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명문화 되기 수백년 전에 그는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왜 하느님게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두 사람이 좋아서 간음을 저질렀다면, 오늘날의 경우는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는 것이 첫째는 마음에 없던 일이었고, 즉 그는 무트(보디발의 아내)를 여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트는ㅡ추측이지만ㅡ 보디발의 아내로써 자기보다 훨씬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보디발 집안의 관리인으로써 정직하게 관리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보디발의 재산인 그의 아내를 손대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양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자기의 손 안에서 어느 정도 재물을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정직하고 성실하면서도 관리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보디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그의 이러한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은 첫째로 자기 양심이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하느님께 득죄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께ㅡ물론 여호와라는 고유명사가 알려지기 전이었지만ㅡ 득죄한다는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득죄한다는 표현에도 유의해야 한다. 하느님은 인류의 보편적 신을 의미한다. 즉, 그의 양심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을 하느님께 죄를 짓는다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이다. 양심이란 표현도 사실상 종교적 표현이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지시하는 바 대로 살지 않을 때 흔히 사용하는 워치타워식 표현이다. 요셉은 정직과 성실성으로 처신했기 때문에 '신뢰와 고난'을 동시에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정직과 성실이 가져다 주는 유익이 고난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성서는 요셉의 총리됨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정직과 성실성이 있다고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이 결국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그의 인생 내에 이루어졌음을 설명했을 뿐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성실했다 하더라도 죽음을 당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더 큰 승리를 위해 작은 승리가 그 아래 묻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선의 패배가 아니라 영구적 승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선의 힘을 의심하는 자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자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이성의 지시대로 살기 때문에 충동적 감정에 굴복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이 나쁘다고 비난하며 그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요셉의 인생의 굴곡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이지만 그 교훈은 우리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아니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