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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양심^*^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 철학을 높이 세운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의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양심이 자기 마음속에 또렷이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법칙을 강조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말을 타고 산길을 지날 때였다.
강도들이 그에게 가진 것을 빼앗은 뒤 물었다.
“숨긴 것이 더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제 가거라.”
물건을 모두 빼앗은 강도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칸트의 아버지는
바지춤에 몰래 숨겨둔 금 덩어리가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숨긴 게 없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이 금덩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받으십시오.”
그 말에 강도들은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강도는 빼앗은 물건들을 돌려주면서 그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감나무에 감이 열리고 배 나무에 배가 열리는 법이다.
정직한 아버지에게서 양심의 횃불을 밝힌 위대한 철학자가 태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열린 전국 철자 맞히기 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열 세살 소년이 echolalia의 철자를 틀리게 얘기했으나
심사위원이 잘못 듣고 맞았다고 하는 바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이는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심사위원에게 솔직히 털어놓았고 결국 탈락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는 이 정직한 아이를 '철자 대회 영웅'으로 신문에 소개했다.
아이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더러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선 지도층 인사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증거가 드러나도 갖은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칸트처럼 빛나는 양심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정직한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하는 환경에서 한국의 '철자영웅'이 태어날 수 있을까.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오늘이다.
^*^진실의 불길^*^
-배연국-
세상에는 부조리가 존재한다.
서기 6세기 로마 귀족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여인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얼마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지 당신이 한번 보십시오.
악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벌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갑니다.
악이 세상을 장악하고 번성하는 반면에
미덕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악이 받을 벌을 대신 받고 있습니다.
오직 선만을 원하는 신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철학의 여인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고
행복이 바로 선이라는 관점에서 보에티우스에게 답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다. 선한 자에게는 반드시 선이라는 보상이 따른다.
선 자체가 행복이므로 모든 선한 자들은 자신이 선하다는 이유로 행복하다.
이것은 권력이나 힘으로도 빼앗아갈 수 없다.
반면에 악인들이 받는 형벌은 악 자체다. 악한 인간이 되는 것이 형벌이다."
일찍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그는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철학의 여인 역시 "악인들은 악으로 돌아섬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단지 인간이 지닌 육신의 형태만 갖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의 여인은 악인에 대해 엄중한 정의를 내린다.
"탐욕으로 불타올라서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폭력적으로 강탈하는 자는 '늑대'라고 해야 하고,
은밀하게 덫을 놓고 온갖 거짓과 술수로 사람들을 속여서
곤경에 빠뜨려놓고 즐거워하는 자는 '여우'라고 해야 하고,
우둔하고 나태한 삶을 사는 자는 '나귀'라고 해야 하며,
추악한 욕망들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자는
더러운 '돼지'가 즐기는 쾌락에 사로잡힌 자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선을 버린 자는 짐승이 되어버린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철학의 여인은 악인이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보에티우스에게 심오한 메시지를 던진다.
응징을 받지 않은 악인이 처벌받은 악인보다 실제로는 더 큰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형벌을 받으면 정의라는 선이 더해지는 기회를 갖지만
응징을 받지 않으면 불의에 속하는 악이 더 불어난다는 논리였다.
악을 개선할 기회조차 상실한 채 그의 방종과 불행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형벌을 모면할 궁리만 하는 군상들을 목도한다.
불행의 늪속으로 질주하는 그들의 행태가 애처롭기 짝이 없다.
^^조국 ‘일병’ 구하기^^
헤움이라는 마을의 헛간에 불이 났다.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헛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마땅한 화재 진압 장비도 없고, 우물물을 끌어올 호스도 없었다.
그때 정치인이 나타나 소리쳤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서둘러 새 짚을 가져와 불길을 덮는 일이오.
그렇게 하면 화마가 새 짚에 가려져서 날뛰지 못할 것이오.”
똑똑한 사람들이 손사래를 쳤지만 정치인은 듣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마른 짚을 날라다 헛간의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두꺼운 짚 더미에 가려 불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추종자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불길은 더 맹렬히 치솟았다.
정치인은 더 많은 짚을 가져오라고 독려했다.
그 정치인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추종자 중 한 사람이 그의 뒤를 이었다.
후임 정치인의 일성은 이러했다.
“마을을 구할 마지막 기회가 아직 남아 있소.
모두가 일심단결해야 합니다. 더 많은 짚을 가져오시오!”
시인 류시화가 지은 ‘인생 우화’를 읽으면서
조국 사태를 맞은 우리 사회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조국은 법무장관으로 기용된 뒤 수많은 거짓으로 국민을 우롱했다.
국민이 분노하자 정부와 여당은 조국의 불길을 덮기 위해 ‘새 짚’을 찾기 시작했다.
정년 연장안과 전·월세 대책을 잇달아 쏟아내고, 조국 자신은 ‘검사와의 대화’라는 이벤트까지 벌였다.
처음엔 효과가 있는 듯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일시 반등하더니 조국 임명에 반대하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추한 거짓이 베일을 벗으면서 분노의 불길은 더 커지고 말았다.
이런 판국에도 여권 핵심인사는
"옳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다면 무소의 뿔처럼 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독려한다.
더 많은 짚을 가져오라고 외치는 헤움 바보들과 뭐가 다른가.
여권의 조국 구하기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특공대원들이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진한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그러나 조국 ‘일병’ 구하기는 감흥은커녕 국민의 눈살만 찌푸리게 한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막장 드라마를 지켜봐야 하나.
^^물구나무 세상^^
요즘 일어나는 기묘한 현상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알다시피 이 책은 영국의 루이스 캐럴이 1865년에 발표한 동화이다.
7세 소녀 앨리스가 꿈속에서 경험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왕의 정원에 들어간 앨리스는
정원사 셋이 하얀 장미를 붉은 페인트로 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장미에다 빨간색을 칠하죠?"
"여기에는 붉은 장미를 심어야 하는데 우리가 실수로 하얀 장미나무를 심었거든요."
장미를 잘못 심었으면 그것을 붉은 장미로 바꾸어 심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에선 그렇게 하지 않고 페인트 칠을 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거짓을 진실로 분식하는 우리 지도층의 모습과 닮지 않았는가?
신비한 약을 먹은 앨리스는 몸집이 거인처럼 커지기도 하고 손마디만큼 작아지기도 했다.
그때 송충이가 물었다. "넌 누구지?" 앨리스가 대답한다.
"지금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까지는 제가 누구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후로 워낙 여러 번 변해서 이젠 내가 누구인지..."
난감한 표정의 앨리스에게서 줄곧 모르쇠로 부인한 조국 법무장관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가사처럼 조국의 변신이 너무 변화무쌍 해서
조국 자신도, 국민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이상한 나라의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야심, 정신 혼란, 비웃음, 구부려 속이기 등을 가르친다.
아름답게 꾸미는 미화(美化) 대신에 더럽게 변해가는 추화(醜化)를 교육한다.
여왕은 법정에서 판결하기 전에 선고부터 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 나라에선 모든 가치가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거꾸로이다.
다행히 주인공 앨리스는 결국 꿈에서 깨어나 현실 세계로 귀환한다.
'비정상의 세계'에서 '정상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가치가 뒤죽박죽인 '이상한 나라'로 질주하는 조국은
언제 꿈에서 깨어 정상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까?
^^콩 심은 데 콩 난다^^
논밭의 상태를 보면 농부의 품성을 알 수 있다.
농부가 땀을 흘리고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그의 논밭이 기름지고 곡식의 열매도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를 보면 십(十)자에 팔(八)자가 두 개 나온다.
농부의 손이 88번 가야 비로소 쌀이 된다는 의미이다.
쌀 한 톨을 얻기까지 농부는 땀을 일곱 근이나 흘린다는 말이 생긴 배경이다.
땀 없이 알곡을 거두려는 자들로선 도저히 납득 못할 삶의 이치이다.
사실 농사만큼 인과율이 정확히 적용되는 곳은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는 반드시 팥이 난다.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만에 하나 어떤 농부가 자신이 뿌린 것 이상의
곡식을 수확한다면 그것은 반칙이자 불공정이다.
팥을 심고서 콩을 거둔다면 우주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주 만물은 엄격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광대한 천체와 자연이 한 치 어긋남이 없이 운행되는 우주의 원리이다.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기 위해선 수성은 88일, 금성은 225일,
지구는 365일, 화성은 687일을 쉼 없이 달려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새치기를 해서 빨리 도는 반칙을 일삼는다면
우주의 질서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자연법칙이고 상식이다.
안타깝게도 그 상식을 배반하는 현상이 우리 눈앞에 일어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불의를 정의라고 우긴다.
마치 수성을 금성으로 부르는 격이다.
공자께서는 위정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명칭이나 개념을 바로세우는 '정명(正名)'을 꼽았다.
명칭이나 개념이 바르지 않으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콩을 팥으로 우기는 권력자들의 위선이 참으로 애처롭다.
우주질서를 거꾸로 돌리고 정명을 거스르는 권력의 불장난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명서방 추도문^^
오호 애재라! 이제야 그대의 참 모습을 알게 되었소.
이번 추석 차례를 지낸 후였소. “여보, 북어 좀 찢어줘요.”
아내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나는 당신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소.
아들과 함께 그대의 육신을 찢다가 그만 그대의 퀭한 눈과 마주치고 말았소.
신문지 위에 일자로 누운 그대의 주검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소.
광활한 북태평양을 누비던 그대는 틀림없이 바다의 용장이었을 것이오.
불행히도 어느 어선의 그물에 걸려 졸지에 수입 물고기로 팔려오는 신세가 되었소.
대양을 유영하던 그대의 몸뚱이는 이미 나무꼬챙이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렸소.
지느러미는 빳빳하게 굳어버렸고 고통으로 벌어진 입은 허공을 향해 묵언을 쏟아내고 있었소.
북어는 말린 명태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다고 해서
명태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그대만큼 많은 별칭을 지닌 존재는 아마 드물 것이오.
싱싱한 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마른 것은 북어라고 부르지요.
하얗게 말린 것을 백태, 검게 말린 것을 흑태, 딱딱하게 마른 것을 깡태,
덕장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해 노랗게 변한 것을 황태,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네댓 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말린 것을 코다리라고 일렀소.
성장 상태에 따라 어린 명태를 애기태, 애태, 노가리라고도 하지요.
잡는 방법에 따라 그물로 잡은 것은 망태, 낚시로 잡은 것은 조태라 하오.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가진 것을 보면 인간과 얼마나 친숙한지 알 듯하오.
예로부터 명서방 그대는 관혼상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중한 존재였소.
어린 노가리는 서민들에게 더없는 술친구이지요.
갈가리 찢어진 육신은 진한 국물이 되어 인간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었소.
진정 그대는 자기 몸을 희생해 인(仁)을 완성한 살신성어(殺身成魚)의 화신이오.
그대는 인간의 제사상에 오를 한낱 제물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그대를 제사상에 모시고 기려야 마땅할 것이오.
그대의 죽은 입은 아직 말이 없지만 귀가 열린 인간이라면
그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 하오. ‘산 입’으로
‘죽은 말’만 내뱉는 비양심들은 어찌 그것을 이해나 할 수 있겠소?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법^^
"6일까지 최대한 조국 후보자를 잘 지켜나가는 일을 하겠다.”
이해찬 여당 대표의 이 말을 듣고 아마 많은 국민들이 놀랐을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은 비리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조국(曺國)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조국(祖國) 대한민국이 아닌가? 이 대표는 “정치를 하려면 기본을 갖추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그가 정치인으로서 갖출 기본은 자신이 충성할 조국이 어디인지 깨닫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이 나온 뒤 여권 인사들이 보인 행동은 더 가관이다.
유시민, 김두관이 동양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낙연 총리와 박상기 법무장관은 수사 중인 검찰에 공격을 가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괴이한 짓이 이 땅에서 연일 벌어진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손바닥으로 하늘 대신에 자기 눈을 가리는 것이다.
일단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고 무조건 우긴다.
다른 하나는 하늘을 손바닥으로 부르고 손바닥을 하늘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뒤바뀌었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아니라 하늘로 손바닥을 가리는 모양새가 된다.
너무 쉽다. 전자가 사기꾼이 쓰는 수법이라면 후자는 요즘 집권층이 쓰는 수법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맞는 가장 큰 위기는 가치 혼란이다.
정의, 진실, 공정이라는 모든 가치가 하늘과 손바닥이 서로 바뀌듯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정의가 사라지자 불의가 정의의 옷을 입고 행세한다.
진실은 거짓의 동의어로 추락했으며, 공정과 불공정은 알고 보니 일란성 쌍둥이였다.
개천의 용(龍)은 붕어이자 개구리이자 가재였다.
용과 붕어와 개구리와 가재의 이름들이 서로 뒤섞였으니
이들 간에 불평등이 존재할 수 없다. 진정한 평등 사회가 도래했다는 찬가가 울려퍼질 만하다.
일찍이 공자는 제자 자로가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에게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냐”고 묻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명(正名)”이라고 외쳤다.
맨 먼저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는 뜻이다.
자로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형벌이 어긋나고 백성들이 몸 둘 곳이 없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가치가 전도된 세상, 이것이야말로 진짜 난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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