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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난주에는 명동에서 했던 피정이 수요일 금요일에 나갔고, 주일에는 주일 강론이 나갔기에 성서 강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지난번에 끝났고, 이번에는 ‘시편과 다윗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말이 기억납니다.
‘청년 시절에 자기가 경애하는 특정 시인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시(詩)는 사람의 마음을 길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은 어린 시절부터 죽음이 올 때까지 입술에 시를 가진 행복한 백성들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크리스천들도 애송할 수 있는 시편을 성경 안에 가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대개 그 사람의 신앙과 그가 애송하는 시편은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이 애송하는 시편은 그 사람 영(靈)의 양분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편을 좋아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 성장에 많은 양분을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제들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또 사제로 긴 세월을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사제들이 바치는 성무일도 대부분은 바로 시편입니다.
사제들은 한평생을 하루에 세 번 시편을 읽습니다, 아니 읊조립니다.
성무일도는 1~2년 전에 만들어진 사제들의 의무가 아니라,
아주 오랜 시절 신학교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신학생들은 성무일도를 하면서 시편을 낭송했습니다.
좀 전에 얘기해 드렸듯이, 그 사람이 어떤 시편을 많이 읽느냐에 따라서, 어떤 영적 양분이 시편을 통해 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정말 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편은 23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시편이죠. 23편은 ‘다윗의 노래’라고 나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저도 이 시편을 어려움 중에 있을 때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4절에 보면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제가 피정 때 ‘나는 살면서 평탄하게 살아본 해가 단 한 해도 없다.
산전, 수전, 지상전, 공중전, 화생방전까지 겪었다’라고 좀 우스개처럼 얘기합니다만,
사실 제 삶을 뒤돌아보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전신 마취한 상태에서 수술대 위에 오른 적도 많았습니다.
군종 신부 시절에 지프차가 굴러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은 적도 있었죠.
지프차가 구를 때 눈 속에서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 이제 서른 조금 넘었는데.’
그때 중환자실에서 시편 23편을 아마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습니다.
또 배티에 있을 2015년 10월 1일, 바이크 타고 연풍성지로 가던 길에 갑자기 뛰어드는 차에 15m 이상을 밀려 나가며
길가의 안내판 기둥과 부딪혀 갈비 8대가 부러졌습니다.
다행히 부러진 갈비가 폐를 찌르지 않고 심장을 찌르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났죠.
그렇지만 갈비가 세 동강이 날 정도로 정말 몸뚱어리는 엉망진창 됐었습니다.
숨을 쉴 수도 없었고요.
갈비 부러져 본 분은 알겠지만, 한 대만 부러져도 기침도 말도 할 수 없게 통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다섯 대, 앞에 세 대가 부러졌으니!
게다가 이 갈비는 수술할 수가 없죠, 저절로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거의 반년 동안 침대에 눕지 못하고, 또 소파에서 등을 기댈 수도 없었죠,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긴 밤을 지새울 때마다 시편을 읽었습니다.
특히 23편을 읽었습니다.
또 감곡에 있을 때는 맹장 옆에 있는 동맥이 터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 갔죠.
피도 많이 흘리고 그때도 큰 수술을 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 너무너무 아파서 이렇게 아픈 바에는
차라리 주님께서 그냥 바로 데려가시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괴로웠고 또 그 후유증도 상당히 컸었습니다.
아무튼 그럴 때마다 자동으로 제 입에서 나왔던, 통증에 몸부림치면서 힘들어할 때, 진통제조차도 안 들었을 때,
저 혼자서 수도 없이 중얼거렸던 것이, 신학교에서부터 하도 많이 낭송해서 저절로 나오는 시편이 23편 4절,
바로 ‘내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 내 곁에 계시오니 저는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죽음을 가까이에서 제가 느낀 적은 많습니다.
사고도 많았고, 또 너무너무 사제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 그야말로 죽음의 골짜기를 거니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죠.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짜내는 기도보다는, 그냥 ‘주님은 제 마음 아실 겁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실 겁니다.’하며
시편을 읽었던 것이 지금 시편 강의를 하면서 떠오릅니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격려를 받았던 것이 생각나지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시가 괴로워하는 이들, 슬픈 이들, 앓는 이와 함께 있었음을 상상할 때
더욱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편은 전부 15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약 반수의 73편이 다윗의 시입니다.
그 외에는 모세, 솔로몬, 아삽 등 몇 사람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는 제목들이 아주 다양하게 나와 있죠.
예를 들어서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달아날 때 지은 시’ 그런 제목도 있고요.
‘다윗의 기도’라는 제목도 있고,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 미친체하다 쫓겨나서 지은 시’ 등등 표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무일도를 하면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편 중 하나는 시편 51편입니다.
제목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찾아왔을 때 지은 시’
이렇게 제목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51편이 제목이 그렇게 깁니다.
이 제목만 보아도 구약 성경을 읽은 사람은 어떤 일이었는지 알 수 있지만,
읽지 않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제목이 길고, 밧세바와 정을 통했다는 게 뭔 얘기인가 하며 의아스러울 겁니다.
시편을 읽기 전에 적어도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는 읽어야 합니다.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작품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시편을 읽으려면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뭐라고요?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
이 세 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바로 시편에 함축이 되어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반드시, 시편을 읽으려면 이 세 개를 먼저 읽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읽으실 거라 저는 믿지만, 저도 대충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다윗에 관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 대대로 내려오며 민족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왕이지만,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왕이기도 합니다.
우선 ‘다윗’은 신약성경의 마태오 복음 제1장 긴 족보에 나오는데요.
1장 6절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같은 마태오 복음 1장 20절에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주님의 천사가 요셉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신약 성서 1장 안에 이미 다윗의 이름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 밖에 마태오 복음 9장 27절에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나옵니다.
21장 9절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나옵니다.
또 마태오 복음 22장 42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아무튼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만 살펴보아도 다윗의 이름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다윗’이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유대인들이 다윗이라고 하는 말을 썼을 때는 어떤 무게를 가지고 사용했던 것인가?
한마디로 다윗이라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융성하게 만든 왕에 대한 존경과 함께,
또 다윗의 입을 통해서 바쳐진 수많은 시로 신앙을 표현했던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가득 담겨 있는 왕으로 생각하면서
‘다윗’이라는 말을 썼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 최상의 존칭은 아무한테나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이름이 ‘다윗’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몇백 년 후인 예수님에게도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이라 불렀던 거죠.
더 이상의 극존칭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는 것에 이의제기한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지 단순하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 멈출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확실하게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많은 문제성을 가진 사람인 것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이름을 면류관으로 씌워드릴 만큼 거룩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는 왜 이 다윗의 명칭이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지 이상스럽게 생각도 됩니다.
이 정도로 칭찬받고 존경받을 만한 왕이었을까?
글쎄요.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해 별로 유쾌하지 않게 받아들이셨던 것이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다윗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입니다.
첫 번째 왕은 사울입니다.
사울이 왕위에 있을 때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성서에 다윗은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 수금을 탈 줄 알고 무형과 언변이 있는 준수한 아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야훼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더라.’
이렇게 기록된 대로 확실히 다윗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로 어린 시절부터 나옵니다.
사울 왕이 불레셋인(필리스티아인)과 싸우고 있을 때, 적진에는 골리앗이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상당한 거인이었고, ‘불레셋인 골리앗’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용맹한 장군이었습니다.
이 골리앗은 사울 군을 향해 제안합니다.
‘우리 떼로 싸우지 말고 아주 그냥 화끈하게 일대일로 붙어보자.’
만일에 자기를 죽이면 불레셋인은 사울의 종이 될 것이고,
또 자기가 상대편을 죽이면 사울군은 불레셋인의 종이 되겠다는 조건을 걸고 일대일 싸움을 청합니다.
이런 싸움 조건에 유대 장수들은 아무도 나서질 않습니다.
나서봐야 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죠.
키가 거의 2m가 넘는 장수 앞에 누가 선뜻 나서겠습니까?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맹장 중의 맹장이 바로 골리앗이었기 때문에 자진해서 그런 싸움에 응하는 자가 없었던 겁니다.
이때 다윗은 산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지만, 부친의 분부로 형들을 위문하러 싸움터로 갑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그런 조건으로 일대일 싸움을 걸어왔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두려워해 그의 도전장을 받아들이는 군인이 없다는 것도 듣습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이 어린 미소년은 이렇게 얘기하죠.
‘할례도 안 받은 불레셋 사람들이 도대체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소년 다윗은 용감하게 골리앗에게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겁도 없이 골리앗에게 자신만만하게 나아갔던 다윗은 경험이 있죠.
무슨 경험?
목동으로 양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와 곰과 여러 번 싸운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는데, 나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분명히 건져내실 것이다.’
이런 배짱을 갖고 골리앗에게 싸우러 다가갑니다.
이 어린 소년 다윗은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기 군복을 입히고, 놋으로 된 투구를 머리에 씌우고, 자기 갑옷을 입혔지만,
갑옷은 맞지도 않고 어른 것을 입었기 때문에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다 벗고 오로지 손에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과 맞섭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군의 대표로 나온 장군을 보니까, 이건 장군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자기 키의 3분의 1도 안 되는
조그마한 아이가 나오니, 골리앗은 얼마나 조소하고 모욕했겠습니까?
골리앗은 다윗을 심하게 업신여겼지만, 다윗은 단 한 개의 돌을 돌팔매질해서 이마에 맞춥니다.
돌 하나에 이마가 깨질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하여 날아가, 골리앗은 그 돌을 맞고 힘없이 땅 위에 거꾸러집니다.
어린아이가 힘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다윗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손에서 떠난 돌은 가면서 성령의 불로 바뀐 겁니다.
성령의 불이 골리앗의 머리통을 부숴버린 겁니다.
바로 이 사건은 다윗의 신앙 고백이었던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다윗의 주머니 안에 있던 5개의 돌에 대해서,
이 환난의 시대에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 영적 무기인지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여러분께 이야기한, 시편 읽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책 3권 부지런히 읽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김웅열 신부님 강론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