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50
4월4일[성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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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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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n5AZp0cHi8 (이정훈 클레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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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꽃이 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방이 온통 꽃천지입니다. 벚꽃 사잇길을 걷노라니 한 줄기 바람에 하얀 꽃비가 우수수 떨어집니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렇게 또 봄이 가는구나,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고 내 인생도 속절없이 저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꽤나 서글픈 마음이 들더군요.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지 하는 마음에 즉시 생각을 바꿔 먹었습니다.
꽃이 진다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꽃비가 내린다고 마냥 슬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꽃잎이 다 떨어지면 그 빈자리를 연둣빛 여린 이파리들이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더 푸르르고, 더 왕성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우리의 지상에서의 생명력이 다하는 날, 이 초라한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은 인생 종 치는 날, 인생 끝장나는 날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크신 자비와 사랑 안에 우리는 더 큰 생명, 더 큰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이고, 우리 모두 빛나는 모습으로 부활하고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연중 전례 시기 안에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성주간입니다. 이 주간 우리 주님께서도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비처럼 떨어지실 것입니다. 수난당하시고, 십자가형에 처해 지시고,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묻히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시겠지만, 조금만 인내하고 기다리면 가장 빛나고 화려
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31~32절)
놀랍게도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쟁취하신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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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Xj-MJ-B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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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가도 이것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상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스카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빵을 적셔 준 다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차피 사탄이 그의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그를 막아봐야 소용이 없게 되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사도가 알아듣게 “가서 날 팔아넘겨라” 하고 말씀하셨다면 다른 사도들은 살인과 폭행의 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만 지옥에 떨어지도록 놓아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것이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노예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손을 내밀 때 자신에게 그것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사탄의 편에 섰고 더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세상, 곧 지옥에 빠지게 될 때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집착하는 것 외에 가장 큰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지옥에서도 이것만 할 수 있다면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교만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유튜브에 보면 빌 와이즈라는 분이 23분간 지옥에 다녀온 뒤에 한 간증 내용이 있습니다. 지옥 간증은 수없이 많은데 이분의 간증에 신빙성이 느껴지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오류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간증하는 지옥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사실 성경에 다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빌은 그 단 1분도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아니면 모두가 지옥이었음이 믿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이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자녀 중에도 이 장소가 실제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녀가 있다.”
빌은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옥을 믿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빌은 또 물었습니다. “주님, 왜 이러한 생물들이 저를 이처럼 지독히 싫어합니까?” 주님은 그것은 그가 주님에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싫어한다. 악마는 하느님을 대항해서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단다. 악마는 하느님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그러나 악마는 하느님의 창조물에 해를 입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왜 악마가 인류를 싫어하며 속이고 지옥에 데려가고 병들게 하며 하느님의 창조물에 해를 입히기 위해 어떤 것이든지 하는 이유이다.”
빌이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때는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어마어마한 마귀들이 개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쟤들 좀 보세요! 하! 개미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넌 그들을 단지 내 이름으로 묶어서 쫓아내면 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권능의 차이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에게 권능을 주는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힘을 인정한다는 말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청하기도 합니다. 사탄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돈과 쾌락과 교만함을 섬기는 일입니다. 반대로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옥에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탄의 힘에 나의 모든 권능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빌 와이즈에 따르면 주님은 지옥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을 차단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면 주님을 찾았을 것이고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절망감. 그 절망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지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1%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 그 자체입니다. 누구도 와서 나를 도와줄 수 없는 곳입니다.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절망감이 지옥에서 경험한 가장 끔찍한 고통입니다. 즉 지옥이 끔찍한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본성에서 완전히 제외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인간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힘을 부인한 자들의 처소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이분이 저에게 그가 진짜 지옥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믿게 했습니다. 지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을 너무 믿지 않아서 기도를 청하지 않다가 결국 자신이 믿었던 사탄의 힘에만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한 번에 이 믿음이 변할 수 없고 사탄의 힘에 완전히 의지한 자는 하느님께 청할 능력을 잃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지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탄에게 힘을 실어주다보면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서 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없을까요? 사탄에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바람의 에너지를 사탄의 자비를 청하는 데 쓰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사탄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힘의 싸움입니다. 처음엔 자기에게 청하며, 그다음엔 세상에, 그리고 결국엔 사탄에게 청하며 하느님께는 청할 에너지가 남지 않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손을 떨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닌 마약상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청할 에너지가 없어 결국엔 빠져나올 수 없는 곳, 그곳이 지옥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청하는 이들은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탄을 개미처럼 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 앞에 죽음은 그저 한숨의 잠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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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가 첫 보좌신부로 있을 때 방영되었으니 어느덧 32년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이를 꼭 낳고 살아 있으라고 부탁합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남자를 애타게 바라보는 여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입맞춤을 합니다. 이 드라마는 기쁨과 희망보다는 슬픔과 절망이 많았습니다. 강자의 힘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들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이런 대사로 끝이 납니다. “그해 겨울. 지리산 이름 모를 골짜기에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내가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친구를 묻었다. 그들은 가고 난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라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무정한 세월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여명의 눈동자와 함께 시작한 저의 사제생활도 32년이 되었습니다. 보좌신부로 8년 있었고, 본당 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 8년 있었고, 해외에 8년째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8년씩 4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처럼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저는 60년대에 태어났고, 경제성장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 10위의 경제력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교회에서 사제생활을 하였습니다. 뒤를 보아도 감사할 일이고, 옆을 보아도 고마운 일이고, 2023년 4월의 뉴욕생활도 감사할 일입니다. 호사다마, 새옹지마라고 제게도 한두 번 시련과 아픔은 있었지만 돌아보면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입니다. 유행성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골절로 발목 수술을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잘 걷고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실수와 잘못이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의 32년입니다.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권위도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실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눈먼 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귀먹은 이를 치유해 주셨고, 죽은 이까지 되살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앞에는 ‘꽃길’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꽃길처럼 펼쳐졌던 예수님의 앞에 ‘가시밭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수난의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갔고,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모습인지, 뿔뿔이 도망가는 모습인지, 두려워 숨어 있는 모습인지 보면 좋겠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예수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여명의 눈동자가 되어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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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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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마다 곧바로 그것을 받아 적어서 만든 책이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곧바로 현장에서 그것을 기록해서 만든 책도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자료를 수집하고 기억을 더듬어서 정리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족했던 모습들을 감추지 않고 모두 솔직하게 기록했는데, 그것은 모든 일을 진실하게 증언하기 위해서였고, 또 잘한 일이든지 잘못한 일이든지 간에 모두 신자들에게 교훈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음서의 ‘수난기’는 사도들이 ‘부끄러워하면서 참회하는 심정’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순히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한 상태에서 지난날의 자신들의 모습들을 되돌아보면서 참회하고 반성하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과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을 사도들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지금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는 그때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또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만 보면,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당한 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쪽에서 보면,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고, ‘당한 일’이 아니라 ‘바치신 일’, 즉 ‘봉헌’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1.17-18)
<이것은 세속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 또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꼭 그렇게 했어야 했는가? 왜 그런 방식이어야 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모른다.”가 답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13)
우리가 아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일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그것도 역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어떻든 “사랑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고,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큰 법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6-27)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것은, 또 그의 배반을 예고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신 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을 주신 것은, 단순히 그가 배반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가 깨닫기를 바라셔서 하신 일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주신 ‘빵’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빵을 주셨기 때문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음을 나타내는 말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시간적인 순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빵을 받은 뒤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사랑을 주셨는데, 유다는 그 사랑을 거부하고 사탄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루카복음 22장을 보면,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탄은 이미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루카 22,3) 그래서 지금 여기서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처음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가 ‘완전히’ 사탄 쪽으로 돌아섰다는 뜻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이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작정한 일을 가리키는데, “네가 해야만 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하려는 일’은 ‘배반’입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은 ‘회개’입니다.
“어서 하여라.”라는 말씀은 빨리하라고 재촉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잘 판단해서 선택하고 행동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의 배반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입니다. 물론 사탄의 유혹이 작용했지만, ‘배반죄’는 유다 자신의 죄입니다.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는 말은, 유다가 예수님의 품에서 벗어나서, 또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세족례에도 참여했고, 성체성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사람에게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고, 성체는 절대 성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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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에 이어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3장 참조) 특별히 유다의 배신 예고(13,21ㄴ-30 참조)와 베드로의 배신 예고(13,31-33.36-38 참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성주간 화요일’이라는 전례 시기가 고려된 결과로 보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고됩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신할 제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감히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유다에게 적신 빵을 건네시는데, 이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옵니다. 유다는 사탄에 이끌려 다른 제자들과도 관계를 끊어 버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 어둠과 죄가 지배하는 ‘밤’으로 들어갑니다.(8,12 참조)
베드로의 배신 또한 예수님의 예고로 이루어집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고는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과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과도 이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게 될 이유도 저마다 달랐지만, 예고에 따른 결과도 달랐습니다. 유다는 결국 사탄의 이끌림에 예수님의 ‘배반자’가 되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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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아 신부님]
<검증되어야 할 장담>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장담은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바칠 결심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할 의지도 확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견하신 대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며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이유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난 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자 자신도 예수님처럼 잡혀가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장담했지만 정작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오자 과거의 그 용기는 온데간데없어진 것입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우리의 맹세와 장담은 실제로 여러 가지 위험과 시련 앞에서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막상 위험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느라 결심한 바와는 다르게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으로 단련되고 그래서 어떤 위협 속에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주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때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죠. 자신의 장담과 맹세를 너무 믿지 않는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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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홍일 토마스 신부님]
베드로가 말한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도 자주 하느님께 여쭙는다.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내가 물어보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는 내 마음에 답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이 아니라고, 다른 답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계속해 물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한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대개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답이 너무 어려워서 피하고 싶고, 나에게 물질적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베드로도 예수께 물어보지만 결국에는 자신 있게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한 말을 지키지 못한다.
일상에서 신앙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씩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알고 놀란다. ‘저 사람이 신앙인이었구나.’ 좋은 뜻이면 괜찮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하나가 될 때 그때 비로소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면서도 계속 물을 것이다. 당신의 뜻은 어디에 있냐고, 당신이 생각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의 신앙은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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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유철 요한보스코 신부님]
<눈높이>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이 누워 있어도 각기 다른 꿈을 꾼다는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각기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이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스승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에게까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마태오 복음 13장 38절)이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눈높이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깨닫고 알아듣기를 바라십니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비유와 가르침을 수없이 반복하십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습을 닮은 존재’(창세기 1장 26절 참조)로 만드셨습니다. 즉 신의 모습이 우리 인간들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존중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나 가축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 때 심어주신 당신의 모습이 상처입지 않도록 내 속의 굳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는 생활에 노력을 기울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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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해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음이 넓어야 좁은 이를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빼앗기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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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손주를 돌보는 어느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제 손주가 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요.”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갓난아기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갓난아기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지자체에서 출산지원금, 육아지원금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액수도 생각보다 상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최저라는 사실이 이상했습니다.
그 뒤, 젊은 부부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이 부분에 관해 물었습니다. 국가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도 왜 아기를 갖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런 현금성 지원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을 해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출산 이후 육아에 힘을 쏟으면서 직장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출산 휴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데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면 나중에 경력 단절로 재취업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자녀를 키우는데 예전과 달리 많은 교육이 필요한데, 직장까지 잃게 되면 모두 불행해질 것 같아서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잘 몰랐음을 인정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애를 낳고 키운 적도 없기에 그냥 간단하게만 생각했었습니다. 잘 모르면서도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면서 부부들에게 그 탓을 돌렸던 것입니다. 인구 절벽을 만든 것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책임일 텐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당사자 탓을 하면 안 되었습니다.
‘남 탓’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였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착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상황에 놓이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붙잡혀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모두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누가 당신을 팔아넘길 줄도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말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들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팔아넘기는 것이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만이 아닌 수십 번을 말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자신을 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남 탓이 아닌, 자신이 지금 실천해야 할 주님의 뜻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아픔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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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가운데 한 사람>
요한 13,21ㄴ-33.36-38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기에 앞서
그 사람 있음에
함께 아파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벗들이 그 사람 아닌지
의심하기에 앞서
내가 그 사람 아닌지
먼저 살피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내가 그 사람 아닐지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고
그 한 사람의 몫까지
기꺼이 품는 겁니다
다시금 우리를 이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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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배반의 차이, 믿어주실 거라고 믿는 나인가?>
주님께서는 오늘 심란하십니다. 그리고 심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 죽음 때문에 심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때문일 것이고 배반 때문일 겁니다.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돌아가시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고 세 차례나 예고하셨던 바지만 당신 죽음에 제자들도 휩쓸려 배반하게 되어 심란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배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적극적 배반과 소극적 배신의 차이입니다.
배반과 배신은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배반이 한편이었다가 다른 편이 되는 일반적인 의미라면 배신은 배반 중에서도 믿었던 사람이 배반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적극적인 배반이고 주님의 죽음에 적극 가담한 것이긴 하지만 주님의 믿음을 기준으로 보면 베드로의 배신에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유다보다 베드로를 더 믿으셨다고 하면 베드로가 비록 주님의 죽음에 직접 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믿음이 배신당한 것이기에 더 마음 아프셨고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믿었던 너마저!’라는 말이 딱 이 경우지요. 그래서 여기서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나는 베드로일까 유다일까? 나는 주님께서 유다처럼 당신 믿음에서 아예 제쳐놓은 자인가? 그래도 베드로처럼 믿을만한 놈이라고 쳐주시는 존재인가?
나는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고 믿는가,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은 존재라고 믿는가?
당신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았다면 저는 실망할 것이고 당신 사랑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껴져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수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믿어주실 것이고 다시 믿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다시 안 믿어주실 거라고 믿고, 주님 사랑에서 영원히 배제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유다처럼 절망하여 자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수없이 배신해도 주님은 나를 믿어주실 거라고, 베드로처럼 언젠가 당신께 돌아올 것을 믿어주실 거라고 믿어야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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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님>
-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 -
“서로 사랑하여라”
지난 주일 오후 입원중인 분에게 병자성사를 드리려 외출했고 방문명단에 기재했습니다. 환자와의 관계란에 저는 지인知人이라 쓰니 담당 간호사가 친구親舊로 바꿨고 즉시 감탄했고 공감했습니다. 진작 친구라 썼으면 좋았을 것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입원해 계셨다면 저는 지체없이 관계란에 친구라 기재했을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라는 개신교 어린이 성가가 좋아 나눕니다. 검색하다 은총처럼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해 어디서나 어느 때나 나와 함께 해 저기 우주보다 더 넓게 푸른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다 말씀하시네. 내게 힘주시네.”
요즘 제가 부쩍 자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마디는 예수님은 나의 절친이란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가 예수님의 절친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의 친구이듯 믿는 이들 모두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2-14)
새삼 제 작은 사랑이 부끄러워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님 -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 -”로 정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곤궁중에 있는 모습이 제1독서의 이사야서 둘째 “주님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처지와 참 흡사합니다. 그대로 우리 친구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듯 하며, 새삼 우리의 신원도 이렇겠구나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예수님은 분명 이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참 이스라엘로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원도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답답하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고, 주님의 영광을 발하는 예수님의 친구로서 자신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분을 새롭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이 얼마나 곤궁한 처지인지 잘 드러납니다. 참 마음의 기복이 변화무쌍하지만 곧장 자신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붙잡고 분연奮然히 일어납니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이 이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
오늘 복음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 베드로의 배반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배신자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합니다. 당신의 측근 제자들중 하나인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의 심중도 그대로 밤처럼 어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중에 환한 빛으로 자신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새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자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속에서 찾아 낸 영광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문득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자주 되뇌어 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하느님 그대의 영광이듯 그대 하느님의 영광이어라.”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고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유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뒤따르지만 예수님은 세 번이나 그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배신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를 부단한 회개에로 이끄는 우리의 삶에 평생 반면교사가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파멸을 자초했고 베드로는 처절한 회개로 주님의 으뜸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어둡고 착잡했을 것이나 흔들림없이 영광의 빛과 힘으로 어둠을 통과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가 평생 배우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생략된 주님의 유언같은 새계명입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와 베드로의 배반 예고 사이, 참 절묘한 자리에 위치해 있는 주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이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너희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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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21.38)
<두 배신!>
성주간 셋째 날인 오늘 복음(요한13,21-33.36-38)은 '두 제자의 배신, 곧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유다 이스카리옷과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신임받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재정을 담당했고, 베드로는 으뜸 제자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21,31)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 영광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으니,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이요, 예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13,33.36)
돌아가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붙잡히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큰 소리쳤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다고 예수님처럼 순교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예수님의 마음과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의 배신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배신 행위들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한번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 배신들을 떠올려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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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B8_MmP9-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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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사람의 아들을
배신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팔아 넘기고
하느님마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집어삼킨
아프고 아픈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맹세도
무엇 하나
지킬 수
없습니다.
너무 쉽게
망각하고
너무 자주
파기하는
배신의 일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우리의 배신이
사랑받아야 할
예수님을
찌릅니다.
배신의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아프게도
따뜻하십니다.
하느님을 팔아
욕망을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용서의 외상장부가
새벽 닭의
울음소리처럼
아프게 우리를
찌릅니다.
아무리
팔고 사는 것에
익숙한
자본주의이지만
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홀로 이 긴 시간을
건너가십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사랑해야 할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도하며
사랑하는
성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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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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