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임병식 | 날짜 : 18-03-10 05:08 조회 : 601 |
| | | 예전 고향의 장례(葬禮) 풍속
임병식 /林秉植 rbs1144@hanmail.net
폐교가 된 고향 모교의 동문들이 만들어 놓은 카페에 들어갔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화합의 잔치를 치르고 올린사진 가운데에 한 괴기스런 모습을 한 낯선 중년이 있어서였다. 내가 모르는 얼굴인데 그는 새마을 로고가 박힌 챙 달린 모자에 허름한 잠바를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길이 가는 것은 그 입성보다는 모자 속에 감춰진 봉두난발한 머리와 수염이었다.
사진에 달린 설명을 보니 동문 후배 아무개인데 이태 전에 모친상을 치르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중에, 잠시 상복(喪服)을 벗고 동문모임에 나왔다는 것이다. 옛날 습속대로 전통을 지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것도 신기하고 더구나, 단 한 차례 턱수염을 깎지 않아 보이는 것도 시선을 잡았다.
아마도 시묘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죽 길러온 것 같았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과 얼굴의 구레나룻, 그리고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보자니 이 모습이야 말로 춘향가 사설에 나오는 ‘쑥대머리’와 ‘귀신형용’에 진배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예전의 고향 장례풍속을 떠올렸다. 물론 내가 보고 자란 5,60년대에도 무덤 옆에 움막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그 밖의 고유한 장례습속은 온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풍속으로 기억에 인상 깊이 남아있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문밖에 내놓던 사자밥(使者-)이다. 짚으로 삼은 세 컬레의 신발과 함께 메를 지어 놓는데 이는 망자를 인도할 세 명의 사자 몫이었다. 그 사자들이 명부시왕인 심판관에게 데려간다고 믿어서 배불리 먹고 잘 보살펴 달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의식을 치른다. 먼저 숨을 거두면 가족과 친족들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망자가 입던 옷을 마당에 가지고 나온다. 그런 후에 북쪽을 향해 그것을 들어올려서 세 번 외친다.
"죽림마을 아무개 복이요!"
이렇게 고복(皐復)을 한 후에 옷가지를 지붕 위로 던져 놓는다. 이는 죽음을 하늘에 고하는 동시에 동네사람들에게 알리는 의식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상이 났음을 알아차린다. 이후로는 망자의 시신이 경직되기 전에 씻기고 나서 코와 귀를 틀어막고는 입에다 쌀을 한 수저 떠 넣는다. 그러고 나서 수의를 입히고 염습(殮襲)을 마친다.
장례는 통상 3일장을 치렀다. 이보다 길게 하는 때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3일안에 상여 제작과 목관(木棺)을 짜는 일을 마쳤다. 관은 못질을 하지 않으며 장식은 되도록 화려하게 꾸몄다. 구름장식과 불사조 장식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하늘로 인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발인(發靷)시 새끼줄에 거는 노잣돈은 상두꾼의 몫이다. 이를 받아내려고 상두는 구슬프게 격정의 사설을 토해냈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북망이구나.’ 그러면 뒤따르는 상주와 상제의 곡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상여 맨 앞에는 명정(銘旌)이 나서고 다음으로는 만장(輓章)과 고인의 위패가 모셔진 의자가 뒤따른다. 이는 망자의 저승길을 상징하고 모신 위패를 다시 돌아와서 영우(靈宇)에 모셔진다.
점혈(點穴)은 패철을 든 지관에 의해 잡히고, 묘를 성분한 후에는 산신제를 지낸다. 무덤에서 몇 발짝 위에서 행해지는데 이는 묻힌 망자를 잘 보살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향에서는 이웃집에 상(喪)이 나면 일손을 멈추고 슬픔을 같이 했다. 출상할 때까지 음주가무를 삼가고 바느질조차도 멈추었다. 그 금기 속에는 유족과 함께 슬픔을 같이한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담겼다.
한데 지금은 그런 장례풍속은 많이 사라졌다. 바쁜 세상살이를 하다 어쩔수 없이 편의를 좆는 결과이다. 그런데도 후배는 아직도 옛 법도에 따라 삼년 시묘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예상컨대 이 시대에 그런 옛 풍속의 실천은 아마도 후배가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까 한다. 이제는 제대로 된 상여소리를 하는 상두꾼도 만나기 어려운 데다 상여 매는 구인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진즉부터 운구는 차량이, 비탈길은 포클레인이 동원되는 실정인 것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후배의 모습을 대하자니 새삼 옛날의 장례풍속이 아련하게 떠오르며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그걸 그려보면서 생각했다. 선인들이 대부분이 선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정성이 깃든 장례의식으로 하여 업경대가 놓인 명부시왕으로부터 작은 허물은 용서를 받지 않았을까 하고. 그 절차가 자못 진지하면서 정성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17)
2018년 에세이21 발표 |
| 양순태 | 18-03-10 06:45 | | 어릴적 동구밖을 나서는 행여의 처량함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현시점에서는 티비 문학관을 감상하는 듯도 합니다 생전에 작은 허물이라도 정성어린 장례의식으로 용서를 구하는 후손들의 마음이란 글귀가 깊이 새겨집니다 애써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 |
| | 임병식 | 18-03-10 07:22 | | 고향후배의 시묘살이 사진을 접하고 옛날 장례 모습이 생각나서 써보았습니다. 사라져 가는 풍속을 재현해 놓은다는 생각도 함께 담아 보았습니다. 읽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김권섭 | 18-03-10 06:57 | | ‘구름 장식, 불사조 장식, 영우, 점혈, 하늘 인도, 업경대, 명부시왕’ 하면 옛날 장례가 떠올랐는데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 정보사회에 이르러 제 4차 산업 사회가 도래하고 보니 아주 옛날 풍습처럼 떠오릅니다. 이 시대에 ‘시묘 살이’를 하는 후배가 있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효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효자의 부모는 살아생전에 효도를 많이 받았을 터인데 참으로 복 있는 집안의 얘기, 아름답게 꽃피는 봄날의 꽃 동산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의 풍속 '고향의 장례' 이제 사라져 가니 애달다 어찌하리오. ㅋㅋ | |
| | 임병식 | 18-03-10 07:26 | | 아마도 시묘살이는 고향 후배의 모습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하나의 사료로서 담아놓고 싶었습니다. 예로부터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고 했는데 피와 육을 물러받은 자식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현대는 너넘없이 바쁘게 사니 시묘살이 실천은 참으로 어렵고 그래서 그런 광경은 신기하기 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 |
| | 강승택 | 18-03-10 11:56 | | 임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히 묻어납니다. 농경 사회에 있었던 옛풍습들이 어쩌면 비과학적인 면도 있었다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오히려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신기한 것은 옛 장묘문화에 대한 임선생님의 해박함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 | 임병식 | 18-03-10 12:31 | |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옛날처럼 그런 장례를 치르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한마을에 초상이 나면 고기도 먹지 않고 바늘질도 하지 않는등 고인을 떠나보내는 의식이 숭고했습니다. 이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지인에 대한 에의가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 |
| | 임재문 | 18-03-11 03:52 | | 임병식 선생님 ! 저도 시골에서 나서 자라 꽃상여와 만가 그리고 부음을 받고 달려온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됩니다. 팔십세 넘게 사시다가 가신 장인어른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꽃상여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처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다 그렇게 가셨지요. 꽃상여에 사위를 태우고 노자돈을 내라던 신혼때의 그시절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임병식 선생님 ! | |
| | 임병식 | 18-03-11 04:45 | |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장례풍속을 후세에 알리려는 뜻으로 썼습니다. 옛날에는 낯익게 보던 풍속이었는데 지금은 편리를 좇다보니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시묘살이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지요. | |
| | 이방주 | 18-03-11 07:31 | | 선생님 예전에 우리나라 설화 가운데 <고려장이 사라진 내력>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자칫 우리나라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부모가 늙으면 산에 버린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 이야기는 결국 그래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부모가 죽을 병에 걸리면 요양원으로 보내는데 함께 문학 활동을 하다가 연세가 들어서 요양원에 가 계신 문인들을 가끔 찾아 뵈면 마치 고려장에 가 계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묘살이를 하는 그 분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고 그런 모습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신 선생님께서도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사라져 아쉬운 우리 전통입니다. | |
| | 임병식 | 18-03-11 10:42 | | 고려장 이야기는 어려서 많이 들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군요.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지극히 일부일 것이며 대다수는 끝가지 모시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야 세상이 삭막하지 않겠습니까. | |
| | 일만성철용 | 18-03-11 07:51 | | 그 모습의 사진 한 장을 올렸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입니다. 쓰신 글은 잊혀가는 미풍양속이 길이 기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 |
| | 임병식 | 18-03-11 10:43 | | 일만선생님 반갑습니다. 사진을 올릴수도 잇지만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저어되는군요. | |
| | 이승애 | 18-03-16 23:13 | | 시묘살이를 하시는 그분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시묘살이 하는 분을 소개해주었는데 가슴이 흠뻑 젖었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중한 것을 점점 잃어가는 우리 현시대가 아프게 느껴집니다. | |
| | 임병식 | 18-03-17 05:27 | | 이승애선생님 반갑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한것을 느끼게 됩니다. 옛날처럼 따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마음은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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