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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묵상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고귀한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비참으로 얼룩진 한 인간의 시선!
언젠가 한 기도 모임에서 저도 예수님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대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예수님처럼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멋지게 외치며, 그를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공이나 포스가 부족한 저였던지라 우선 큰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구마(驅魔)까지는 아니어도,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기도라도 해드려야 했었는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구마’ 그것 아무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우선 바깥으로 드러나는 그 모습에 기가 질립니다. 눈빛이며, 분위기며, 말투며, 언행이며, 마주 앉아있으면 소름이 다 끼칩니다. 머리카락이 자동으로 일어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들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측은한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의 베이스 캠프였던 카파르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극단의 사악함이 극단의 신성함 앞에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 24)
더러운 영이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 또 다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굽어보시고, 눈여겨보십니다.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청년들, 여러 가지 중독 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청소년들,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우리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더러운 영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1,21ㄴ-28
말에 힘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란 ‘영적인 권위’임을 말하기 위해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도 말에 권위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령의 도움이었습니다.
말의 권위는 그 말이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없애시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영을 이기는 권위가 아니면 말에서 좋은 권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말엔 힘이 있었을까요? 말에 표징이 얹혔기 때문입니다.
말에 힘을 주는 성령님은 또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시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에만 표징을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도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일으키는 외적인 표징들로 나의 말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모델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템플 그랜딘입니다.
그녀는 동물 과학 분야의 연구뿐만 아니라 자폐증 옹호자로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템플 그랜딘은 어린 나이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이 아이가 말도 못 할 것이고 공부도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일반 학교에 보냅니다.
그녀의 어머니 믿음대로 템플은 말도 하고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녀는 소가 압착 슈트에 안겨 있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자폐인의 과민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설계된 장치인 압착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의 움직임을 파악해 지금 북미에서 많이 사용하는 소 사육장을 설계하였습니다.
여러 책과 강연으로 그녀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 안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이 놀라움을 주지 않으면서 말씀에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습니다.
헬렌 켈러의 선생님인 설리번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지독한 어둠 속에서 실명까지 하고 독방에 오래 갇혀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어둠에서 나온 경험이 있기에 그 어둠에 있는 헬렌 켈러에게 말로써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의 유튜브 중 성체조배에 관한 것만 매우 조회수가 높습니다.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동영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체조배를 통해 저 자신과 이웃이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말에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믿지 못하면 말에서 확신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한 표징을 나 자신이 보았을 때는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에 힘이 실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실리는 그 힘을 듣는 사람은 느끼고 반응하게 됩니다.
표징과 함께하지 않는 말의 권위는 없습니다. 공부가 부모 자신들은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그 말을 잘 들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그 말이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의 삶을 변화시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내 말에도 힘이 실릴 것이고 권위도 실릴 것입니다.
표징과 함께 하지 않는 말에는 어떤 권위나 도 있을 수 없습니다.
3)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연히 옛날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35년 전의 사진입니다. 우선 지금과 달리 너무 젊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멋을 내려고 했는지 머리카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말랐습니다. 하긴 당시에는 60kg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가졌었던 생각도 떠올려졌습니다. 좋은 신부가 되겠다는 다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겠다는 마음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많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학교 공부에 힘들어했고, 열심히 공부해도 향상되지 않는 제 모습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고, 그래서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신학생 때, 실패의 경험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제가 암기 중심의 철학과 신학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좌절에 저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실패의 내용이 사진 한 장에서 쫙 펼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경험했던 그 시간이 잘못된 시간일까요? 만약 그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인지를 깨닫는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했던 저도 바꿔 쓰시는 그분의 힘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보며,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포기, 좌절의 단어를 담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사랑이 합해져서 과거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그 큰 힘에 대해 오늘 복음은 증언합니다.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25)라고 꾸짖으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권능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해서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쉽게 판단하고 스스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정호승)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새로운
가르침으로 남습니다.
가르침의 서곡이
가난한 우리 삶에
다시 울려퍼집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이필요한
우리를 향해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사랑의 가르침은
경직된 흑백 논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의미있는 삶이
무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 삶안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둠과
더러움까지
빛으로 바꾸어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어리석은
제 자신을 믿음으로
타이르고 있습니다.
가장 뜨거운
가르침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의
온 삶으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5)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권위!'
오늘 복음(마르1,21ㄴ-28)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세례축일인 어제로 성탄시기를 끝내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과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주된 활동'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이유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 놀랍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1,2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권위'는 '힘'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끄는 힘'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끄시는 공정과 정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인가?
모두 함께 잘 살고 일치되는 나라,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가?
정말로 믿는 이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매순간 '두 영(靈)', 곧 '깨끗한 영(성령)과 더러운 영(악령)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어떤 영을 따라가느냐는 문제는 '나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권위)'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우리를 생명과 부활로 인도하는 성령을 따라갑시다!
첫댓글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려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마르 1,21 ㄴ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