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송승안
호두를 굴립니다
굴곡지고 둥근 것이 손안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깰 수 없는 소리들
부딪히면서도 거슬리지 않으니 신기합니다
이번 설에는 찾아오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해외 사는 독신 아들 전화는 받았으나
지척에 사는 자식들은 전화도 문자도
손주들 사진 한 장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내 죄가 크다고 쓴 웃음을 지었고
세뱃돈 봉투는 며칠 가슴에 품고 있다가
돈은 빼서 본당 수녀님께 드리고
봉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습니다
여행 중에 휴게소에 잠깐 들르는 일행처럼
자식도 한 때 일행이었을 뿐이라며
고속도로에선 차가 너무 빨리 달린다며
일방통행이라 되돌아오기 어렵다며
기다림도 욕심인가
내 잘못 네 잘못을 따져보다가
하릴없이 호두를 돌려 봅니다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깊게 파인 내부에는 말 못할 어둠도 있겠으나
던져도 깨지지 않을 심지, 서러움의 굴곡을 다지며
모난 데 없이 여문 것이 손 안에서 구릅니다
----애지 겨울호에서
삶의 목표가 없는 생활은 맹목적이고, 삶의 목표만 있고 그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동력을 잃은 삶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이 삶의 목표와 삶의 내용을 다 잃어버린 삶이 ‘장수만세 시대’의 우리 노인들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삶의 목표와 삶의 의미, 요컨대 삶의 이유와 살아갈 권리를 다 잃어버린 삶이 송승안 시인의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주름이란 피부의 탄력이 없어지면서 생기는 잔줄이지만, 첫 번째 ‘주름진 살갗’은 생리적인 노화현상을 뜻하고, 두 번째 ‘주름진 살갗 속에 더 주름진 속살’은 우리 노인들의 노화현상 속의 근심, 즉, 그 어떤 내용도 없는 허망한 삶을 뜻한다. 호두알은 둥글고 잔주름 투성이이지만, 그 호두껍질을 까면 호두알들은 인간의 이빨처럼 길쭉하고 잔주름 투성이이지만 그 맛은 고소하기 짝이 없다. 호두알과 피부의 노화현상은 그 모양이 비슷하지만, 호두알은 아주 고소하고 맛있는 반면에, 우리 노인들의 삶의 내용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버려진 휴지조각과도 같다.
인생이란 고속도로 위의 삶과도 같이 빠른 반면, 오직 단 한 번뿐인 ‘일방통행의 길’이라 되돌릴 방법이 없다. 아들과 딸들도 “한때의 일행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새해 첫날 ‘세뱃돈 봉투’를 들고 기다렸지만, “해외에 사는 독신 아들의 전화”만 왔을 뿐, “지척에 사는 자식들은 전화”는 커녕, “손주들 사진 한 장 보내오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내 죄가 크다고 쓴 웃음을 지었고/ 세뱃돈 봉투는 며칠 가슴에 품고 있다가/ 돈은 빼서 본당 수녀님께 드리고/ 봉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던 것이다.
말세다. 오늘날의 지구촌은 인구의 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그러나 인문주의와 이 인문주의를 둘러싼 도덕과 전통과 풍습의 예의범절은 다 파탄이 나고 말았다. 오늘날의 가정과 문중의 해체와 인간과 인간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이기주의’와 ‘탐욕’을 극대화시킨 자본주의 탓이지, ‘내 잘못과 네 잘못’을 탓하고 따질 일이 아니다. 첫 번째는 ‘인간 60’이 아닌 ‘인간 100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고, 두 번째는 ‘장수만세의 풍속도’는 오직 돈만을 숭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수만세의 사회는 ‘부자유친의 드라마’를 ‘부자원수父子怨讎의 드라마’로 변모시키고, 이기주의와 탐욕의 극대화는 모두가 돈 앞에서는 그 어떤 양보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송승안 시인의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는 ‘장수만세의 시대’를 희화화한 시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이란 ‘고속도로 위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의 인생은 고속도로 위에서의 삶이고, 그 삶의 목표는 호두알 굴리기이고, 그 결과는 한때의 일행에 지나지 않는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호두알 굴리기는 그 어떤 기약도 없는 기다림이 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봉투는 우리 노인들의 최후의 삶이 된다.
자본주의 삶의 운명은 ‘장수만세의 운명’이며, 이 ‘장수만세의 운명’은 살아야 할 권리와 죽어야 할 권리를 다 빼앗긴 ‘인간이라는 짐승의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느 누구도 ‘부자원수父子怨讎의 삶’과 요양병원에 감금된 ‘인간이라는 짐승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