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배신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로 발달심리학, 언어심리학, 사회적 추론, 도덕적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이다. 공감은 늘 선물과 침해 사이에 위태위태하게 앉아 있다. 그는 다음 건배사를 좋아한단다.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건배! 나머지는 지옥에나 가라.”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이다. 공감 능력이 결핍된 사람들은 사이코패스이고, 사이코패스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공감이 필요하다. 도덕에는 궁극적으로 공감이 필요하지 않은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공감은 도덕의 핵심이다. 공감이 없으면, 정의도 없고 공평도 없고 연민도 없다.
공감은 선행에 사용될 수 있다. 공감이 확대되어 긍정적 변화를 끌어낸 사례들이다. 노예제도 반대부터 동성애자 권익 수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것도 공감이고, 일상에서 친절을 베풀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 역시 공감이다. ‘피어 싱어’가 쓴 글을 보면, 부유한 나라의 시민들이 자기가 가진 돈 대부분을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급스러운 옷이나 값비싼 식사와 같은 사치에 돈을 쓰는 것은, 얕은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보고도 아이를 구하러 물속에 걸어 들어가면 비싼 신발이 엉망이 되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당신은 공감을 대체할 온갖 대안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한계와 편향에 시달리지 않는가? 연민이란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연민에도 문제는 있지만 공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공감에 비해 뇌 영상 연구와 영상의 효과에 관한 연구 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이성에 의지할 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성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과 신념을 설명하라고 정당화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물론 이성도 편향될 수 있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추론에 서툴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추론 능력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감을 포함하여 인간의 직감에 의지하는 편이 훨씬 낫다.
시카고 대학 구내식당에 붙은 경고문을 보자. “이 식당에서 분기마다 1,000개가 넘는 접시와 도구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학생에게 충격을 줘서 규정을 준수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자 필자는 슬그머니 주머니에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넣고 싶었단다. 잘못된 점은 모든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선단체에서 바로 이런 일을 한다. 그들은 늘 사진과 이야기를 이용해서 여러분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어떤 연구자들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뇌에서 벌이지는 일을 공감이라고 본다. 보통은 ‘사회 인지’ 또는 ‘마음 이론’이라고 부르지만, 가끔은 ‘인지적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최근 한 논문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의 경우에는 공감 능력이 높은 것인가, 낮은 것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은 피해자를 꾀어낼 때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춰주면서 매력적으로 행동한다. 이는 공감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중에 피해자를 강간할 때는 아주 냉담하게 행동한다. 이는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공감을 두고 불평하는 것은, 이런 농담과 같다. 한 유대인 할머니가 손자와 해변을 산책하다, 밀려든 파도에 손자가 바다에 빠졌다.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흐느끼면서 신에게 기도한다. “손자를 제게 돌려주세요. 오. 하느님. 제발 손자를 살려주세요. 오. 하느님.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파도가 손자를 해변으로 밀어냈다. 손자는 달려가 할머니 품에 안겼고 할머니는 손자를 끌어안았다. 다음 순간, 할머니는 하늘을 쳐다보며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모자 쓰고 있었는데.” 과연 그런 불평이 과연 적절한가?
공감은 도덕의 근간인가. 공감은 우유와 같은지도 모른다. 성인에게 우유는 필요 없다. 우리는 우유 없이도 잘 지낸다. 하지만 아기들이 성장하려면 우유가 필요하다. 심리학자, 철학자들, 부모들이 공감을 발달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폭력과 잔인함. 1945년 4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여러 명의 남성이 벽을 행해 늘어선 채로 고문을 받고 총살당한다. 이 수용소는 수만 명의 수감자가 살해당하고 굶어 죽고 처형당해서 죽고 가스실에서 죽고 기이한 의학 실험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희생자는 체포된 독일 병사들이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강제수용소를 해방한 미군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악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악은 내면의 폭력성과 잔인성’이란 책을 쓴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인물을 거론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희생자에 대한 고통에 대한 나머지 원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이 독일인을 살해하고 학대한다는 이야기에 분개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려 준비할 때, 신문과 인터넷은 ‘사담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이 저지른 학대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최근에 미국 정부가 화학 무기 사용을 포함하여 ‘하페즈 할아사드’와 그의 군인들이 안겨준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시리아 공습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될 것이고 그의 잔학 행위에 관한 이야기에 더 많이 노출될 것이다.
이성의 미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정의했지만, ‘서드 파운더’ 이야기는 몰랐다. 맥도날드 메뉴인 ’쿼터 파운더‘에 대적할 햄버거를 만들고 싶어 했다. 소고기 함량보다 이름이 문제임을 알았다. 소고기 1파운드의 1/3보다 1/4이 소비자들은 적다고 어림했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은 실수인 건 맞다. 우리 인간은 비이성적인 동물이다. 이성을 공격한 것은, 신경과학이다. 정신생활의 물리적 기반이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이성주의자의 관점과 맞지 않는다고 믿는다. IQ는 어느 수준에서나 중요하다. 자녀의 운명을 예측하기 위해 정신측정 검사를 하나 받게 해야 할 때, IQ 검사를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에 사람들은 ”IQ 검사는 당신이 IQ 검사를 얼마나 잘 받는지를 측정할 뿐이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 결국 미국에서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러분이 SAT 시험을 얼마나 잘 봤느냐에 달렸고, 기본적으로 SAT 시험은 IQ 검사다. 한 사람의 SAT 점수와 IQ 검사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다. 그러나 IQ 검사와 성공 관계는 자의적이지 않다. IQ 검사는 정신의 속도나 추상적 사고력과 같은 능력들을 드러낸다. 사실 높은 지능은 성공과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 행동과도 관련이 있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협력을 더 잘한다는 증거도 있다. 뛰어난 지능이 장기적인 협동의 유익을 이해하고, 타인의 관점을 참작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공감은 엄청난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기쁘면 우리도 기쁘다. 아이를 갖는 기쁨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공감은 우정과 공동체의 즐거움, 스포츠와 게임의 즐거움, 섹스와 로맨스의 즐거움을 증폭시킨다.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공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설사 그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라도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아주 매력적인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이들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삶을 매력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시뮬레이션을 시도한다. 우리에 공감이 가는 상대에게 뭔가를 해주고픈 욕구와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픈 욕구가 있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책에서 다뤄야 할 주제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3.03.23.
공감의 배신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시공사 간행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이 있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 있으며,
더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