.3 -2.0 -2.0
국제수지(US$십억) 0.4 -2.1 -1.9 -2.0 -1.3 -1.0
국제수지적자/GDP(%) 2.2 -11.2 -9.7 -10.0 -6.0 -4.0
수출(US$백만) 8,591 8,824 8,791 10,188 - -
수입(US$백만) 8,820 11,106 10,272 12,377 - -
환율(Sk/US$) 29.8 30.7 33.6 36.9 - -
---------------------------------------------------------------------------
자료출처 : KOTRA-NET
현지 주요경제단체
o 슬로바키아 상공회의소
- 담당업무 : 슬로박상공인의 단체로 외국기업 및 국내기업간 상업교류 촉진을
위한 소개업무 및 국제협력촉진업무
- 연락처
THE SLOVAK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ADD : SLOVENSKA ODCHODNA A PRIEMYSELNA KOMORA
GORKEHO 9,
816 03 BRATISLAVA,SLOVAKIA
전 화 : 421-7-31 64 02 팩스 : 421-7-33 32 91
o 슬로박 외국인 투자개발청(SNAFID,SNAZIR)
- 담당업무 : 외국인의 슬로박내 투자유치를 위한 프로젝트의 소개,투자신청서
승인 등 투자관련 전문국가기관
- 연락처
SLOVAK NATIONAL AGENCY FOR FOREIGN INVESTMENT AND DEVELOPMENT
ADD : SLADKOVICOVA 7, 811 06 BRATSLAVA,SLOVAKIA REPUBLIK
전화 : 421-7-5335 175 팩스 : 421-7-5335-022
o 브라티슬라바 국제옵션주식교환소
- 담당업무 : 국제옵션 및 주식의 거래장소
- 연락처
THE BRATISLAVA INTERNATIONAL OPTION STOCK EXCHANGE
ADD : BRATISLASKA MEDZINARODNA KOMODITNA BURZABUDOVA
UNIGAL-U ZAHRADNICKA 153,826 52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21 35 85 팩스 : 421-7-21 35 85
o 브라티슬라바 주식교환소
- 담당업무 : 국공립기업의 주식거래장소
- 연락처
THE BRATISLAVA STOCK EXCHANGE
ADD : BURZA CENNYCH PAPIEROV V BRATISLAVE
HLAVNE NAMESTIE 8 P.O.BOX 151, 814 99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33 58 44 팩스 : 421-7-33 57 25
o Slovak office for the Safety of Labor
주소 : Spitalska 8, 813 15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441-111
o 슬로박 통계청
Slovak Statistical Office
ADD : Mileticova 3, 824 67 Bratislava,SLAVAKIA
전화 : (421-7) 215-802 팩스 : (421-7) 214-587
o Nuclear Regulatory Authority
ADD : Bajkalska 27,PO Box 24,820 07 Bratislava 27,SLOVAKAIA
전화 : (421-7) 221-531 팩스 :(421-7) 293-603
o Slovak Anti-Monopoly Office
ADD : Drienova 24, 826 03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237-305, 233-572 팩스 : (421-7) 2997-365
o Slovak Geodetic and Cartografic Office
ADD : Hlboka 2,813 23 Bratislava,SLOVAKAI
전화 : (421-7) 497-555 팩 스 : (421-7) 497-573, 497-562
o Slovak Office of Standards, Metrology and Testing
ADD : Stefanovicova 3,814 39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491 147
o Slovak Office of Standards, Metrology and Testing
ADD : Stefanovicova 3,814 39 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491 147 팩스 : (421-7) 491 050
o Export-Import License Department,Slovak Ministry of Economy
ADD : Spitalska 8,Bratislava,SLOVAKIA
전화 : (421-7) 50319 , 53761
<현지 한국기관 연락처>
o 주체크 한국대사관
- 주소 : Slavickova 5, Praha 6 - Bubenec, Czech Republic
- 전화 : (420-2)2431-8100
- 팩스 : (420-2)2432-0538
o 주체크 KOTRA무역관
- 주소 : Vaclavske nam. 47, 110 00 Praha 1, Czech Republic
- 전화 : (420-2)2162-5600
- 팩스 : (420-2)2162-5601
- 주재요원 : 김상욱(관장), 송방달(관원)
<한국내 주재국 주요기관>
o 슬로바키아 대사관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389-1
- 전화 : 794-5420,3981 팩스 : 794-3982
- 대사 : MR. STEFAN MORAVEK
- 상무참사관 : MR. MIROSLAV STRVA
o 기타 기관은 없음
슬로바키아의 산업
1. 개요
슬로바키아의 산업에서는 공업이 생산액 및 고용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92년 기준 총 GDP중 공업부문 생산이 전체의 57.4%를 차지했다. 이중 서비스업이 23.9%, 건설업 8%, 농림업 7%, 광업 3.7%를 점 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취해온 보수적 경제정책으로 신규 및 시설 대체 투자가 억제되어 공업 생산시설이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생산성의 저하와 국제경쟁력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공업생산 비중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농림업 부문은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비중이 낮아져 1991년 9%에서 1992년 에는 GDP의 7%로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또 슬로바키아는 내륙국가로 전 국토의 40% 이상이 경작지이기 때문에 삼림자원 또한 풍부해 목재를 출해 왔으나 최근들어 화력발전과 각종 공해로 인해 삼림자원이 감소하고 있다. 반면에 서비스업 및 건설업은 시장개방화 진전에 따라 점차 비중이 높아지 고 있는 추세이다.
2. 농업
기초적인 농업 생산 단위는 협동농장이다. 1992년 1월 1일 슬로바키아내에 있는 827개의 협동농장이 197,304명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또한 58개의 국영농장이 37,294명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다. 그리 고 협동농장과 국영농장이 슬로바키아 농지면적의 92.7%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개혁과 관련한 가격자유화는 농산물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농장에 재정 적인 어려움을 안겨 주었으며 실업자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 여 아직도 슬로바키아 정부는 국민에 대한 약속과는 달리 뚜렷한 농업진흥 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1년 5월 농지 소유주를 1948년 이전의 소유주에게 환원한다는 농지 개혁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1993년 전의 소유주에게 돌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3. 임업
임업 부문은 환경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최근 산성비와 같은 오염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석탄과 갈탄을 원료로 쓰는 산업과 발전 소에서 나오는 대기오염물질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슬로바키아 공 화국도 체코 공화국과 같이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4. 에너지 산업
슬로바키아는 에너지 수요량의 60% 가량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쓰고 있 다. 년간 1인당 7.5톤의 에너지 소비를 하는 슬로바키아는 기타 다른 산업 국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슬로바 키아 공화국내의 주요 에너지 자원으로는 현재 슬로바키아 에너지 소비의 18%를 담당하고 있는 갈탄과 전력이다. 갈탄은 Handlova와 Modry Kamen 지 역에서 생산되며 나머지는 체코 공화국으로부터 수입된다.
최근 슬로바키아 정부는 연간 4,500,000톤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 산의 대부분을 사유화하고 있다. 그러나 석탄의 소비는 계속해서 감소하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석탄 생산량도 감소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92년 슬로바키아의 석탄 소비는 국내 생산량 3,500,000톤과 체코에서의 수입량 6,000,000톤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경제부 장관은 최근 석탄 수입선 을 체코에서 폴란드로 이전하는 정책으로 취하였다.
석탄 이외의 주요 에너지인 석유, 천연가스를 대부분 구소련에서 수입하고 있다. 또 현재 슬로바키아에는 총 50여개의 발전소가 있는데, 그중 수력 발 소가 33개, 화력 발전소가 13개, 원자력 발전소가 1개 있다.
5. 제조업
공산주의 시절 슬로바키아 정부는 중공업 우선정책을 시행했었다. 그러나 최근 철강산업과 같은 몇몇 산업을 제외하고는 많은 공장들이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또 경제개혁상의 구조적 변화가 체코 공화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6. 건설업
공산주의 시절에는 건설업이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그후 1990년 부터 사유화가 시작되었다. 슬로바키아의 산업에서 특히 건설업은 성공적으로 꼽힌다. 과거 3년동안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들이 사유화 후 조그만 중소기업 회사들로 나누어졌고 그후 이런 건설회사들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1993년 로바키아의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인하여 건설 업도 23.8%의 하락세를 보였다.
----------------------------------------------------자료출처 : 인터넷 경향신문 지구촌 국가정보
<<슬로바키아의 사회>>
1. 교육제도
슬로바키아의 교육제도는, 초등 및 중등교육(primary and secondary schools)기관으로는 초등학교(primary schools:Z kladn koly), 예술초등학교(primary schools of arts), 훈련기관(training institutions), 중등직업훈련소(secondary vocational apprentice training centres), 중등학교(grammar schools:Gymn zi ), 중등직업학교(secondary vocational schools), 특수학교(special schools)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의료 및 교육시설을 포함한 취학전 교육이나 평생교육을 위한 교육시설 역시 교육기관의 일종이다.
슬로바키아의 교육제도하에서 초등교육기관(Z kladn kola)의 교육기간은 8년이며, 중등교육(Gymn zium)은 4년, 중등직업교육(Stredn odbor na kola) 4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Vysok kola)은 4∼6년이다.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은 주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으며, '스뜨레드나 오드보레나 슈꼴라'는 주로 직업교육에 가까우나 역시 대학진학이 가능하다.
高等敎育은 일반대학의 경우 4년 과정이며, 공업 및 기술대학은 5년, 의학 및 건축전공은 6년과정을 이수하여야 한다. 이밖에 전문대학급 직업학교가 있으며, 대개 2년만에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特殊學校로는 예술대학 진학이 가능한 예술학교가 있고, 중등교육기관 중 특수 산업분야의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외국어로 교육하는 교육기관은 없으며, 외국인이 학교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1년 과정의 어학과정 수료후 소정의 시험에 합격해야 정규교육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韓國의 중 고등학교에 해당되는 중등교육 취학률을 살펴보면, 슬로바키아의 취학률은 90% 수준으로 인근 국가 중에서는 슬로베니아와 비슷하나, 韓國(97%), 러시아(95%), 벨로루시(94%), 우즈베키스탄(93%)보다는 약간 낮은 수준이다. 한편 고급인력의 지표를 나타내주는 고등교육 취학률은 1995년의 경우 남자가 20%, 여자가 21%로, 한국의 55%보다 상당히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구 1,000명당 대학생 수 역시 1994년 16명으로 韓國의 47명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인근 중 동구 국가 중에서는 폴란드가 23명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슬로바키아에서 대학생 중 여자가 차지하는 여대생 비율은 1995년 50%인 것으로 나타나, 韓國의 3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인근국가 중에서는 불가리아가 62%(폴란드 : 57%)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중 동구국가들에서는 교육의 기회균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슬로바키아에서는 교회 및 민간이 설립하는 私立學校의 설립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2. 外國人을 위한 語學機關
外國人을 위한 어학기관은 사설학원을 제외하고는 한 곳이 있는데, 이 語學院은 국립대학인 '우니베르지따 꼬멘스께호'(Univerzita Komenskeho(UK):University of Commenius) 부설기관으로 수도인 브라티스라바와 꼬시쩨에 소재하고 있으며, 同 어학원은 일반학생을 위한 기관이다. 그리고 세네쯔(Senec)에는 향후 슬로바키아내의 대학에 진학하여 의학이나 약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外國人을 위한 어학원이 소재하고 있다. 이들 어학원은 모두 별도의 기숙사를 시내에 두고 있다.
사설학원은 주로 슬로바키아人에게서 英語, 獨逸語 등의 外國語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나, 외국인에게 슬로바키아語를 가르치는 과정을 설립한 곳도 몇군데 있다.
3. 주요 대학
슬로바키아 최고 대학인 브라티슬라바 코멘스키 종합대학교(JA Comenius University of Bratislava)
이 학교는 신성 로마제국하인 1467년 헝가리의 왕 마타아시 코르비누스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모방하여 설립하였다. 당시 신학, 의학, 법학, 철학 등의 학부를 가진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나 15세기말 종교개혁으로 교수진이 모두 이탈리아로 돌아가 1492년부 터 교육활동이 중단되었다.
1차 대전 후 1919년 체코의 국가원수인 마사리크에 의해 지금의 코멘스키 대학으로 설립됨으로써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39년 의학, 철학, 법학부를 개설하여 슬로바키아 대학으로 개편되었고 다시 1954년 자연과학, 신학, 지리학부 등 8개 학부를 가진 코멘스키 종합대학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현재 이 학교는 슬로바키아 문화의 중심지로서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고 420여명의 정교수를 포함하여 5,400명의 교직원과 1만 2천여명의 학생이 재학 중에 있다.
<<슬로바키아의 문화>>
1. 미술관 및 박물관
슬로바키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한국과 달리 한 곳에 모아놓고 전시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슬로바키아의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 2개층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아무리 작은 도시라고 할지라도 분야별로 별도의 박물관이 있다.
국립박물관(Slovenske Narodne Muzeum)
국립박물관은 국내 전역에 산재해 있으며, 브라티스라바 시내에만 4곳이 있다.
- 자연사박물관(Prirodovedne Muzeum)
- 고대사박물관(Archeologicke Muzeum)
- 역사박물관(Historicke Muzeum)
브라티스라바 시립박물관(Mestske Muzeum)
경찰사박물관(Muzeum Policie)
국립박물관(Slovenska Narodna Galeria)
브라티스라바 시립갤러리(Galeria Mesta Bratislavy)
Primacialny Palac
2. 주요 행사 및 축제
o 아그로콤플렉스(Agrokomplex:농산물관련 전시회):매년 7월과 8월 사이에 4∼5일간 니뜨라(Nitra)市에서 개최되며, 각종 농산물, 종묘, 화훼, 동물사육, 농기계, 주류 등이 전시된다. 이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리는 가장 커다란 전시회라고 할 수 있으며, 행사기간을 전후하여 방을 구하기가 힘들고, 이 행사에는 매년 10만여명 이상이 관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o 아우토살론(Auto Salon:자동차전시회) : 매년 여름(8월 또는 9월)에 개최되는 슬로바키아 최대의 자동차전시회로서, Concept Car와 같은 첨단형/미래형자동차 등은 전시되지 않지만, 역시 10만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갈수록 더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행사이다. 同 전시회는 승용차와 일반화물용 대형트럭을 주로 전시하는데, 체제전환 이후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1995년의 전시회에는 韓國의 4개 자동차업체들이 참가한 바 있다.
o 國家建國記念日 행사
1993년 1월 1일 舊체코슬로바키아연방으로부터 평화롭게 분리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기념일이 건국기념일로서 자리를 잡았다.
o 國際平和마라톤 : 이 대회는 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인 꼬시쩨(Kosice)에서 192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개최되어온 행사로,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정규구간 마라톤대회이다. 이 대회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으며, 매년 10월초에 치루어지는 국제대회이다.
o 브라티스라바 음악주간행사 : 이 행사는 매년 10월 초 또는 중순에 약 1주일동안 국제행사로 마련되는데, 브라티스라바城이나 각 음악관(콘서트홀) 등에서 각종 초청연주회, 국립교향악단 공연 등의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o 여름문화행사(Kulturne Leto) :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중순부터 약 3개월간 치루어지는 이 행사는 포크댄스, 전통음악연주, 간이연극 등으로 시작되어 연극, 발레, 음악회 등의 공연이 열린다.
o 국제귀신페스티발(Medzinarodny Festival Duchov a Strasidiel) : 이 행사는 매년 4월말부터 약 1주일간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세인트 보이니쩨(St. Bojnice)城에서 펼쳐지는데, 이 성에 얽힌 귀신에 관한 이야기로 관람객을 안내하며, 밤에는 이 성에 얽힌 역사를 성벽에 슬라이드와 조명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행사이다.
3. 전통예능
전통예능의 유래는 사실 오래된 삶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주로 춤과 노래로 대표되는 전통예능은 이들이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생활과 일부 사냥, 목축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예능은 특히 종교적 전통이 강하게 배어 있는데, 천주교에 바탕을 둔 생활양식이 이들의 춤에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전통춤공연은 공연장을 찾아야 관람이 가능하며, 여러 전통춤그룹 가운데 가장 훌륭한 그룹이 '류츠니짜(Lucnica)'라고 하는 전통무용단이다. 이 그룹은 대부분이 대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슬로바키아인들도 이들을 가장 훌륭한 무용단으로 꼽고 있다.
슬로바키아의 전통노래는 크게 느린 것과 아주 빠른 것 등 2가지 가락이 있는데, 강한 후렴이 많이 사용되며, 여자들이 주로 부르는 노래는 가성을 사용하듯 고음부에서 노래를 한다.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주로 바이올린과 북, 뿔피리, 대피리 등이 사용된다.
슬로바키아에는 인공적인 민속촌은 존재하지 않으나, 단 동북부지역의 주디아르(Zdiar)라는 마을은 옛 전통양식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의 가옥은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전통의상 및 춤, 노래 등을 학생들이 자주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통수공예로는 자수를 꼽을 수 있는데, 아직도 많은 여성이 수예를 하거나, 직접 뜨개질을 하여 옷을 짓기도 한다.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목각제품 등도 유명한 전통예능의 한종류이며, 시골마을 등에서 여가를 이용하거나 직업적으로 목각제품이나 대바구니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자료출처 : 대외경제연구원 "슬로바키아 편람"
<<대한교류>> -기본관계, 경제관계
우리나라와의 관계 (기본관계)
1. 공식관계
o 외교관계수립일 : 93. 1. 1
o 공관 : 주체크 대사관에서 겸임
o 교민 : 교민 10명, 주재원 4명 ('99. 5월 현재)
2. 주요인사교류
(방한)
93. 8. Moravcik 외무장관
93. 9. Slobodnik 문화장관
97. 4. Gasparovic 국회의장 (IPU 총회 참석차)
99. 6 2006년 동계올림픽 유치사절단, IOC 서울총회 참석(Fogas 부총리, Knazko 문화장관, Ftacnik 교육부장관, Harach 국회상임위원장 등 80여명 방한)
(방슬)
93. 6. 이재춘 외무부 제1차관보 (대통령 특사)
3. 교역현황
교 역 품 : 승용차, 기타합성수지, 낚시용구(수출), 기타 유기화학물, 전자부품, 기타 회전기기(수입)
단위: 백만불 96년
97년
98년
99년(1-10월)
주요품목
수출
106.3
25.7
53
17.4(-61.4%)
자동차(부품포함), 가전제품
수입
8.1
6.4
6.7
5.2(-8.1%)
유기화학품, 항생제, 철강제품
4. 경제기술협력
ㅇ 대슬로바키아 투자
- 92. 9 : 삼성전자-Calex간 냉장고 생산 합작투자 사업 설립(1,078만불) 했으나, 97.6 동 사업 종결
ㅇ KOICA 사업
- 93년 이래 기술연수생 초청, 기자재 공여, 전문가 파견 등 지속 지원
-------------------------------------자료출처 : 외교통상부 슬로바키아 약식 개황(1999년 12월 15일)
슬로바키아의 대 한국 경제관계
아국과는 '80년대초부터구상무역형태로 교역을 시작한 이래 최근 교역이 급신장 추세에 있다.
'90.3월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에 이어 '90년 하반기에 양국간 경제협력 및 기술 협정과 항공협정이 체결되고 '92.4월 이중과세방지협정 및 투자보장협정 서명으로 아국의 대 슬로박 투자환경이 개선되는 과정에 있다.
(경제교류 일지)
- '82 - '88 구상무역/(아국이 섬유직기 수입하고 섬유제품수출)
- '90. 2.20 프라하 무역관 개설
- '90. 3.22 한-체코 수교의정서 서명
- '90. 6.23 주 체코 한국대사관 개설
- '90.10 무역.경제협력 및 기술협정 서명
- '90.12 한.체코 항공협정 체결
- '91. 7 주한 체코 대사관 개설
- '92. 4 체코 하벨 대통령 및 경제성장관등 사절단 방한
이중과세 방지협정 및 투자보장협정 가서명
- '92. 4.23 STEFAN MORAVEK 초대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
- '93. 1. 1 체코연방 해체에 슬로박 공화국 승인 및 외교관계 수립
- '94. 5 슬로바키아 상의 회장단 방한
(향후 경제교류 방안)
슬로바키아는 전통적으로 중화학공업분야에 높은 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술도입 분야에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슬로박의 EU 정식가입에 대비, 민영화 사업 참여 등 투자진출을 통해 슬로박 내수시장은 물론 EU, 구 코메콘시장 진출이 유망하다.
<대한교역>
양국은 80년대초부터 전자.섬유제품을 체코가 수입하고 섬유직기 등을 대한 수출하는 구상무역을 해 왔다. '89년 양국간 무역사무소 교환개설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프라하에 KOTRA 무역관이 개설되고 양국간 통상사절단 교환방문등 경제협력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배경하에서 양국간 교역규모는 '88년 $34백만에서 '92년 $97백만으로 약 3배 증가하였으며, '91년도를 제외하고는 한국이 흑자를 시현해 오고 있다.
< 대 슬로바키아 연도별 수출입 규모 >
(단위 : US$ 천)
=====================================================================
연도 1995 1996 1997 1998 1999.1-11
--------------------------------------------------------------------
우리나라의 수출 24,918 106,356 25,723 52,918 20,561
우리나라의 수입 8,208 8,140 6,421 6,774 7,428
=====================================================================
(자료원 : KOTIS)
< 우리나라의 대 슬로바키아 품목별 수출 >
단위: 천불, %
==============================================================
순위 품목명 1998 1999(01-11월)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
합계 52,918 105.7 20,561 -59.0
1 자동차 45,559 149.3 16,456 -61.8
2 자동차부품 1,815 -17.1 757 -54.5
3 석유화학제품 899 - 672 -24.4
4 가정용기기 821 -0.9 379 -53.9
5 인조장섬유직물 207 -29.5 282 36.5
6 합성수지 낚시용 128 68.0 216 68.2
7 기타 플라스틱제 90 -57.2 166 87.0
8 모직물 224 - 149 -33.7
9 서적 0 - 114 -
10 유선통신기기 31 -80.1 89 189.6
=============================================================
(자료원 : KOTIS)
< 우리나라의 대 슬로바키아 품목별 수입 >
단위: 천불, %
==============================================================
순위 품목명 1998 1999(01-11월)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
합계 6,774 5.5 7,428 18.1
1 기타유기화학품 3,683 108.8 3,861 15.7
2 철강의 판 0 - 1,964 -
3 제약원료 및 의약 965 -24.7 266 -72.4
4 가정용기기 0 - 231 -
5 축산물 0 - 163 -
6 신발 56 -67.0 125 156.7
7 공구 0 - 111 -
8 기타기계 2 -90.6 102 *
9 기계요소 95 177.8 94 14.4
10 반도체 171 -49.4 91 -43.4
===============================================================(자료원 : KOTIS)
-------------------------------------------------------------------자료출처 : KOTRA-NET
<<주요도시>>
슬로바키아 주요 관광지
1. 브라티슬라바 성
과거 황제의 거처였으며 나폴레옹 전쟁때 소실되었다가 2차대전 후에 복구 되었다. 지금은 슬로바키아 의회와 시립 박물관의 주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3층에는 20세기 슬로바키아의 역사, 문화, 예술을 한눈 에 볼 수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외에도 성 마틴 성당, 미르바하 궁전, 바로크식 구시청, 프란체스코 교회들도 가볼만한 곳이다.
2. 고지 타트리(Vysoke Tatry)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은 대부분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저지 타트리, 서쪽으로는 작은 파트라, 헝가리와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마트라스 산맥위에 고지 타트리가 자리하고 있다. 총 연장 26㎞에 달하는 산맥에 높 은 산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으며 높은 산 능선 속에는 150여개가 넘는 아름다운 호수와 함께 사슴, 곰, 그리고 에델바이스가 있는 울창한 삼림이 있다.
3. 스타리 스모코벡
1년내내 관광객들로 붐비는 관광지이다. 200여년 동안 번영해온 타트리의 위성도시이며 스키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내에서 특이한 모양의 케이블 카가 직접 스키장으로 운행한다. 스키장 외에도 계곡, 폭포, 아름다운 산들 이 많아서 등산코스로 최적인 관광지이다.
4. 타트라 롬니카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맥으로 알려져 있는 타트리 산맥을 감상하기에는 타트라 롬니카 보다 더 나은 관광지는 없을 것이다. 산 정상까지 운행하는 거대한 스키 리프트가 타트라 롬니카 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관광 객들이 많기 때문에 일찍 가는게 좋다. 또 시내에는 타트리 국립공원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은 인류생활과 자연사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 대로변에 있는 슬로바키아 호텔에서 빌릴 수 있는 산악용 자전 거를 이용하여 관광해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5. 말라 파트라(Mala Fatra)
이 지역은 봉우리들이 많고 사람이 적은 곳이다. 장대한 바위 협곡인 브라트나 계곡이 있으며 이 곳을 통과하는 도로변에 작은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6. 코시체
지금은 영락한 도시이지만 과거 동부 슬로바키아의 중심지였 며 460년이 넘은 건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인간이 살았다는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달걀 모양으로 생긴 시가지 를 지나고 나면 성 엘리자베스 성당이 나오는데 이 고딕 양식의 성당은 평화와 평안의 기분을 맛볼수 있는 곳이며 건축재료가 우크라이나산 돌로 만들어져 있어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닌 거리에서 북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돌면 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있는데, 예술사 박물관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로마네스크 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시가지 북쪽 끝의 Maratonu Mieru 거리에 있는 동부 슬 로바키아 박물관은 선사시대 유물이나 고고학적 자료들, 그리고 희귀한 금화들을 관람하기에 좋은 곳이다. 위치는 슬로바키아의 동쪽 끝, 러시아와 국경에서 50㎞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도시의 분위기는 슬로바키아다운 조용함과 중후함이 배어 있다. 이 도시에서 가볼만한 곳은 성 엘리자베트 교회, 구주청사, 동슬로바키아 미술관 등이다.
7.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슬로바키아의 수도로써 빈·부다페스트와 함께 도나우 강을 젖줄로 번영해 온 도시이며 슬로바키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급속한 현대화로 인하여 아름다운 고도(古都)의 정경을 고속도로와 공장들이 망치 고 있는 곳이다. 다뉴브강 맞은 편으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들은 보기 흉한 꼴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3세기 동안 헝가리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비교적 문화적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는 편이다. 도시의 분위기는 거리 전체가 퍽 아담하며 어딘지 착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비가 어울릴 것 같은 도시이다.
7-1. 미하엘 문
1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구시가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 문을 들어서면 포석이 깔린 골목길이 이어져 있고 양쪽에 늘어선 상점가는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조금더 들어가면 4월 4일 광장이 나오는데 이곳은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조성된 역사적인 광장이다.
7-2. 구시청사
건물 4월 4일 광장의 맞은 편에 위치해 있으며,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재해 있는 건물이다. 건물 주위의 풍경도 좋지만 그냥 단순히 건물만을 감상하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이다.
7-3. 디브로바 광장
4월 4일 광장의 조금 뒤쪽에 위치해 있다. 주변의 프란시스코 교회, 로코코식 건축물인 미르바하 궁전 등이 볼만한 곳이다.
7-4. 피오네르 궁전 브라티슬라바 중앙역과 구시가의 중간쯤에 위치한 궁전으로 초기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 일품이다.
7-5. 슬로바키아 국립 박물관
도나우 강의 선착장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전시된 것 중에서 특히 동물을 박제로 만들어 그 생태를 알 수 있게 전시한 곳은 정말로 가볼만한 곳이다.
----------------------------------------------- 자료출처 : 경향신문 홈페이지 지구촌 국가 정보
현지유의사항
Ⅰ. 출입국시 유의사항
1. 사 증 : 우리나라와는 95.7월 사증 면제 협정 체결(비영리 목적인 경우 사증 없이 3개월간 체류 가능)
2. 출입국 통관시 담배 250개피, 와인 2리터, 알콜 1리터 한도내 허용.
3. 예방 접종 관련 특기할 요구 사항은 없음.
4. 입국시 하루 최소 $15 이상의 체재 경비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치 못하는 경우(무작위 검사), 입국을 거부당할 수 있음.
Ⅱ. 체재시 유의사항
1. 브라티슬라바 시내 번잡한 지역에서 소매치기가 간혹 있으니 유의요.
2. 슬로바키아에는 우리 공관이 상주하고 있지 않으며 여권 분실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권 관리에 각별 유의요
(여권을 분실할 경우, 체코 대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 인편이나 우편을 통하여 수령할 수는 있음).
3. 기타 사항은 체코의 경우와 유사
Ⅲ. 긴급시 연락처
1. 경 찰 : 158
2. 병 원
o Ruzinovska 6, Bratislave(Tel. 07/233-088)
o HOSPOTAL DEREROVA : Na kramare, Bratislava(Tel. 07/374- 060)
3. 24시간 운영 약국:
o Schneidera Trnavskeho, Bratislava(Tel. 07/76-7140)
o Spitalska 57, Bratislava(Tel. 07/532-5038)
4. 긴급 앰블란스 호출번호 : 155(앰블란스차)
5. 화재시(소방서:150)
6. 교통사고시 : 154
Ⅴ. 재외공관 주소 : 주체코 대사관에서 겸임.
-------------------------------------------------------------------자료출처 : 외교통상부
<<비자문제>>
<비자 발급처>
'95년 6월 양국은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여 '95년 7월부터 발효함으로써 슬로바
키아에 6개월의 단기여행시 비자를 받을 필요가 없다.
<비자 필요여부>
단기비자는 필요없으며 일반적으로는 해외의 대사관이나 국경에서 발급이 가능하
다. 장기체류비자의 경우는 슬로바키아 내무부 및 외무부(대사관요원에 한함)에
서 발급하고 있다.
<구비서류>
단기 체재시 한국인은 면제되어 구비서류도 필요없다.
<방역>
방역은 특별히 규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전염병발생시 단기적으로 도입하나 규제
정도는 극히 미약하다.
<출입국 절차 및 유의사항>
입국시나 출국시에 간단한 신고서 및 여권을 제시하는 경우 제한없이 출입국이
가능하며 일정액이상의 현금지참반출입은 반드시 관련기관에 신고를 필하여 문제
시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입국시 특별히 제한하고 있는 반입품목은 없으나 마약,무기등의 반입은 다른 나
라와 마찬가지로 금지되고 있으며 문화재 보호를 위해 문화재성 물품의 반출시에
는 국가문화재가 아니라는 증명을 휴대하여야 한다.
-------------------------------------------------------------------자료출처 : KOTRA-NET
1996 09/11(수) 14:14
[슬로바키아 기행] 걷히지 않는 다뉴브의 `밤'
### 공산정권 붕괴했어도 언론-인권탄압 여전 ###
### 유신 닮은 상황 속에 경제는 착실히 성장 ###.
체코 프라하에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까지 3백98㎞, 발틱 익스프레스열차로 6시간. 국경을 넘는 동안 차창에스쳐가는 모습은 두 나라가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살림을 했던 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기에 충분했다. 낡은 스코다 자동차, 오렌지색 벽돌 지붕, 집 근처 작은 별장등 슬로바키아 는 체코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열차가 최종목적지인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라브나 스타니카(HLAVNA STANICA)역에 들어서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선 슬로바키아 제1이라는 이 역사는 체코 프라하 호레소비체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골 마을 역사 규모였다. 길거리를 오가는 슬로바키아인들의 표정없는 얼굴과 어두운 침묵,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슬로건,
외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자동차조차 보기 어려운 한산한 거리 풍경.체코에서 느끼던 활기와는 전혀 대조적인 슬로바키아 의 이같은 모습은슬로바키아 가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93년 1월1일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체제에서 분리, 각자 독립 국가의 길을 걷고있는 슬로바키아 와 체코. 동일한 언어에 똑같은 얼굴을 한두 나라이지만 가까이서 본 브라티슬라바는 프라하와는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 비밀 경찰 동원 언론 검열, 소수민족 차별 ////.
지난 6월 17일 나토( NATO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칼스텐 보이트 의장은 유럽 모든 언론이 모인 가운데 특별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내용은 구동구권 최대 관심사인 나토 가입에 관한 나토 집행부 방침 설명.
나토 집행부는 기본적으로 나토 가입 문제를 희망국 민주화 정도와 연계해서 결정할 것이며, 1차 가입 대상국은 97년초에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회견 요지였다. 당시 보이트 의장 발언 직후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슬로바키아 . 유럽 언론들이 슬로바키아 를 민주화에 어긋나는가장 대표적인 나라로 손꼽으며 나토 가입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산정권 붕괴 이후 구동구권 국시가 되고있는 자유시장경제와 의회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때 슬로바키아 는 언제부터인가 이같은 방향에 역행하는 나라로 낙인찍힌 상태이다.
유럽 언론에 비친 부정적 슬로바키아 모습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비밀 경찰을 이용한 언론 검열과 소수민족 차별 등 인권 탄압에 관한 부분.
필자가 슬로바키아 인들을 만나보면서도 느꼈지만 슬로바키아 인들은 정치적문제에 관한 한 절대로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이유는 95년 특별법으로 통과된 「국가 명예에 관한 법률」 때문. 20년전 한국 유신 정권때 긴급조치법과 비슷한, 언론 자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법이다. 정부를 비판할 경우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슬로바키아 인들의 어두운 침묵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언론 탄압과 함께 슬로바키아 전체 인구 10%를 차지하는 헝가리 인에 대한 유형무형의 차별도 슬로바키아 를 인권 탄압국으로 부각하는 요인이되고있다. 공식석상에서 헝가리 말 절대 금지, 헝가리 인의 슬로바키아 어학습 의무화, 헝가리 인 공직 배제 등 차별 정책은 대표적 인권 탄압 사례로 유럽 사회에 알려진지 이미 오래이다. 유럽 언론들은 이같은 비민주정책과 관련해 그 근본 책임을 슬로바키아 최고 실권자인 블라디미르메치아르 총리에게 돌리고 있다. 메치아르 총리는 원래 89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혁명 당시 혁명 시발지였던 시민포럼 최고 책임자로 현재 체코대통령인 하벨과 함께 일했던 민주 화신.
그러나 8년이 지난 현재 메치아르 총리는 「 슬로바키아 의 히틀러」 「나폴레옹을 꿈꾸는 중부 유럽의 돈키호테」 등 별명을 가진 인물로 변해버렸다. 구동구권 수반 중 가장 독재적 성격이 강한 국수주의자로 부각돼통합을 지향하는 유럽 언론이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메치아르총리는 또한 타협에 인색한 특유의 독선적 성격 때문에 현 슬로바키아 대통령 미카엘 코박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불화는 결국 94년 코박 대통령이 총리 불신임투표를 주도, 한때 메치아르가 총리 자리에서 쫓겨나는 상황으로 번지기도 했다. 와신상담 후 재기한 메치아르 총리가 코박대통령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것은 당연한 결과. 슬로바키아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중화학공업 비중 커 국가주도 정책 효과 ////
한편 체코인들 대부분은 메치아르 총리의 이같은 성격과 관련, 체코와 슬로바키아 분리의 근본 원인이 슬로바키아 민족지상주의를 외친 메치아르에게 있다고들 말한다. 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분리 독립 소식이
알려질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인 대부분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제2 발칸화를 우려한 하벨 대통령 단안으로 국민투표 없이 두 나라가 딴
살림을 차리긴했지만 메치아르의 분리 독립 주장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전체 국민 정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 체코인들의 생각이다.구동구권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중 하나는 건설 붐. 갑자기 몰려든 투자가와 관광객을 위한 증개축 붐은 분명 구동구권 변화를상징하는 모습이다. 슬로바키아 는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인 변화 흐름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나라로 비쳐진다. 지난 6월에 문을 연 맥도널드 햄버거, 독일 자본으로 세운 K-MART 백화점 등 몇몇 건물만이 눈에 들어올뿐 전체적으로 볼 때브라티슬라바는 과거 공산당 시절 모습과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슬로바키아 에서는 폴란드 와 체코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부동산 관련 기업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개방분위기를 느끼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볼 때 슬로바키아는 의외로 구동구권 중 가장 착실한 모범생으로 손꼽히고 있다. 95년기준으로 인플레 6.1%, 경제성장률 7.4%,실업률 13.7%. 통계상으로 드러난 슬로바키아 경제는 구동구권 그 어떤 나라보다 좋다. 체코와 분리독립 이후 유럽 국가 대부분이 슬로바키아 경제 부진을 점쳐왔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슬로바키아 의 이같은 경제 성장은 주위를 놀라게하기에 충분하다.
슬로바키아 는 현재 메치아르 총리의 비민주적 정책으로 해외 자본이 이웃나라보다 월등히 적은 상태.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 슬로바키아가 착실히 발전하고 있는 이유는 메치아르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 주도경제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있기 때문. 완전 자유경쟁에 맡기는 체코 시장경제 정책과는 대조적인 상황이다. 메치아르 총리가 이같은 정책을 펴는 이유는 슬로바키아 경제 구조가 체코와 달리 주로 규모가 큰중화학공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티슬라바는 원래 헝가리 제2수도이자 구체코 슬로바키아 주력 산업인 철강 기계제조업 화학시설 등이 집중된 공업단지.
//// 노동력·지정학적 위치 등이 전망 밝게 해 ////
유럽 경제학자들은 그러나 슬로바키아 가 최근 이룬 경제 성장이 결코메치아르 총리의 탁월한 경제 정책 결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5백30만명에 지나지 않는 인구에 산업 시설이 집중된 상황에서 국가가 개입할 경우 그 결과는 단기적으로는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물론 메치아르 총리의 비민주적 통치 행태에 대한 불만을간접적으로 표현한 평가로 볼 수 있다. 국영기업 사유화 과정에서 메치아르 총리 측근이 기업 책임자로 임명되는 점 또한 슬로바키아 경제가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주원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떻든현재 슬로바키아 는 경제적으로 볼 때 구동구권 중 가장 안정적인 국면에접어들고 있다. 독일에 필적한다는 수준 높은 노동력, 체코와 폴란드 보다 싼 임금,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권과 유럽을 이어주는 유리한 지정학
적위치 등은 분명 슬로바키아 경제의 미래를 밝게하는 요소들이다.
///브라티슬라바 한가운데는 중동부 유럽의 젖줄, 다뉴브강이 흐른다.///
공산 체제 당시에는 「붉은 다뉴브」로 일컬어지며 이웃 오스트리아에서 불어오는 자본주의 바람을 막는 국경선으로 활용됐던 이념 장벽 다뉴브강. 슬로바키아 인들이 두나강이라고 부르는 다뉴브강은 그러나 최근들어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최대 무역 파트너인 오스트리아와 국경 무역을 주도하는 비즈니스 마당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브라티슬라바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불과 63㎞. 다뉴브강을 따라배로 갈 경우 1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 거리이다.
///다뉴브강을 오가는 수많은 배들은 바로 슬로바키아 경제 발전을 상징한다.///
슬로바키아 가 수도를 브라티슬라바에 잡은 것도 다뉴브강을 이용, 빈의 풍요를 하루라도 빨리 따라잡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스스로를 「유럽의 하트」(HEART)라고 부른다. 심장처럼 중요하다는 의미와 함께 슬라브와 유럽간 갈등을 사랑으로 풀 수 있는 유일한나라라는 뜻으로도 해석될수 있는 말이다.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방법으로 슬라브식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를 채택, 21세기를 향해가고 있는 슬로바키아 . 유럽의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 슬로바키아 에서 마주한 다뉴브강은 내일을향한 힘찬 심장 박동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 브라티슬라바 백화점 주말이면 싼 물건 사려는 오스트리아 인들로 북적///
브라티슬라바 중심지 스프타이스카가에 있는 독일계 백화점 K-MART…슬로바카아내 최대규모 백화점인 이 건물은 주말이 되면 이방인들로 가득찬다. 백화점앞에 늘어선 W번호 자동차 주인들이기도 한 이들은 이웃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사람들. 국경을 넘어 브라티슬라바까지 쇼핑하러온 손님들이다.
이들이 사는 물건은 치약 콜라 맥주 휴지 신발 소시지등 생필품에서부터 그릇 컵 운동용품 필름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에있는 물건 전부. 백화점측은 독일말이 가능한 점원들을 배치,멀리서 찾아온 오스트리아 손님들의 즐거운 쇼핑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들이 국경을 넘으면서까지 브라티슬라바를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물건값이 싸기 때문. 대체로 빈의 20∼30% 수준에 지나지않는다. 빈에서 10달러 수준인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는 슬로바키아 에서는 3달러정도. 빈에서 5달러 하는 말보로 담배는 슬로바키아 에서 1달러50센트. 스위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물가가 비싼 빈 시민들 귀가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가지는 「멀리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공간적 거리 때문. 빈에서브라티슬라바까지는 63㎞. 자동차로 1시간이 채 안걸리는 거리이다. 물론 돈 많은 자본주의 나라 오스트리아 인은 무비자로 언제든지 슬로바키아로 들어올 수 있다. 이국적 분위기와 브라티슬라바식 음식맛을 만끽한뒤 자동차에 물건을 가득 채워 귀국하는 1일 국외 쇼핑. 토-일요일마다 떼로 몰려드는 오스트리아 쇼핑객 수는 한달 평균 2만명 정도. 백화점과 주변에 이들이 뿌리는 돈은 95년 한해만 해도 10억달러 정도. 관광객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슬로바키아 지만 국외쇼핑을 즐기는 내
실있는(?) 빈 손님 덕분에 전체 관광 수입은 구동구권 어디에도 뒤지지않는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오스트리아 소비자들 불만을 이용, 재빨리 값싼쇼핑 마당을 마련한 슬로바키아 . 주말 브라티슬라바 백화점에서 볼 수있는 장바구니 장사진은 슬로바키아 가 나름대로 익혀가고있는 자본주의적응 현장이다.
<브라티슬라바=유민호 해외순회특파원>
1994 02/14(일) 00:00
슬로바키아에 "민족갈등"/60만 헝가리인 자치요구
*"인구 10%차지 자율권 줘야 마땅"/헝가리/"옛제국 재건 저의깔 린 반국가행위"/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정부가 헝가리 소수민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다. 슬로바키아내에 살고있는 60만명의 헝가리인들이 자치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와의 관계도 심상치 않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자국내 헝가리인들의 그같은 움직임이 헝가리 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외무장관인 조제프 모라브치크는 지난 2일 헝가리 정부가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에게 영토 회복주의 경향 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 다. 헝가리 정부가 슬로바키아내의 헝가리 민족을 대표하는 정당들의 몇 몇 대표자들에게 영토 회복주의적 경향을 부채질해, 그들이 슬로바키아내 헝가리 민족의 권리문제를 들고나왔다는 것이다.헝가리 정부는 이에 대 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고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는 평소 주 변국가들에 있는 헝가리 소수민족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해왔다. 헝가리의 일부 과격파 그룹과 극우파 들은 이들 소수민족의 영토와 헝가리와의 재통합까지 주장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전체인구의 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헝가리 소수민족의 정 치지도자들이 자치를 위한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올 들어서면 서부터. 3천5백여명의 헝가리인들은 지난달 8일 슬로바키아 남부의 코 마노에서 집회를 갖고 헝가리인들이 집중적으로 살고있는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에 자치정부를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헝가 리인들은 슬로바키아 정부가 자신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특히 슬로바키아 정부가 선거구를 재조정, 유권자 블록 으로 서의 헝가리인들의 결합력을 약화시키는 법률을 곧 통과시킬 것이라는 두 려움 때문에 자치운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현재 1백50명으 로 구성된 슬로바키아 의회에서 헝가리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2개 정당에 속한 의원의 수는 14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들은 헝가리어를 사용 하는 학교들을 대거 세우고 그 운영권을 줄 것과 슬로바키아어와 헝가리 어 2개 언어로 되어있는 교통표지판의 사용을 합법화시켜줄 것, 그리고 헝가리식 이름을 슬로바키아 철자법에 따르지 않은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캠페인이 본격 시작되기에 앞서 이런 움 직임은 지난 연말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부 슬로바키아의 시 -군 연합 이라고 자칭한 헝가리인 시-읍장들은 헝가리어 신문인 우이 소지에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특별한 권리와 자치행정기관을 가진 일종 의 자치정부와 특별주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 슬로바키 아 남부에 있는 사모린시의 헝가리계 시장인 루도비트 귈라이는 남부지역 에 있는 1백8개의 시-읍중 1백개 정도가 자치정부 요구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슬로바키아 정부 지도자들은 이 요구에 반대하 고 있다. 그들은 그같은 움직임이 구유고슬라비아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고 경고한다. 미할 코바치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이는 슬로바키아의 영토적 일체성을 위협하는 행위"라며 "나는 헌법에 따라 슬로바키아공화 국의 일체성을 지키는데 혼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립정권을 구 성하고있는 2개 정당중 하나인 슬로바키아 국민당의 루도비트 체르나크 당수는 "그같은 움직임은 슬로바키아인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으로, 반 국가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고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부 슬로바키아 관리들은 헝가리 정부가 대헝가리 를 재건설할 목적으로 슬 로바키아내 헝가리인들 사이에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헝가리는 3 백년동안 슬로바키아를 통치했었다. 이용순기자
02/14(일) 00:00 입력 ◀이전화면 ∥ ▲초기화면
01996 8/22(목) 14:24
[기행] 젊은이들의 땅 체코… 각 분야별 세대교체 완료
### 공산정권 붕괴 6년만에 OECD 가입, 안정권 진입 ###.
발차역 바르샤바, 종착역 부다페스트 . 발트 오리엔트 특급 265호를 타고 바르샤바를 출발, 국경을 넘어 체코 프라하 호레소비체역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유럽 전역에서 일고있는 이상저온 현상은 체코 프라하라고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7월 초순 아침 기온이 영상 5도.
프라하 역사는 그러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반바지 차림배낭여행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대학생인 듯한 독일 여행객은 열차에서 내리는 필자를 보자마자 대뜸 『Be Careful the tiger in Prague』(프라하에서는 호랑이를 조심하라)는 알듯 모를듯한 한마디를 던졌다. 알고보니 체코대학생 한 명이 프라하 동물원 호랑이 우리에 용감히 들어갔다가 물려죽은 사건 이후 프라하에 유행하고 있는 농담이었다. 이처럼 여유있는 여행객들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역사 안에서는 행색이 초라한 수많은 난민들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잠자고 있었다. 대부분은 구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넘어온 사람들. 일부는 필자를 보자마자 「돈많은 일본인」쯤으로여기고 우르르 몰려와 때에 찌든 손을 내밀었다.
역을 벗어나 프라하 중심가 쪽으로 나가자 서부 유럽과는 또다른 느낌의 중후한 거리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북의 로마」로 일컬어지며 일찍이 모차르트 가 격찬한 유럽의 심장 프라하. 14세기 중반 찰스4세가 본격개발한 프라하는 특히 다뉴브 강을 따라 들어온 바로크, 고딕, 네오고딕,르네상스등 각 시대 건축 양식이 적절히 조화, 집대성된 다양한 건축 양식 보고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문화 자원과 함께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않은 순수성과 저렴한 물가 등으로 프라하는 현재 유럽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초만원 상태이다. 95년 한해 동안 관광 수입만도30억 달러 정도. 프라하는 유럽을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자본주의 체제로 적응해가고 있다.
//// 한해 관광수입 30억달러...발빠른 변화 ////.
이같은 체코의 발빠른 변화는 역 안에 설치된 호텔 안내용 컴퓨터 시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유럽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첨단 컴퓨터시설로 관광 숙소를 안내해주고있는 자본주의식 서비스. 공산 정권이붕괴한지 고작 6년이 지났지만 프라하는 이미 비능률과 무책임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주의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골목골목 이어진 크고 작은 미술 전시장과 수많은 책방들. 밤이 되면서 교회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모차르트 와 드보르작의 명곡들. 찰스 다리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거리예술과 하루가 멀다하고 열리는 예술제들.이른 아침부터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시민들의 여유로운 모습. 집 근처에 널려있는 수많은 테니스장과 운동 시설들…. GNP 개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GNP2천 달러에 불과한 체코국민들이 엮어내는 이같은 「사치스러운」 모습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프라하에 살고있는 한 한국기업 주재원은이와관련 『한국이 체코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자동차와 텔레비전 냉장고뿐, 나머지는 체코에 모두 뒤져있다고 봐도 된다』고 귀띔해줬다.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체코는이미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을 배출해낸 것을 비롯해 공산화 이전에 벌써 세계 10대 공업국에 들어가있던 나라이다. 잘 알려진대로 사회주의 체제 당시 개발된 체코제 AK자동소총은 미제 M16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주의권 무기로도 유명하다.
2백50억 달러를 투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전폭기가 개발되자마자 체코 공대에서 즉각 스텔스기를 잡을 수 있는 레이더 「타마라」를개발, 미국측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은 수준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체코 공대 출신 중에는 북한의 대표적 개방파 연형묵전 정무원총리도 끼어있다. 체코는 그러나 지적 분야와 함께 스포츠 분야에서도 유럽 어느 나라에 뒤지지않는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나브라틸로바, 이반 렌들, 반드리코바 등 세계적 테니스 선수가 바로 체코 출신이다. 또한지난 5월에는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스키와스케이트 등 겨울 스포츠는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체코의 이같은 엄청난 힘은 지난 6,7월 두달간 유럽 30여개국이 참가한 유럽컵 축구대회에서 유감없이 발휘, 유럽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구 1천만에 불과한 소국 체코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 축구 강국을 모두누르고 결승전까지 올라 독일과 겨룬 끝에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체코는 젊은 나라이다. 체코인들은 공산 정권 45년간 모든 것이 정지한 채 지내왔다고 믿고 있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한 빛바랜건물을 체코인들은 한마디로 「코뮤니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정지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서 체코인들은 스스로가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남은 목표는 EU · NATO 가입//// (참고로 2000년 6월9일 현재 슬로바키아는 나토에 가입을 해있는 상태
이같은 사회 분위기는 실제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무원이나은행 기업 관계자를 만나면서 놀랐던 것은 영어·독어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30대 전후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다. 체코 국내 사정을 알기위해 만난 체코 유일 영문 잡지 「The Prague Tribune」 편집장은불과 28세,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국 기자 평균 연령은 25세.
이들은 외국어 실력과 국제 감각을 활용, 외국 기업에서 일할 경우 급료를 몇 배 더 받을 수 있지만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월급 2백달러에도 만족하고 있었다. 체코에 일고있는 급격한 변화는 적응능력이 빠르고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을 실무진에 앉히고 과거 공산주의사고에 젖어있는 구세대 장년층을 완전히 도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치인은 아직까지 과거 민주포럼 출신 장년층이 많지만 그밖의 영역은 이미 세대교체를 끝낸 상태이다. 이같은 세대교체 바람은 젊은이들에게미래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고 있다. 그만큼 체코는 청년의 나라이다.
지난 1월 1일. 체코 전국민은 89년 공산정권 붕괴 이후 오랜 꿈 하나를 달성했다. 세계 선진 공업국 모임인 OECD ( 경제협력개발기구 )의 26번째정식회원이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구 소련 위성국으로 전락, 서부 유럽과 담을 쌓고 지내던 체코로서는 자본주의 체제 전환 6년만에 이룬 일대 쾌거였다. 중동부 유럽에서는 가장 빨리 서구 경제 클럽에가입한 체코는 이같은 여세를 몰아 오는 2천년까지는 유럽 시민으로 명실상부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EU 에 군사적으로는 NATO 에 가입할 것을 국가목표로 하고있다. 이 목표는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쉽게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체코는 주변 중동부 나라들과 달리 자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에 특혜를 전혀 주지않고 있다. 투자 유치를 위해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외국투자가들이 많이 몰려오고있다는 얘기도 되지만,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체코 특유의 자유방임 정책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시장경제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같은 정책은 95년 현재실업률 3%, 소비자물가 7% 상승으로 중동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경제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자신감과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체코 정부는 지금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슬로바키아 분리 독립 때 보여줬던 성숙한 국민의식을 2천년대 중부 유럽 제2의 스위스 건설이라는 목표로 모아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벨이 있었기에…체코· 슬로바키아 분리과정서 막강한 권위·영향력 발휘
93년 1월 1일. 지구상에는 두 나라가 탄생하며 한 나라는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탄생한 두 나라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 사라진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
일명 벨벳 이혼(VELVET DIVORCE)이라는 분리독립 과정을 거쳐 현재 각각 독자 헌법과 정부를 갖고 유럽 발전의 한 몫을 담당하고있는 체코와슬로바키아 . 필자가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두 나라가 어떻게해서 순조롭게 각각 독립국으로 분리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외신을 통해 분리독립과 관련, 두 나라 국민끼리 어떤 유혈 충돌이라도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합치는 것도 어렵지만 기존의 것을 허물고 서로 갈라선다는 것은 더더욱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재산 분배를 놓고 가족끼리도 볼썽사나운 일이벌어지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체코와 슬로바키아 는 어떻게했길래 국가간이혼 문제를 별 탈 없이 이룰 수 있었는가. 더구나 보스니아 내전에서 보듯 현재 동부 유럽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 민족지상주의 이데올로기로 홍역을 앓고 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분리 독립은 이러한 상황에서 분쟁해결에 새로운 모범답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기에충분했다.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꿈을 좇는 예술가가 국가 수반에 올라 국정전반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 해답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체코 대통령은 잘 알려진 대로 공산정권 당시 반체제인사로 유명한 바츨라프 하벨. 일찍이 77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77헌장그룹을 주도한 것을 비롯, 89년에는 「시민포럼」 최고 지도자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벨 대통령은 그러나 반체제 인사 이전에 체코슬로바키아 를 대표한 극작가와 철학자로 더더욱 유명한 사람이다. 실천문학가를 수반으로 하고있는 나라 체코. 예술이 목표로 삼는 조화와 평화자유 창조 같은 아름다움을 인간 관계의 극치라는 정치 과정에 적용했던예술가 정치인 하벨. 그런 인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이끌고 있었기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순조롭게 각각 분리독립할 수있었던 것이다.
89년 11월 27일 이른바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 혁명 주체 세력이던 시민포럼은 시민민주당의 클라우스(현 체코 총리)와 민주슬로 바키아당의 메치아르(현 슬로바키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원래 전혀 다른 두 민족, 즉 체코와 슬라브족 연방국이었다. 본격 동거는 1918년부터 1993년 분리 독립 때까지 모두 76년에 불과하다. 합스부르크가 몰락 이후 유럽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얼떨결에 합쳐진 두나라는 실제론 전혀 피가 다른 남남이다.
공산정권 붕괴 후 두 진영 불화는 자본주의 체제 전환과 관련해 92년국가 정책을 수립할 때 표면화됐다. 경제 회생을 위해 정부의 적극 개입을 요구하는 슬로바키아 쪽 메치아르와 정부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체코쪽 클라우스가 의견 대립, 분리 독립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같은 대립은 슬로바키아 가 변화 속도가 느린 중화학 공업을 위주로 한 경제 구조인데 반해 체코는 경공업과 3차산업 위주로 자본주의 체제 적응에 유리한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서로 다른 피를 가진두 민족이라는 내면적 이유와, 상이한 경제 구조라는 외면적 이유를 근거로 92년 8월 클라우스와 메치아르는 더 큰 혼란이 오기 전에 각각 딴살림을 차리기로 합의하게 된다.
//// 국민투표 문제로 충돌 위기서 대타협 유도 ////.
당시 합의에 이르기까지 최대 과제로 떠올랐던 것은 분리 독립을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하느냐 아니면 정치적 협상으로 결론 내리느냐 하는 부분. 분리 독립에 부정적이었던 체코 국민들은 분리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분리 독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메치아르 등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 인구 1천5백만명가운데 슬라브계 인구가 체코계 인구의 50%인 5백만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들어 국민투표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재자로 나선 사람이 바로하벨 대통령. 체코와 슬로바키아 에서 모두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하벨 대통령은 두 진영이 만족할 수 있는 협상을 유도, 「예술가 정치인」으로서권위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두 진영 의견 대립은 자칫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유고슬라비아에 이은 제2의 발칸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하벨 대통령은 분리 독립에 따른 국가 자산 분배, 통화 문제 등 구체적 실무 작업
을 해나가는 동안에도 상호 존중과 타협 정신을 잃지 않도록 보이지않는권위를 행사했다. 대결단이 필요하거나 풀기 어려운 장애가 있을 때는 항상 하벨이 어딘가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체코와 슬로바키아 는국경선 문제처럼 자칫 이해 관계가 어긋나기 쉬운 미묘한 문제도 하벨 중재로 인구 비례에 따라 「체코2, 슬로바키아 1」이란 대원칙 아래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
프라하 거리에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그 흔한 교통경찰을 보기 어렵다. 모든것을 시민자율로 결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작은 정부」는 체코 정치의 기본 방향이기도 하다. 힘을 쓰거나 결코 무리하지 않는 정치. 책임과 신의를 바탕으로 조화와 운영의 묘를 최대화하는 정치. 언제부턴가 극작가대통령 하벨이 보여준 정치 방식이다. 현재 그는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으며 권위 있는 대통령으로 국가적 중대 사안이나 대외 정책에 관여하고 있다. 지난 1월1일 이뤄진 OECD 가입은 성숙한 정치력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한 하벨 대통령이 외교가로서 소리없이 세계 외교 무대에 선보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맥주? 천만의 말씀" 버드와이저 원조 체코 맥주, 세계 최고 맛 자랑
프라하 거리를 걷다보면 유난히 눈에 많이띄는 광고문이 하나있다. 주로 쓰레기통이나 구석진 곳에서 볼수 있는 광고문은 대부분 「피보팝 투어」(PIVO PUB TOUR). 「피보」는 체코말로 맥주라는 뜻. 프라하시내 유명 맥주집을 대낮에 4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맥주맛을 골고루 맛보자는,바로 주당을 위한 「알코올 투어」 광고문이다. 프라하를 찾는 시람들이라면 한번쯤참가하는 알코올 투어 가격은 7달러정도. 독일인들은 특히 맥주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일부러 프라하를 찾는다고도 한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채 떼지어 맥주집을 전전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꼴사납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체코인들은 그런 관광객들을 크게 두 가지이유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는 소란스러운 그들 모습에서체코 맥주가 세계 최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둘째는 본인들도 밤이 되면관광객과 똑같은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생산해내는 나라는 어디일까. 대부분은독일로 알고있지만 그것은 문외한들이 하는 말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을비롯해 유럽 전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맥주는 체코 맥주이다. 체코 맥주는 한국인 입맛에는 다소 쓰고 진하게 느껴진다. 거품을 통해 전해지는이러한 쓴맛을 얼마나 달콤하게 느낄 수 있느냐가 「정통 주당」의 기본 자격이라 할수 있다. 독특한 맛과 관련해 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20만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몰려온 것은 맛있는 체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이다.
//// 6백년전 어느 가정에서 만든 원조맥주 필스너 /////.
체코 맥주의 맛과 전통은 독자적 발효법을 대대로 이어온 시골에서 비롯됐다. 세계 맥주 원조로 꼽히는 필스너(PILSNER) 맥주도 원래는 6백년전 프라하 남부 부르제니의 한 가정에서 만든 맥주이다. 현재 세계 맥주의 대명사라고 하는 미국 버드와이저 는 체코 남부 체르케 부르요비체 마을의 버드바(BUDVAR) 맥주를 흉내내 만든 것이다. 버드바측은 최근 미국버드와이저사가 무단으로 이름을 도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었다. 이밖에 1869년 만든 이래 전유럽인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파러프라멘(PARE-PRAMEN), 4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쿠르소비체(KURSOVICE)와 체코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플레진스키 프라즈드로이(PLZENSKY PRAZDROJ)도 체코가 세계에 자랑하는 맥주이다. 쿠르소비체 맥주는 특히 공산당원들이 즐겨 마시던 술로 알려져있다.
재미있는 것은 93년 체코와 분리독립한 이웃 슬로바키아 의 경우 남남이 되면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은 갑자기 오른 맥주값이었다는 것. 「애인은 잊어도 맥주맛은 못잊는다」는 말이 체코 속담에 있지만 프라하 남부맥주맛에 길들여진 슬로바키아 인들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관세까지 부담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따라 대표적 수출 맥주인 플레진스키 프라즈드로이의 슬로바키아 수출량은 매년 1백%씩 급신장하고 있다.
거품으로 뒤덮인 진한 맥주처럼 작지만 풍성한 나라 체코. 핵 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들의 지하실에서는 세계 최고 맥주가 익어가고있다.
<유민호 해외순회 특파원>
1996 09/06(금) 18:28
주한외교사절 탐방/ 스테판 모라벡 슬로바키아대사
## "한국 학생들은 참 불쌍해요"…12.12, 5.18재판에도 관심 ##.
지난 8월28일 오후 5시 서울 논현동 슬로바키아 대사관저. 거실에 나타난 스테판 모라벡 대사(50)는 풍채가 당당하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자연스레벗겨진 대머리 와 붙임성 있는 말투가 마음씨 좋은 「빵집 아저 씨」를 연상시켰다. 그는 자신의 대머리 를 가리키며 『우리나라에는 대 머리가 많아 아무문제가 없는데 한국에서는 대머리 를 놀리는 조크가 많다』며 웃었다. 인터뷰 도중 양말 차림인 것을 알아차리고 『집에서 신발을 신지 않느냐』고 묻자『보통 신발을 신는데 잠깐 벗어놓았다』며 『한국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냐』며 또 웃었다. 격식을 중시하는 딱 딱한 대사 이미지와는 무척 거리가 멀었다.
지난 92년 부임한 모라벡 대사는 한국에서 「두개의 조국」을 대표하 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그는 90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체코슬 로바키아의 첫 한국대사로 부임해 왔다. 하지만 93년 슬로바키아 가 독 립을 선언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나라로 갈렸고, 슬로바키아 출신인 그는 새로운 조국의 첫 한국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모라벡 대사는 교수 출신 외교관이다. 슬로바키아 의 명문인 「슬로 바키아 기술대학(Slovak Technical University)」을 졸업한 그는 72년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죽 교수로 재직해 왔다. 전공은 석유화학.
87년부터 91년까지 학장을 지내며 행정경험도 쌓았다. 특히 89년 민주 화 과정에서 대학에 직선제가 도입되자 학생들에 의해 다시 학장으로 뽑힐만큼 인기교수였다.
● 석유화학 전공한 교수 출신.
그가 뒤늦게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정부의 요청 때문. 공산권 블록이 허물어지면서 새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나라가 많아지자 국제감 각과 외국어실력을 갖춘 학자들로 외교관을 많이 충원했다고 한다. 슬 로바키아의 경우는 외교관의 거의 절반 정도가 학자 출신이라고 한다.
그가 한국대사로 있으면서 가장 역점을 쏟는 분야는 한국과의 경제 협력.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게 그의 중요 임무다. 현재 슬로바키아 에는 삼성전자 가 현지기업인 CALEX와 합작해 가전제품을 생 산하고 있고, 대우자동차가 작년말 현지공장을 설립했다. 작년 한국의 대 슬로바키아 수출액은 2천4백90만달러로 전년에 비해 6배 정도 증가 했다.
한국생활 5년째를 맞고 있는 그는 한국의 사정에 훤하다. 그에게 최근 국민적 관심사가 된 12.12, 5.18 재판에 관해 묻자 『한국을 위 해 무척 긍정적인 일』이라며 『역사가 반민주적인 과거를 심판하는 것 은 시간문제 아니냐』고 말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서서히 민주화를 완성해왔다는 점에서 슬로바키아 와 한국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는 89년 이후 하벨과 두브체크라는 민주적 인사가 지도자로 나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민주화를 완성했습니다.』.
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로서 조국의 미 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그는 『민주화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많 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최근 한국 한총련 대학 생들의 데모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저는 한국 TV에서 「남북의 창」이라는 프로그램을 꼭보는데 북한의 독재정권이 낳은 비참한 현실 을 왜한국 대학생들이 받아들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교수 시절 이미 여러 나라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이 탈리아 멕시코 프랑스 등지에서 교환교수로 체류했고, 15개국에서 초 청 강의를 했다. 그 때문인지 한국에 와서도 별다른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수출신답게 한국의 교육상황에 대해서는 토를 달았다. 『한국의 학생들은 참 불쌍해요. 학교에서 공부 를 하고 오면 또 숱한 과외공부에 시달리잖아요. 자유롭게 뛰어놀 시 간을 빼앗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사는 동갑나기 부인 올가 모라브코바(50)와 지난 70년 결혼, 1남 1녀를 두었다. 현재 그의 자녀들은 모두 본국에 있다. 아들 로만(25) 은 올해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슬로바키아 에 설립된 대우자동차를 첫 직장으로 택했다.
대사는 『장래성이 있고 임금수준도 좋은 직장을 택하라는 충고를 했다』며 『내가 한국대사로 근무하는게 아들의 진로선택에 연관이 있는 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로만군은 대학원 재학시 국제경영학을 전공하 면서 논문에 필요한 자료수집차 한국에 와서 6개월간 머물었다. 당시 LG 그룹에서 필드 스터디를 하는 등 한국의 기업문화를 접할 기회를 가 졌다고 한다.
딸 야나(18)는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전공은 법학. 대학에 들어가 기 전 1년간 한국에서 미 8군 어메리칸 스쿨을 다녔다.당시 한국의 모 델 에이전시의 권유로 잡지 모델로도 활동했다. 대사부부는 딸의 사진 이 담긴 한국의 여성지를 펴들고 딸의 미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대사는 한국말은 전혀 못하지만 틈만 나면 한국영화를 즐겨 본다고 한다. 가장 감명 깊었던 한국영화는 서편제. 두번씩이나 봤는데, 『세 계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문화를 담고 있었다』며 『무 척 감정적이고 독특한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 "이번 추석에 텅빈 서울을 만끽할 작정".
그는 한국의 문화 중 한국인의 노래에 대한 열정이 가장 흥미로웠 다고 말한다. 『가라오케에 두번 가봤는데,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와서 누구나 스스럼없이 나와 노래를 부르더군요. 목청도 모두들 좋고요.참 재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노래부르는 모습이 재미있 어 일요일에 방영하는 「전국노래자랑」을 빠지지 않고 본다고 한다.
대사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배구 농구 테니스 수영 등 못하는 게 없다. 특히 테니스는 20년 이상의 구력으로, 요즘도 주말마다 한국친 구들이나 동료 대사들과 어울려 게임을 즐긴다. 또 한국에 부임한 후 탁구를 배워 요즘은 틈이 나면 탁구장도 즐겨찾는다.
대사부부는 한국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고 얘기한다. 한국음식도 즐기고 틈만 나면 여행도 간다. 슬로바키아 는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 륙국가이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생선요리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하 지만 서울생활에서 물가와 극심한 교통체증에는 질려버렸다고 말한다.
생활비가 본국에 비해 거의 3∼4배 든다는 것이 부인의 설명. 대 사는 『집값이 특히 비싸다고 느꼈는데, 한번에 목돈을 내야하는 전세 제도가 다소 불합리한 것 같다』고 말한다.
대사부부는 이번 추석을 무척 기다리고 있다. 추석 때면 서울이 텅 비어 교통체증이 사라지기 떠문이다. 마치 슬로바키아 에 다시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대사는 『평소에는 운전을 하지 않지만 추석만 되면 운전대를 잡고 아내와 함께 서울관광에 나선다』며 『이번 추석에 도 고궁에 놀러가는 등 텅빈 서울을 만끽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정장렬 주간부기자>
[슬로바키아 상의회장] "현지 대우차 영업 정상"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방한중인 페테르 미혹 슬로바키아 상공회의소 회장은 12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대우자동차의현지 판매법인인 대우모터슬로바키아의 영업이 대우사태와 무관하게 극히 정상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우의 자동차는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도 성능이 좋아 슬로바키아 젊음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자동차판매업체 순위에서 2위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현지법인의 은행거래도 정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사태와 관련, 『한국 정부는 대우사태를 처리함에 있어 선거 등 정치적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슬로바키아의 교류 확대를 위해 한국 정부에 이중과세방지협정 및투자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요청했다고 밝히면서 『양국간 교역에서 한국의 수출이 슬로바키아의 수출보다 월등히 많은 점은 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날 간담회에서 슬로바키아의 외국자본 투자유치를 위해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국 기업과 동등한 법률을 적용해주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조만간 유럽연합(EU) 정회원국이 되면 서유럽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슬로바키아 투자사절단은 오는 14일 이한한다. (서울=연합뉴스 박운영기자)
1999 11/12(금) 14:42 입력 ◀이전화면 ∥ ▲초기화면
05/30(일) 06:47 정치-경제-사회-국제-문화-스포츠-정보통신-수도권
슈스터, 슬로바키아 대통령 당선
슬로바키아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집권여당의 루돌프 슈스터(65)후보가 53.5%의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슬로바키아의 민간 TV방송인 마르키자가 29일 보도했다.
이 방송은 이날 실시된 결선 투표후 출구조사 결과 정부가 지지하는 슈스터 후보가 이같은 득표를 얻어 46.5%의 득표를 보인 야당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메치아르(56) 전 총리에 승리했다고 전했다.
이들 두 후보는 2주 전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 당선에 필요한 과반수 표를 얻지못해 29일 결선 투표에 들어갔다. 「시민 이해당」의 당수인 슈스터 후보는 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인 코시체 시장으로 공산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온건 좌파로 변신,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그의 당선은 특히 지난해 9월 총리직에 올라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하고 있는 미쿨라스 드주린다 총리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나토의 유고 공습을 강력히 비난하는 민주슬로바키아운동(HZDS) 당수인 메치아르 전 총리는 친 러시아 외교 정책을 추진해온 인물로 지난해 9월 총선 패배로 실각했었다.
슬로바키아는 지난 98년 3월 2일 당시 미할 코바치 대통령이 5년 임기 만료로물러난 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공석이었다. (연합)
05/30(일) 06:47 입력 ◀이전화면 ∥ ▲초기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