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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묻는 청년에게-2nd
‘서재경’ 선생의 이어지는 글이다. 국가 발전은 선택과 책임의 문제다. ‘앤드루 고든’ (Andrew Gorden 1952~ )의 <현대 일본의 역사>는, 250여 년간 이어진 막부 체제가 평화와 안정을 유지했지만, 서양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에 뒤처졌다. 위기의식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폭발했다.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기치로 삼고,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 신분제를 철폐했으며, 의회 제도를 도입해 입헌군주제를 표방한다. 급속한 산업화를 이뤄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뒤,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노일전쟁의 승리로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합병한다. 이 흐름 속에 태평양 전쟁(1941~1945)은 흐름의 정점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항복하고, 전쟁은 비극으로 끝냈다. 1947년 제정된 평화헌법은 일본의 전쟁포기, 토지개혁으로 지주제 해체,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다. 이 책은 근대화가 곧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하지! 않으며, 국가 발전은 언제나 선택과 책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본이 걸어온 길을 우리에게 거울이자 반면교사가 된다.
역사를 움직이는 씨알의 힘, ‘함석헌’의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는 역사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 책은 말한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단순히 왕조사로 보지 않고, 백성들이 그 안에서 어떤 뜻을 위해 몸부림쳤는지 조명한다. 유교 질서 속에서도 양심적 각성으로 이어진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며, 진정한 주체가 제도나 왕조가 아닌 민중임을 일깨운다. 씨알 사상의 핵심은 씨알을 작고 미약해 보이지만 새로운 생명을 틔우는 씨앗이다. 민중을 씨알로 비유하며, 한국 역사를 움직인 힘은 위대한 영웅이나 제도가 아니라 깊은 곳에 뜻을 붙든 민중의 저력이라 말한다. 함석헌은 청년들에게 씨알로서 민족과 인류를 위해 어떤 뜻을 이루고 있는지 묻는다. 외부의 압력과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양심적 주체로 서라고 촉구한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박지향 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1980년대 당시 대학가와 언론, 시민단체, 운동권 조직에서 일종의 교본처럼 기능하며,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이념적 틀에서 재구성했었다. 그들 책은 분단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 우익에 집중시키고,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이해의 여지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그 영향력을 인식하며, 감정적 비판이나 도식적 서사에서 벗어나 구조와 제도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저자들은 대한민국이 단순한 분단의 부산물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합법적 국가임을 강조한다.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제헌국회 선거, 제헌헌법 제정, 국제사회의 승인 등은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며, 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던 정치적 맥락에서 나온 결과였다. 특히 ‘의심하는 능력’ ‘다수의 시각을 수용하는 태도’ ‘역사를 현재와 연결 지어 해석하는 힘’은 오늘날 시민사회에서 꼭 필요한 인식의 틀이다.
잘못된 제도로 한 나라가 망한다. ‘정벽석’의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본인이 3편으로 카페에 올린 적이 있으니 참고 바람) 행시 출신으로 고용노동부 차관 출신이다. 논지는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잘못된 제도 때문이다.’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과 도덕을 중시한 체제였지만, 현실 변화에 맞는 제도 개혁에는 실패했다. 경제력 약화, 군사 무기 기술 낙후, 경제 사회 체제의 경직성, 인재 선발의 폐쇄성 등 모두 분야에서 제도가 사회 변화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필자는 제도가 민심을 가두고, 그 민심이 결국 외세의 칼날보다 무서운 붕괴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번번이 개혁 시도가 실패한 원인으로 명분만 있고 전략이 없는 개혁의 허상을 경고한다. 지배층이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내부 성찰을 피하는 태도가 어떻게 국가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갔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동아시아 제왕의 필독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전국시대부터 북송, 후주 세종까지 1,300여 년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마오쩌둥’이 애독자로 군주와 대신들 간의 관계, 통치자의 언행이 민심에 미치는 영향, 반란과 혁명의 전도 등을 자치통감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책대로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전략을 구상했다. 오늘날에도 기업의 경영자, 공직사회의 관리자, 시민 교육자에게 권력의 분산과 집중, 조직 내 인재 관리, 제도와 문화의 상호작용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김은 통찰을 제공한다, “역사는 거울이다. 과거를 보면 다가올 일을 알 수 있다”란 사마광의 말처럼 <자치통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장 생생한 현실의 교과서이다.
위대한 제국은 내부의 타락으로 무너진다.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1734~1794)이 쓴 <로마제국쇠망사>는 서기 98년부터 1,453년까지다. 로마의 전성기 ‘아우구스투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까지와, 군단이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 병사에 급료를 약속하며 포퓰리즘 정권을 유지한 황제 등 제국의 자산 탕진 사례다. ‘비잔틴’이란 이름으로 천년을 유지하다 오스만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몰락까지다. 저자가 12년 동안 출간한 6권의 책이다. ‘기번’은 로마의 쇠망이 단순한 세력 다툼이나, 외부 침입 때문이 아니라 시민의 도덕 공공의식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시민정신, 공공의 덕, 제도의 정당성이 무너지면 어떤 강력한 국가라고 붕괴할 수 있다. 이 책은 로마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 청년에게 물질적 성공 외에 도덕과 책임, 공동체를 생각하는 지도자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네 번째 길, 바람의 방향을 읽는 사람. 행복은 품성과 태도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 주제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은 덕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란 것이다. 행복은 단순한 쾌락이나 감정적 만족이 아닌, 이성적 활동으로 덕이 완성된 상태라고 정의했다. 덕의 실천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 덕이다. 지적 덕은 교육과 학습으로 습득되는 지혜, 이해력 판단력이고, 도덕적 덕은 습관으로 형성되는 용기, 절제, 관대함, 정의 등이다. 특히 도덕적 덕은 중용의 원리로 설명된다.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사이의 중용이고, 절제는 쾌락에 빠짐과 금욕 사이의 중용이다. 덕은 본래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동과 습관을 통해 길러진다고 강조한다. 즉, 행동이 쌓여 성품을 만들고, 성품이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공동체적 행복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온전히 행복해진다.
진리란 이름으로 벌어진 기만, ‘루저 스크루턴’(Roger Scruton 1944~2020)의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자>는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라 믿어온 인물들의 사상을 정면으로 해부하며 묻는다, 정말로 그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정신의 등불이었는지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착취의 체계로 보고, 인간을 단지 계급 사이에 낀 존재로 설명했다. ‘스크루턴’는 인간은 단지 구조에 휘둘리는 존재일 뿐인지 묻는다. ‘스크루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인간의 내면, 도덕, 자유 같은 것을 무시하고 모든 걸 사회의 탓으로 돌렸다. 결국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전제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도덕을 무너뜨렸다.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는 말을 아꼈다. ‘스크루턴’는 이 틈으로 엘리트주의나 허무주의자가 스며들었다고 지적한다. ‘멋있게 반항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말해주지 않았다’란 것이죠.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을 욕망과 무의식으로 풀어냈다. 혁신적 이론이지만, ‘로저 스크루턴’은 그가 인간의 행동을 거의 다 병리학적으로만 보았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이나 도덕적 판단조차 ‘억압의 결과’이러나 ‘무의식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스크루턴’는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약화시켰다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롭다’ 외쳤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려 했고, 혁명을 동경했다. ‘스크루턴’는 자유와 책임을 말하면서도 결국은 급진적인 투쟁과 정치적 행동에 기울었다는 것이죠. 철학이 윤리를 지우고 선동에 가까워졌다고 경고합니다. 전체적으로 현대 철학의 흐름이 도덕 해체, 진리 해체, 공동체 해체의 언어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결과 지적 세계와 교육 현장에서 회의주의와 정치적 선동이 득세하게 된 현상을 ‘로저 스크루턴’은 비판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스티븐 래비츠기’와 ‘대니얼 지블랫’의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민주주의는 총과 탱크가 아니라, ‘합법’의 얼굴을 한 내부 권위주의에 의해 더 자주 붕괴한다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등장한 인물이 제도를 악용해 서서히 붕괴시키는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다. 이를 선출된 독재자라 하며, ‘히틀러’, ‘우고 차베스’, ‘푸틴’ 등이 있다. 민주주의 핵심은 제도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정치 문화, 곧 상호 존중과 절제된 권력 행사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품위’에 달려 있다. 정치적 품위는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태도 이상을 의미하며 법과 제도가 허용하더라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절제하며, 정치적 경쟁자와 반대파를 적이 아닌 동등한 민주주의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태도다. 다수당이 법적으로 가능한 절차 변경이나 인사를 강행할 수 있지만, 민주적 균형을 해치는 경우 이를 자제하는 것, 또는 선거에서 승리한 뒤에서 상대 진영의 발언권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치적 품위의 실천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표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존 주디스’가 쓴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표퓰리즘을 단순한 선거 전략이나 선동정치로 보지 않고, 시대적 불만과 사회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 운동으로 이해한다. 표퓰리즘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좌파 표퓰리즘이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복지 확대를 강조한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국가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 수호를 내세운다고 구분한다. 좌파 표퓰리즘은 대개, ‘민중 대 기득권 자본’이라는 구도를 띠며,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정의 문제를 중심에 둔다. 우파 표퓰리즘은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정치 엘리트+외부인이라는 이분법을 강조하며, 국가 정체성과 안보, 이민 문제에 집중한다. 표퓰리즘의 세계화는 ’포쥴리즘이 곧 반민주주의‘라는 흔한 통념에 반기를 든다. ’주디스‘는 오히려 표퓰리즘이 대의 민주주의의 결함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기존 정당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강요되는 정치가 아닌,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사회적 요구이기에 민주주의의 자정작용도 수행할 수 있다. 중요한 전제는 표퓰리즘이 극단화되어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할 경우, 그 힘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위주의로 이어질 위험도 내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비난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 안에 담긴 민중의 좌절과 요구를 제도 정치가 성실히 반영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선택할 자유 없이는 책임도 창의성도 없다. ’밀터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는 자유와 공공선 사이의 긴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공공선을 위해 필요한 정부의 역할은 법치 유지, 계약 집행, 사기와 강제의 억제 등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시민을 보호하려다 시민의 선택권을 제거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는 점을 경고한다. 이런 논지는 한국 사회의 논쟁과 맞닿아 있다. 부동산 규제, 연금 개혁, 교육 정책 등에서 정부가 얼마나 개입하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쟁점이다. <선택할 자유>는 이런 질문에 대해 극단의 해답이 아니라, 자유를 기반으로 한 성찰적 판단을 제시하는 고전적 관점을 제공한다.
2026.04.03.
인생을 묻는 청년에게-2nd
서재경 지음
김영사 간행
첫댓글
국가의 발전
선택과 책임의 문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