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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선물
시편 127: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지난 11월 7일은 입동이었다. 곧 겨울에 들어선다는 옛사람이 정한 신호이다. 시간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그 신호는 입동에 이르렀으니 서둘러 농사일을 마감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김장을 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집 안팎을 갈무리하라고 한다.
음력 시월 즈음을 1년 중에서 가장 신성한 달 곧 상달(上月)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까닭은 한해의 농사를 끝내고 하늘에 감사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개인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드린다.
이러한 감사는 누가 진심으로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시간의 이정표에 따라 살아가는 농부들일 것이다. 그들은 하늘을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일 년이든, 일생이든 하나님의 달력이란 시간의 이정표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은혜의 질서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작자를 알 수 없으나 유명한 기도가 있다.
“나는 인생을 즐기고자 신에게 모든 것을 구했다. 그러나 신은 모든 것을 즐기게 하시려고 내게 인생을 주셨다. 내가 신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 하나 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뜻대로’라고 희망했던 것은 모두 다 들어주셨다.”
감사를 느끼는 가난한 마음은 과분히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 은혜로 채워주셨다고 고백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1)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여덟 번째 순례자의 노래이다. 두 개의 지혜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가정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것이다. 늘 우리가 하는 일용할 기도 제목이요, 평생 씨름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내 집과 성(城)의 수호자가 되신다. 가정의 행복과 공동체의 안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보호와 복에 달려 있다. 물론 인간적인 수고와 헌신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이루어져도 모래성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청된다.
사실 가정이든, 나 자신이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인생이 선물인 까닭은 내 인생의 주인인 나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이조차 너무나 짧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인간이 세운 공적조차 무효가 된다. 그러니 누구나 은총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이 부둥켜안아 주셔야 한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니 나를 품어 주시길 바란다. 개인과 가정의 운명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한다. 한 나라의 역사도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가 있어야 한다.
헬무트 틸리케 목사의 <세계를 부둥켜 안은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소소한 일상의 일이 있는가 하면 세계사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문제가 있다. 아무 염려가 없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문제들도 있다.
“온 세상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 세상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때, 세상은 우리 손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로 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을까요?”
그는 문제를 부둥켜안으라고 한다. 부둥켜안는 일은 바로 기도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부둥켜안아 주실 것이다.
2)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노동이고, 노동을 하면서 살도록 선택한 내 직업이다. 평생 직장에서 일하든, 평생 가정에서 살림을 하든, 모든 건강한 노동과 살림은 사람들의 보람이며 자랑이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우리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시편은 인간의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단언한다.
밤낮, 부지런히 일해도 헛된 수고가 될 수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해도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노동은 헛수고가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얼마나 허무한가?
시편의 말씀은 뜻밖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노동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그것은 수고보다 먼저 안식을 우선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노동은 안식의 질서를 우선하는 노동이다. 시편은 발상은 엉뚱해 보인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을 아침부터라고 여긴다. 그러나 창조의 뜻에 따르면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 그리스도교에서 한 주간의 시작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다.
하루의 시작을 아침이 아닌 저녁으로 삼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주도권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주일예배로 시작하는 한 주간은 얼마나 복된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잠은 인간의 가장 수동적인 행위이다. 만약 내가 잠을 자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면 잠을 어떻게 잘 수 있을까? 어린 아기를 둔 젊은 부모는 날마다 아이를 잠으로 인도해준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식적으로 잠자리에 든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잠은 하나님께 내 인생을 다 맡기고 안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은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습관적인 것이냐,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 속에 참여하는 일이냐는 분명히 다르다. 은총의 질서 속에 이루어지는 노동은 즐겁고, 창조적이다.
잠이 불안한 사람이 있다. 휴식조차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 불면증이요, 휴식 강박증은 위험하다. 잘 자고 잘 노는 사람은 그것도 은총이다. 노동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휴식할 수 있는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대로 쉬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시간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안식의 참 목적이다. 모든 노동의 목적은 안식이었다. 안식의 목적은 노동을 위한 충전이 아니다. 안식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복되고, 거룩한 일이다.
탈무드에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켜 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하는 줄 알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행위가 바로 나를, 내 인생을 지켜주신다.
그러나 노동할 수 없다면 휴식이 결코 휴식이 될 수 없다. 긴 휴식은 지옥일 것이다. 게다가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기약 없는 고용계약만 믿고 무작정 쉬는 일은 얼마나 괴로울까?
예전에 어느 대기업의 정리해고자들과 가족을 위한 기도회를 서울 대한문 앞에서 하는데 설교를 부탁한다고 연락이 왔다. 잠시 3초 동안 생각하고, 그렇게하자고 약속하였다. 즉답은 했지만 걱정이 되었다. 평소에 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던 내가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의자놀이>란 책도 주문해 읽고, 며칠 전에는 저녁 무렵에 농성장이 있던 대한문 앞을 둘러보았다. 컴컴한 천막 속에 사람들이 모여 무슨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날은 춥고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설교하기 며칠 전에 그 현장을 답사한 일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날마다 쉬는 것이 무서운 사람들에게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절망하고, 상처 입고, 분노한 이들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하고 싶어 하는 희망을 붙잡고 있으니 나도 무언가 말해야 할 것 아닌가!
<의자놀이>에 이런 대목의 내용이 있다. “내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어떤 노력도 부질없을 때,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눈물이 터지기 직전, 아마도 그때가 신이 나를 부르는 시간이리라.”
3)
사실 내 속에서 나온 내 자녀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가 되는 일은 참 어렵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3).
여기에서 자식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을 의미하며, 기업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상급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복을 뜻한다. 자녀가 많은 가족은 유리하다. 성문에서 벌어지는 법적 다툼에서도 아들들이 많으면, 목소리가 크면 유리하다. 물론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있다.
문수산성교회 임충실 권사라는 분이 있다. 평생 가을 농사를 추수하면 이맘때 쌀을 한 가마니(20kg) 보내주신다. 올해도 변함없이 햅쌀을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지금 내외가 가을걷이를 끝내고, 밭에 마늘을 심는다고 하더라.
전화 한 통화에 그들 부부는 몇 번씩 고맙다고 하였다. 또 쌀을 많이 못 보내어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밭고랑에 엎드린 채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삶을 산다. 자식 많은 것이 대순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늘 감사하는 인생 그 자체였다.
그는 아들 하나를 겨우 뒀다. 그나마 장가를 안 가서 부모 마음을 안타깝게 하더니 십여 년 전에 베트남 처녀를 만나 첫 손주를 보았다. 그 할아버지에게 첫 손주는 열 아들 부럽지 않더라.
임 권사님은 평소 자신의 기도 속에 세계를 부둥켜안았고, 현실을 낱낱이 고해 바치는 분이다. 올해 쌀값이 뚝 떨어졌다. 전화를 걸어 내가 염려했더니 그는 왜 쌀이 남아 돌아가는데, 굶주리는 북한동포에게 보내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인생도 어렵고, 세상도 참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은 내 자녀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큰 숙제와 같을 것이다.
내게 보내준 ‘오늘의 책’ 필자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금은 목사가 된 그는 학부 때는 연주자를 지향하던 음대생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고, 특별한 재능도 찾기 어려웠다고 스스로 말한다. 평소 악기를 연주할 때 긴장하는 버릇이 있어 정작 실제 발표할 때는 연습할 때보다 못할 때가 많았다. 불완전한 연주는 입시부터 시작되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내려왔다. 졸지에 머리가 새하얗게 되면서 외웠던 곡이 사라져 버렸다고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이후로 실기시험이든 무대에서든 늘 연주가 꼬였다.
연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연주가들이 속칭 ‘삑사리’라고 하는 잘못된 음이나 소리를 낸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지만 연습할 때마다 틀리는 부분을 지나칠 때 불안한 마음의 결과로 실수하기도 한다.
결국 음악을 접었다. 요즘 집에서 악기 연주를 하면 전공할 때보다 즐겁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냥 나만의 공간에서 음악을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나에게 연주를 부탁하면 예전 상태로 되돌아간다. 나에게 완전한 연주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가 소개한 책은 <완전한 연주>이다. 저자는 완전한 연주를 가로막는 장벽은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교육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두려움은 우리의 뇌를 마비시킨다고 한다. 저자는 완전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 완전이란 허상이 유령으로 다가와 연주가를 집어삼킨다고 한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실수라는 것은 없다.”
당장 오는 목요일에 수능시험을 치룰 수험생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우리가 같은 심정으로 기도해야하는 이유다.
사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완전은 없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게 베푸신 선물을 생각해 보라! 자기 생애에서 감사를 잃은 사람은 얼마나 황폐한가? 하나님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불안한가?
다음 주일은 감사절이다. 내 인생은 선물이다. 이번 주간에 가난한 마음으로 은총의 선물을 헤아려 보라. 그리고 감사하라! 감사는 내 인생을 축복하는 일이고,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이다.
잠언에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내 인생에서 감사를 고백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선물같은 인생을 허락하시길 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의 질서와 은혜의 간섭으로 이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전날 저녁부터 알러지현상이 눈으로 와서 아침. 걱정하던대로 주일 성전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무거운 맘으로 있던차에 윤겸이 편에 보내신 봉지에 울컥했습니다. 십자가 목사님을 만나겠다고 예고도 없이 부산에서 오신 80대 (권사님)이신지?10.20분 잠깐 만났지만 당당하신 모습에 놀랐고 용기에 감탄했습니다.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따뜻한 차도.식사도.대접못하고 보내드린게 계속 남아있었는데 금욜 드디어 목사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대접도 못했는데 부산에서 부터 저를 생각하시고 베낭에 담고 오신것에 감사와 죄송함에 몸둘바를 몰라서 저녁 나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주 50대 젊은 목소리로 소원성취하셨다고~ 반가이 말씀을 하시고 끊으실때 "범사에 감사합시다"
하시던 말씀에 그 연세에 순수함이.
그 열정이 큰 은혜와 감사함을
느낍니다^^~
~범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