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9일 팔공총림 동화사에서 원로의원 성우스님이 계법을 전하는 종단 최고의 계사인 전계대화상에 위촉됐다. 또 금정총림 방장 지유스님, 해인총림 율주 종진스님, 원로의원 원경스님,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 반야사 주지 종진스님 등이 진제 종정예하로부터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신임 전계대화상 성우스님과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스님들은 평생 수행과 포교, 사회 참여 등 어느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다음에서는 전계대화상 성우스님과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스님들의 행장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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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계대화상 성우스님
한국불교 대표하는 율사…평생 계율의 중요성 설파
문학, 신문, 방송 통한 포교로 불교 대중화에 앞장
성우스님이 계법을 전하는 종단 최고의 계사인 전계대화상에 위촉됐다. 평생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성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이자 이 시대의 우바리 존자로 평가받고 있다. “계율이 바로 수행이며 불교의 중흥은 바로 계율의 부흥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평소 스님의 지론이다.
계율이 수행의 바탕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성우스님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대만 홍법원에서 중국불교 계율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다. 1995년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계율을 중요성을 설하기 시작했다.
스님의 원력은 1996년 4월 조계종 단위사찰 최초의 율원인 파계사 영산율원이 문을 여는 성과로 이어졌다. 영산율원은 조계종 율학연구의 총본산으로 꼽히는 곳이다.
성우스님은 1968년 해인율원을 함께 졸업한 철우스님과 계율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율원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고, 그 결과 영산율원을 설립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 계단위원회 계단위원, 단일계단 갈마아사리 등 종단 내 계율과 관련한 주요 소임을 맡고 있다.
계율뿐만 아니라 포교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성우스님은 문학과 신문, 방송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학과 신문, 방송을 활용하며 불교 대중화에 앞장서왔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성우스님은 1970년 시조문학에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이듬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정운시조문학상과 다촌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문서포교에도 매진해 대한불교신문사 주간, 월간 현대불교 발행인을 맡아 불교언론 발전과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2000년부터 현재까지 불교텔레비전 대표이사를 맡아 불법홍포에 일조하고 있다.
성우스님은 고송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3년 파계사에서 한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범어사 불교전문강원과 해인총림 율원을 졸업했다. 제11~12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파계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2013년 4월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 대종사
비극적인 가족사 수행의 동력으로 용맹정진
조계종 원로의원 원경스님
원경스님은 가슴 아픈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스님에게는 한국 근현대사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비운의 혁명가’인 박헌영(1900~1955)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항상 따라다닌다. 원경스님의 아버지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국내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로 광복 후 남로당 당수를 지낸 인물로 독립운동가임에도 남과 북 모두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원경스님은 1993년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박헌영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또 2010년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현대사를 기록한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하기도 했다.
역사의 격량 속 비극적인 원경스님의 가족사는 스님이 더욱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하며 매진해왔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사회복지과를 수료한 이후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고 자비를 실천하기도 했으며, 경기도 지방경찰청 경승 등을 역임하며 지역 포교 활성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오롯이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스님의 오랜 수행과 정진을 종단에서도 인정해 지난해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원로의원이 된 이후 스님은 남은 생을 종단과 종도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원경스님은 송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했다. 제10대 중앙종회의원, 흥왕사, 청룡사, 신륵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현재 평택 만기사 주지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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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보리 하화중생’ 실천에 매진한 선지식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스님
지유스님은 평생을 수행에 매진해 온 선지식이다. “선은 본래 마음인 불심(佛心)을 찾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진해왔다. 원효암에 주석한 이후 눕지 않고 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일화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하기 위해 의사가 마취제를 놓으려 하자 거절한 채 그대로 수술을 진행했다는 일화는 수행자로서 지유스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국비구승대회를 소집해 불교정화운동의 깃발을 올린 은사 동산스님의 뜻을 따라 “진면목과 참뜻이 무엇인가” 찾기 위해 평생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유스님이 강조하는 점은 바로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다. 위로는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자기 혼자만 누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고 있다. 후학들의 공부를 지도하는데도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지유스님은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49년 범어사에서 사미계, 1950년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를 비롯해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범어사 주지를 역임했고, 1991년 범어사 조실로 추대된 이후 범어사 원효암에 주석해 왔다.
2013년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불교정화의 깃발을 올린 산실인 범어사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간화선 수행의 중심도량으로 이끌며 수좌 스님들과 불자들의 공부를 지도하는데 전념하고 있다.
수행과 사회운동이 둘이 아님을 실천
고불총림 방장 지선스님
지선스님은 출가수행과 사회운동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천해 온 선지식이다. 지선스님은 1980년대 고통 받는 민중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우리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족불교, 민주불교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스님은 사회운동에 적극 앞장서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6월10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 무효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불교계는 물론 시민사회,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회와 동떨어진 불교가 아닌, 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실천하는 불교를 구현하기 위해 앞장섰다.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의장, 민족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공동의장, 전국불교운동연합 상임의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장, 5.18기념재단 이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의장 등 지선스님이 역임한 소임은 실천하는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고스란히 나타내주고 있다.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6월 항쟁 이후 감옥에 갇혀서도 참선 정진을 거듭했다.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외에는 참선을 계속했다. 민주화 이후 선원으로 돌아와 참선수행에 매진해왔다.
지선스님은 석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1년 백양사에서 사미계, 1967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제주 관음사, 영광 불갑사, 광주 문빈정사, 장성 백양사 주지와 조계종 종정 사서실장,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백양사 수좌 소임 등을 맡았다.
백양사 주지 시절 고불총림을 복원하고 서옹스님을 방장으로 모셨다. 2013년 고불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총림을 대표하는 어른으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불교 대표하는 대강백이자 율사
해인총림 율주 종진스님
종진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강백이자 율사(律師)다. 자운(慈雲)-종수(宗壽)스님으로 이어지는 해인총림 율맥을 잇고 있다. 스님은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가사장삼을 여법하게 수하고 꼿꼿하게 앉아 경을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 제자라면 계와 율의 근본정신으로 살아야 하며, 계율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출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 종진스님의 지론이다. 15세에 출가해 평생토록 올곧은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종진스님은 경학과 참선수행, 율장의 깊은 뜻을 익히고 체득했다.
계율은 출가 수행자를 비롯해 사부대중 모두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계율과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1985년 일타스님의 권유로 율원을 맡은 이후 현재까지 후학들을 지도하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5년 <선문염송>과 <선문염송집>의 오류를 발견하고 상세하게 검토, 오류를 바로잡아 8년에 걸쳐 오류를 바로잡고 집대성해 지난해 <원전회편 선문염송집> 출판을 회향하기도 했다. 참선수행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한국의 선법(禪法)이 크게 드날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종진스님은 도견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55년 동화사에서 사미계, 1961년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70년 지관스님에게 강맥(講脈)을, 1985년 종수스님에게 계맥(戒脈)을 이어받았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해인총림 강주를 역임하고, 1985~1998년 해인총림 율원장, 1999~2004년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를 거쳐 현재 해인총림 율주, 반야사 주지, 계단위원회 및 법계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