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정다운 스님의 遷度 중에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출발지를 댈 것이다.
그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자신의 주소나 원적지를 말할 것이다.
또다시 그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선뜻 입을 열 수가 없다.
부모의 뱃속인가?
본래 없는데 인연 따라 사유하는 헛짓인가?
여기서부터 사량분별심이 필요해진다.
각자 자신의 사유한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
윤회를 한다든지 창조주가 보내서 왔다든지 본래 없다든지,
뭐라고 말하던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답변이다.
설령 그럴싸한 답변을 했더라도 다시 물으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럼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목적지를 댈 것이지만
죽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
윤회를 한다든지 구원을 받는다든지
갈 곳이 없다든지 본래 오고감이 아니라든지,
뭐라고 답변해도 솔직히 자신도 모르는 답변일 뿐이다.
실제로 자기의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온 곳도 갈 곳도 알게 아닌가?
자신의 실체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오고감에 대해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듣고 배워 아는 지식을 아무리 동원한들 자신이 실제로 모르는데,
정답인지 오답인지도 모르고 입을 연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다.
자신을 탐구하고 진리를 터득하려는 진실함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가진 것을 다 버렸다.
명예도 사랑도 지식도 심지어는 생명마저 내놓았다.
석가모니는 다 비웠다.
원망도 한도 덜어내고 모든 평선을 뛰어넘어 빈 마음으로 앉았다.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
내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혹뿐이었다.
나는 무상무아인 우주의 소산이니 참나가 아니요,
온갖 지성과 감성과 연기에 의해 일고 멸하니 또한 내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몸뚱이를 받아들기 이전의 나는 무엇이었으며,
중생의 옷을 벗어던지고 떠날 나는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다 버리고 다 비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 좌정하여 삼매에 들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한 생(生)이다.
이미 일어난 생각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여섯 문을 열고 온갖 것들을 접촉하여 백팔번뇌를 만든다.
지식도 감정도 닥치는 대로 수입하여
이곳저곳에 가득 쌓으며 그 무게에 짓눌려 고뇌한다.
설령 뿌리치더라도 또 다른 한 생각이 주인이 되어 똑같은 중생놀이를 한다.
결국 거듭되는 생각으로 수백생 수억생이 겹치고 얽히고
진짜 주인인 참나가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하고,
주객이 전도되어 끊임없이 육도윤회를 한다.
석가모니는 삼매에 들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든 것은 이미 다 들어냈고,
삼독심으로 불타는 화택에서도 벗어나 텅 비어 있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으니 석가모니의 윤회는 잠시 쉬는 상태였다.
가지도 멈추지도 어느 것에 메이지도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한 생각이 일어난다면
즉시 멱살을 움켜지고 어디서 왔는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생각을 일으킨 실체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빈 마음으로 삼매에 든 석가모니는 여섯 문을 열어놓고
들어서는 한 생각을 붙들려고 몇날 며칠을 기다렸다.
세상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녘 밤하늘엔
반짝거리는 밝은 별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산천 초목들이 도반으로 화엄삼매에 들어 있었다.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삼매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 동반삼매에 들어 있었다.
육도 윤회가 쉬어 나지도 죽지도 않는 삼매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석가모니는 삼매에 든 체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를 지켜보던 밝은 별(明星)이
안문(眼門)으로 들어서며 한 생각을 일으켰다.
그 순간 석가모니는 한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6년 동안이나 삼매의 목로를 놓고 기다렸는데 어찌 그 순간을 놓일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는 마침내 들어오는 마음을 보았다.
한 생각이 생기는 것을 잡았다.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밝은 별(明星)을 보는 순간 진리를 깨우쳤기에
이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을 보았는가?
밤이면 밤마다 하늘 가득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 별을 본 것은 이미 한 생각이 일어나
한 생을 살고 있는 동안의 육도윤회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슬픔의 생을 살때는 함께 울어 주었다.
삼라만상이 이미 만들어진 마음 위로 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갔었다.
그것들은 한 생을 살아가는 중생의 마음 따라
희로애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석가모니는
별(星)을 보고 별(星)생각을 했지 별(別)생각을 했겠는가.
별을 보는 석가모니의 마음에 이미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별을 보며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고 별은 별로 나누어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마음은 텅 빈 삼매였다.
한 생각도 없었다.
별을 보는 순간 드디어 한 생각이 일어났다.
만약에 그순간 나무를 보았더라도,
아니면 물소리나 새소리를 들었더라도 그는 똑같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여섯 문 어디로든 들어오는 순간 붙들었을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깨우쳤다.
마음의 실체를 보았다.
어디서 오는가를 알았다.
그러니 돌아가는 것도 알았다.
산천초목이 바람결에 이슬을 쏟아 내리며 박수를 쳤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울려 축가를 불렀다.
산짐승.
들짐승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했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흩날리며 대지를 보듬어 주었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나도 남이 아니고 죽어도 죽음이 아닌 세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니 두 번 다시 윤회를 하겠는가.
드디어 윤회의 사슬로부터 해탈한 것이었다.
이제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었다.
이미 생사의 고리를 끊었는데 누가 있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생을 받지 않으리라는 외침이 삼계(三界)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석가모니의 화두는
"마음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였다.
새벽 하늘의 밝은 별을 보는 순간 한 생각이 일어났으니
석가모니의 마음인가.
명성의 마음인가?
그것이 석가모니의 마음이라면
다시 한 생이 시작될 것이니 윤회의 시작이고,
별이 일으킨 마음이라면 보는 이마다 왜 다르단 말인가.
그것은 석가모니의 마음도 아니고 별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석가모니의 삼매와 별이 만나는 순간
한 생각을 일으키는데 함께 있었던 것이다.
둘이 공존했으나 한 생각으로 한 생을 시작하지 않고,
별은 별자리에 그대로 있고,
석가모니의 한 생각도 더 이상 한 생의 수레바퀴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본래 무일물인데 인연에 따라 한 생명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자도 없고 보인 자도 없었다.
서로 따라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별은 무상이오,
마음은 무아였다.
무상과 무아로 연기가 작용했다.
만약에 별이 존재하고
석가모니의 마음에 석가모니의 어떤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만남이고 보탬이고 분별이니 깨우침이 아니다.
마음이 생기는 것을 포착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생각 하나가 더 보태진 것이고 번뇌 하나가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때 무아였다.
마음이 윤회를 멈추고 삼매에 들어 있었다.
석가모니는 마음의 실체를 보았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죽어 가지고 갈 것도 없었다.
그 마음은 부모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이미 있었는데 누가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실체가 없다.
지배하는 자도 없고 속박하는 자도 없다.
오직 한 생각 일으켜서 스스로 온갖 시비장단을 양념 삼아 업장을 짓고
그 안에 갇혀 세세생생을 윤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깨달았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마음도 없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야 생로병사가 생기고,
공간이 있어야 삼라만상이 형상을 짓고,
마음이 있어야 인연을 지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간은 무상이고 공간은 무아고 연기는 열반이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인연에 의할 뿐 생멸하는 실체가 아니다.
한마디로 그가 깨달은 것은 무(無)였다.
그렇다면 우주만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과응보에 의한 과정들이다.
시간도 공간도 마음도
허공에 이는 한점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할 뿐이다.
석가모니는 5백생 동안 켜들고 다니든 지혜의 등불을 꺼버렸다.
자신이 밝혀든 불빛 밖이 더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마음도 놓아버렸다.
아무리 존귀한 것이라도
들어 올리면 생사의 바퀴가 돌기 시작함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는 마침내 견성한 붓다가 되었다.
깨우침을 얻은 대각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한마음도 얻지 않았다.
과거불도 그렇게 마음의 오고감을 보았고,
미래의 미륵불도 그렇게 견성할 것이다.
과거.현재.미래가 동시 존재이듯이, 과거불.현재불.미래불도 하나다.
우주 가득 붓다의 몸으로 채워져 있고 삼세의 붓다가 하나임을 깨달았다.
과거불도 얻은 바가 없이 생각을 내었고,
현재불도 얻은 바가 없이 생각을 일으켰으며,
미래불도 얻은 바가 없이 이를 확인할 것이다.
그러니 삼세의 붓다는 깨우쳤을 뿐 아무것도 얻지 않았다.
때문에 석가모니는 훗날 금강경을 설할 때
응무소주(應無所住)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고 했다.
마음이 어딘가에 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고 했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인데 응유소주(應有所住)할 거처가 있겠는가.
한 생각을 일으켜 한 생을 사는 어떤 마음에 머물러서 내는 마음은
업장만 늘어날 뿐 견성에 이르지 못한다.
석가모니는 가아(暇我)로 육도윤회하는 중생들을 방생하여
천도시키려고 중생을 향해 내려왔다.
본래 무일물인 진리의 속으로 계합되어 버렸다면
그를 법다이 간 여거(如去)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중생 방생을 위해 법다이 내여왔기에 여래(如來)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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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귀 막은 중에 선지식의 다정하신 음성을 간혹 그리워하였삽고 생각만으로도 따뜻하였삽고 문 하나 밀치면 뵈올 수 있으나 그저 짐작으로 문 밖에서 돌아서 가나이다. 아끼고 사랑하여주시던 여러 선지식님들께 절 올리옵고, 선지식들께서는 한결같이 심신 두루 늘 청안하시옵기를 간절하게 기원드리나이다. 한 법도 쓸 법이 없음을 깨우쳐주시려 시시때때로 법륜을 굴려주시는 선지식들이시여! 시간이 흐를수록 제불전에 올릴 공양거리라니 김치 된장국 조촐한 공양 한 상 뿐 달리 올려드릴 공양이 없음을 통감하온즉, 이제껏 소녀의 살림살이 그러하오니 하심의 공덕으로 회향되도록 대자비로 살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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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팔월 무더위 동지섣달 눈바람 여여하게 법체 강건하사와 철철이 미묘청안 더욱 깊어지시어 저희의 등불 되어주사이다! 나무서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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