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성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쪽 지방 브란에 있다. 작은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중세마을이다. 드라큘라 성도 본명은 브란 성이다. 브란 성은 루마니아 남부 왈라키아 지역과 중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잇는 교통 요충지 브란 통과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했다. 1377년에 착공해서 1382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꾸준히 증개축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 드라큘라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루마니아 제1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박물관에 드라큘라 영주가 사용하던 고문 도구를 비롯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물건들을 진열하고 관람객에게 내부를 공개한다. 드라큘라는 아일랜드의 작가 스토커가 1897년에 발표한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 Dracula’ 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소설은 책뿐만 아니라 연극으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신화적 괴기 소설이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한 고성에 혼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있었는데 영국인 하커가 이 성을 방문하여 백작이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저녁이면 관에서 나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흡혈귀에 피를 빨려 죽은 피해자 역시 흡혈귀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다. 이 드라큘라 성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알아야겠기에 네이트의 지식창에 올려진 자료를 참고했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류 소설 주인공의 원조다.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저술하던 19세기 후반은 교통수단이 발전하여 귀족과 갑부들이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특히 당시 최강대국이던 영국인들은 세계의 다양한 풍물에 대한 관심이 한참 고조되고 있던 때라 외국의 괴담을 주제로 한 괴기 소설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스토커는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당시 유행하던 흡혈귀(뱀파이어) 전설과 악명 높은 악마의 자식인 블라드 드라큘라 쩨뻬쉬 공작의 명성을 적당히 조합하여 뱀파이어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를 집필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유사 작품이 만들어져 '흡혈귀(뱀파이어) 문학'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기에 이르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스토커가 저술한 드라큘라의 모델인 블라드 쩨뻬쉬는 1431년에 태어나 1476년에 죽은 루마니아의 장군이자 작가다. 당시 루마니아가 위치한 발칸반도는 오스만 트루크의 이슬람 세력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쩨뻬쉬는 불가리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있던 루마니아의 옛 왕국 중 하나인 발라히아 왕국의 도시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트루크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을 트루크 즉 터키에서 볼모로 지내게 된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몸값을 지불하여 다시 발라히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헝가리 제국 군대가 쳐들어와서 다시 쩨뻬쉬는 헝가리로 몰모로 잡혀 간다. 1456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온 쩨뻬쉬는 왕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은 다음 왈라키아 지방을 다스리는 공작, 왈라키아 공으로 추대된다. 그 당시 루마니아는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도바의 세 지방으로 구분되었다.
그는 왕위, 왈라키아 공에 오른 후 군사를 조련하여 터어키와 헝가리를 상대로 용감하게 전쟁을 했다. 특히 1461년에는 트루크의 술탄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여 이듬해 메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군대를 이끌고 게릴라전법으로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냈다. 볼모 생활 중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가득히 담고 있던 쩨뻬쉬는 트루크와의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포로들을 길 위에 나란히 눕혀 놓고 가시가 박힌 큰 바퀴를 사람 몸 위로 지나가게 하거나, 기다란 창으로 항문을 깊게 찔러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상태 그대로 길가에 세워 두어서 창이 포로의 몸무게로 인해 점점 파고들어 결국 입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인 쩨뻬쉬는 루마니아어로 '가시,' 또는 '꼬챙이'를 이르는 말로 바로 이 잔인한 처형법에서 기원했다. 포로들이 창에 꿰어져서 길 양쪽에 줄줄이 세워져 있는 장면을 본 트루크군이 그 잔인함에 질려서 왈라키아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그는 내정에도 힘을 쏟아서 귀족들의 횡포를 누르고 당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독일인 상인의 특권을 제한하여 민생 안정 및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는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훌륭한 정치를 편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독일계, 혹은 게르만계 상인들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그들을 역시 꼬챙이로 찔러서 대량 처형하고 그들을 비호하던 400여명이 넘는 독일계 카톨릭 사제들을 산채로 태워 죽였기 때문에 서유럽에는 그가 잔인한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쩨뻬쉬가 드라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쩨뻬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드라큘은 헝가리의 지그문트2세로부터 용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불가리아어에서는 명사 뒤에 소유형 어미 a 를 붙이면 '~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쩨뻬쉬를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드라큘라Dracila'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가문은 용의 그림이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였는데 불가리아 말로 용은 'dragon' 이라고도 하지만 'dracul' 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dracul에는 용 이외에 '악마'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드라큘라는 불가리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독일인 상인들의 착취와 트루크의 침입으로부터 구해준 '용의 자식'으로, 트루크인들과 독일인들에게는 자기 민족을 잔인하게 죽인 '악마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한편 쩨뻬쉬는 트루크가 내세운 다른 왈라키아공, 대립공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현재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남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데아르제쥬시에 소재한 브란성은 실제로 블라드 쩨뻬쉬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다만 이 성이 바위 위에 세워졌고 옛날부터 트란실바니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곳으로 악명을 얻었던 데다가 루마니아 정부의 드라큘라 관광지 개발 계획과 맞물리면서 드라큘라 성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한편 아직도 루마니아 남부 포에나리성 인근의 아레프 마을에서는 1년에 두차례씩 블라드 쩨뻬쉬를 위한 축제를 벌인다.
드라큘라 성이 있는 마을은 아름다웠다. 입구에 예쁜 기념품 상가가 즐비하고 높은 곳에 오롯이 서 있는 성이 비경이다. 입장권을 사서 관리하는 노인에게 주고 들어갔다. 조금 언덕진 길을 걸어서 올라가니 십자가 돌비가 세워져 있다. 서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내부로 들어서니 백작이 살았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드나들던 빙그르 돌아가는 좁은 계단과 벽면의 출구, 우물 등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꽃 화분을 장식하여 조금은 두려움을 덜어주기도 한다. 송곳니 두 개로 피를 빨아 먹는다고 알려진 무서운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드라큘라가 싫어하는 것 3가지는 마늘, 십자가, 햇볕이다. 한 마디로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 전쟁영웅 백작으로 지옥에서 온 용의 아들이며 왈라카이 공국의 영주였던 아버지를 처형한 배반자를 모두 항문에 말뚝을 막아 죽이는 말뚝처형 살인자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탄생된 소설이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인 블라드 공작이 유폐되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이 성은 15세기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 왕자의 소유가 되었다. 체페슈 왕자는 영국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 영감을 줘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백작으로 탄생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영토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까지 미쳤고, 전 유럽 대륙의 교회에선 드라큘라를 칭송하는 성가들이 불려지기도 했다. 루마니아 공산권 시절에는 정부 소유였으나, 1920년 브라쇼브 주민들이 루마니아 마지막 왕의 조카 폰 합스부르크의 할머니인 마리아 여왕에게 성을 기증했다. 폰 합스부르크씨는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냈고 아주 따스한 추억들이 있다고 했다. 조부가 주인이었으며 왕비 마리아의 여름 별장이다. 드라큘라 성은 현재 개인 명의로, 시가 900억원이다. 드라큘라 성을 관람하고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시나이아의 팔레슈 성에 간다. 팔레슈성은 루마니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는 중식 후 다시 부카레스트를 경유하여 불가리아로 간다. 루마니아에서 꼭 보고 싶었는 드라큘라 성을 다 관람하고, 다시 평온한 호수와 울창한 숲의 언덕길을 내려오며 루마니아인들의 사고처럼 드라큘라는 무서운 자가 아니라고 가슴 속에 다시 저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