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윌리암 베어드 (William M. Baird, 배위량)선교사
울산을 최초로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윌리암 베어드 (William M. Baird, 배위량)선교사였다.
1891년 2월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로 입국한
그는 선교사역 초기 4년을 부산에 거주하며 경상도 일대 순회전도를 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에 크게 3번의 순회전도를 다녔다.
베어드의 순회전도
첫 번째 순회전도는 1892년 5월 18일에 시작하여 한 달 정도
김해, 창원, 마산, 진해, 고성, 통영지방까지 답사 형태로 경상도 서부지역을 주로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두 번째 순회전도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주로 경상도 북부지역을 순회하였다. 이때 지나간 지역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부산 동래를 거쳐 양산읍, 물금, 밀양, 청도, 대구, 칠곡, 성주, 상주, 풍상, 안동, 영천, 의성, 경주 그리고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바로 이 2차 순회전도 여행 때 베어드 선교사가 울산을 거쳐 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울산 지역의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병영교회인데,
그 설립연도가 1895년 1월 8일이다. 그런데 베어드 선교사가 울산을 다녀간 때가 1893년 5월 18일이니, 선교사가 다녀간 지 1년 4개월 만에, 교회가 시작이 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몇몇 선교사들이 울산에 찾아왔기 때문에,
병영교회가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첫 번째 울산의 발걸음은 울산지역으로 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가 된다.
이는 그후에 병영교회를 세운 이희대도 '병영교회 90년사' 에 보면,
자신에게 큰 병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약으로도 못 고치고 있던 차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기도해주면 잘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서, 마침 장날에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어 집에 데리고 와서는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으니
선교사들의 헌신이 큰 역사를 이뤄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부지런히 순회전도를 한 덕분에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의 울산방문 이후에, 아담슨(Adamson Andrew)선교사를 비롯한
호주 선교사들이 울산을 다녀갔는데, 특히 호주 여선교사들이 자주 방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울산 선교가 이루어진다. 첫 시작이 베어드 선교사였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들은 매우 부지런히 전도를 하였다.
순회전도, 사랑방 전도 등이 그들의 주요 선교전략이었다.
실로 그들을 통해 '전도는 부지런히 하는 것' 이라는 교훈을 깨닫는다.
1. 개요
윌리엄 마튼 베어드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로
구한말 조선 평양에 현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의 모태가 되는
숭실학당을 설립한 설립자이다.
2. 한국에 오기 전
윌리엄 마튼 베어드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주 클라크군의 찰스타운(Charlestown)에서
출생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주한 언약도의 후손으로
스코틀랜드 교회 집안에서 자라났다.
윌리엄 베어드의 조부인 존 베어드는 1810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도미한 후
테네시주, 오하이오주, 켄터키주를 전전하다가
인디애나주 클라크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베어드의 아버지인 존 마튼 베어드는 정착한 클라크군에서 가업으로 삼은
방직업에 종사하였다. 베어드 가족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그로 인해 인디애나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베어드는 어머니 낸시 패리스 베어드에게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 낸시는 아들 윌리엄에게 엄격한 개혁교회 전통으로 양육하며
윌리엄의 부모 모두 자녀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못해 카운티의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 이외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다.
윌리엄 베어드는 그의 형 존 베어드가 마련하는 학비로 하노버 대학교를 다녔고
매코믹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윌리엄 베어드는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콜로라도 델노트(Del Norte)에 있는 소형 교회에 목회를 시작하였다.
동시에 멕시코 청년 대상의 미션스쿨인 델노트 대학의 학장을 맡기도 했다.
경제적 이유로 해외 선교 사역에 바로 가지 못했다.
연세대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형이자 타자기 회사 사장인 존 언더우드가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봉급 지급을 제안한다는 소식을
새뮤얼 오스틴 모펫 선교사가 듣고 장로회 선교본부와 베어드에게 편지를 썼고,
선교본부가 베어드를 조선의 선교사로 지명하였다.
베어드는 자신이 있던 델 노트르 대학 학장을 그만두고,
하노버 대학의 동기였던 애니 로리 애덤스와 결혼함과 동시에 조선행에 올랐다.
이로써 베어드는 한국과의 연이 시작되었다.
3. 조선에 온 후
부산항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는
조선선교부에서 첫 선교지로 부산을 결정받으며 조선어를 배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베어드는 하디 선교사의 집에서 지내면서 허드 영국 영사의 도움으로
선교부 건물 부지를 구입하였다.
부산선교지부를 설립하고 순회전도여행, 사랑방 서당, 크리스토교 서적 번역,
대구 선교부 설립, 초량교회 설립 등을 하며 사역을 진행하였다.
조선선교부는 베어드를 교육고문으로 임명하였고 서울로 다시 이주하였다.
4. 숭실학당 설립
베어드는 <우리의 교육정책> 를 입안하였고 베어드의 정책은
조선선교부의 교육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이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1897년 평양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평양은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지역이었다. 평양의 늘어나는 초등학교 졸업생과, 평양에서 급격하게 늘고있는 교회들을 이끌 지도자의 중등교육이 필요함에 따라 평양선교부는 베어드의 중등교육반 운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아무것도 없이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시작한
중등교육반은 숭실학당의 시작이었다.
숭실학당은 성서, 지리 산수, 역사 등을 가르치며,
평양의 선교활동 성공과 초등학교의 성장과 더불어 재적 인원이 증가하였다.
베어드는 선교부의 지원금과 스왈렌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였다.
베어드는 숭실학당의 교육언어를 조선어로 채택하며 미국 중등교육 교과서를
조선의 실상에 맞게 번역하고 출판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며 교파가 연합하는 방향으로 선교가 시작되면서 베어드는 감리회와 연합으로 1906년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 合成崇實大學)을 설립하였다.
5. 문서 번역
베어드는 대학 문제로 인해 숭실대학 교장을 1916년 사임하였다.
이후 기독교서회 편집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주일학교 교재와 성서 번역 등을 하는 문서 사역에 집중했다.
이후 1931년 장티푸스에 걸려 69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6. 평가
베어드는 상대적으로 독립운동보다 크리스토교 교육 선교에 집중한 선교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운동과 무관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북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이었던 평양 숭실학교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것을 보면,
베어드 선교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통해 독립 운동의 기반이 형성되도록 기여한
인물이 틀림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베어드 선교사가 강조한 조선어 교육에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이 고안한 <Our Educational Policy>를 통해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세운 숭실학교에서도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시행했다.
이러한 베어드의 교육 기조가 숭실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 자주 독립 사상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숭실 학생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또한 머펫, 스왈렌, 매큔, 언더우드 선교사 등 과 더불어 105인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일제 당국이 민족운동의 배후라고 연관지을만큼 주시했던
선교사들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을 위해 근대화 교육을 보급한 인물이자 독립운동가 배출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