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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월환(羅月煥)의 본관은 나주이고, 전남 나주 출신이다. 호는 송죽(松竹)이다. 현재 나주 금성산 시민공원 안에 동상이 서 있다.(2006. 3. 16. 제막)
1924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조(成城)중학교를 마치고,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였다. 박열·송영운·최학주·유치진 등 유학생들과 사귀면서, 아나키즘에 심취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 가, 1930년 중국인 황샤오메이의 소개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제8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난징에 있는 중국헌병학교 및 중국군관학교 교수를 거쳐 중국군 헌병장교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한국혁명당․철혈단 활동에 참여하였고,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아나키스트운동에 참가했다.
이 시기 상하이 일본조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아나키스트 동지들의 주소를 진술하기를 거부하던 끝에 국내로 송환되던 중 칭다오 부근 해상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에 성공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용맹성과 대담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 군관학교 교수 배지를 달고 다니는 특별대우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11일 충칭에서 결성되었다. 류저우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이하유, 금동수, 김인, 이재현 등)들과 나월환·박기성 등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이 주축이 되었다. 주도인물들이 일찍이 일본 유학 시 함께 아나키즘운동에 참여했던 인연도 있었고, 상하이에서 함께 지하공작을 전개했던 사실도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당시 중국신문에서는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 청년 전지공작대 중에는, 중국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군관이 12명이나 있으며,” 그 밖의 대원들도 “수년간 중국군사기관에서 복무하였거나, 상해나 동북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청년지사들”이라고 보도하였다.
결성 과정에서 김구의 지원도 받았지만, 임정과는 상관이 없는 독자성을 견지하였다. 결성 당시 대장은 나월환, 부대장은 김동수,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박기성, 선전조장은 이해평이 맡았고, 대원으로는 조시제·맹조화·평지성·김원영·현이평·송길집·하상기·평지성의 부인·김작생·엄익근·김인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한유한이 예술조장, 이재현이 공작조장으로 활동하였다. 일명 ‘복무대(服務隊)’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30여 명 정도로 시작하여, 광복군 5지대로 편성될 시점에는 100여 명을 상회하였다.
결성 직후인 1939년 11월 18일 충칭을 떠나 싼시성(陝西省) 시안으로 이동한 전지공작대는 시안시 이부가 29호에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군 34집단군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전지공작대원들이 대부분 아나키스트인 사실이 아나키스트에 호의적인 후종난 사령관이 이끄는 34집단군과의 연대 형성을 밑받침한 것으로 유추된다. 즉 “후종난 장군의 스승인 중국인 아나키스트 예징시우와, 후 장군의 비서이자 의형제인 후바오이라는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공이 컸다”는 회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원 중 16명은 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에 입교하여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나머지 대원들은 시안을 근거지로 삼고 퉁관을 경유, 뤄양·쟈오짜·윈청·린펀·타이위앤·스쟈좡·베이핑 등지로 연결되는 중국군 전구(戰區) 일선공작에 투입되어,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하여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을 모집하는 등, 싼시성·산시성(山西省)·허난성 일대와 화북지역을 무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또 농해선 지구, 허베이성과 산시성 남부지역으로 대원을 파견하였고, 중국군의 항일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고,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여 일본군 포로들을 설복시켰고, 우리말 방송과 우리글 선전문건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 점령지구에 있는 한인동포들을 항일독립운동 대오에 합류시켰다.
이들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0년 5월경부터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김동수·이해평·김천성·박영진·김용주·이월봉·이삼녀 대원은 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태항산 링추안(陵川)을 거점으로, 일본군 36사단 주둔지역인 루안현에 거주하는 6천여 한인사회와, 도청선(瀋陽-焦作) 연변지역인 신샹(新鄕)·쟈오쭈어(焦作)·쇼우(修武) 등지를 무대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산시성 장즈현(長治縣) 샤오동커우(小東口)라는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장즈현 루안성 및 허난성의 쟈오쭈어 등지로 진출하였다. 특히, 김천성은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성 내에 잠입하여 문응국·이병곤·박춘섭·정일명·김형철 등을 초모하고, 다시 일제 여단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이도순·고여순 등 40여 명을 포섭하여, 일부는 현지에서 공작 업무에 종사토록 하고, 일부는 시안으로 후송하여, 후종난군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이도순·박춘섭 등은 중국유격대와 함께 루안성 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 김용주·박영진 등은 허난성 쟈오쭈어에 잠입하여, 최봉진·송철 등 10여 명을 포섭하고, 김천성 등은 다시 스쟈좡을 거쳐 베이징·텐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조직과 활동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전지공작대의 활동범위가 시안에서 퉁관을 경유하여 뤄양·장즈·쟈오쭈어·윈청·린펀·타이위앤·스쟈좡·베이징 등지를 연결하는 산시성 및 허난성, 그리고 화북지역 일원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1941년 1월 1일 나월환 대장이 전 대원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1942년 3월 1일 지대장 나월환이 살해된 이후에는 송호성이 지대장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5월 제2지대로 재편성되었다. 기관지로 『한국청년(韓國靑年)』을 발간하였다.
『한국청년』발간사 에서는, 전지공작대의 의의와 임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② 우리들의 역량을 배양 충실하고 공헌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최후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공작을 실천하는 중에 학습한다. 우리들의 혁명선열을 배워 알고, 혁명의 이론과 기술을 학습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작 실천 중에서의 일체의 약점과 곤란을 극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적에게 구사(驅使)되고 노예가 되는 동포를 건져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들은, 항일의 한국청년 동지들을 우리들의 진영으로 집합하여야 한다. 한-중 양대 민족 연합 항일, 공모(共謀) 해방의 진영으로 집합하여야 한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될 공동운명에 처해 있으며, 중국의 항일전 승리는 곧 한국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한국청년들은 중국의 항일전을 한국의 해방전쟁으로 알고 적극 참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작 실천 상에 있어서의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항일 한국청년을 중·한 양대 민족의 공동 항일진영으로 집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 대원은 자신들의 활동 목적으로 “중국항일전쟁을 돕는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은 중국군 전구(戰區) 내 각지에 있는 광대한 군중 속으로 들어가, 보다 많은 동지와 역량을 획득함으로써, 전지공작대의 진영을 확충하고, 중국항전역량과의 협조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역량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전지공작대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중국군에게 보낼 겨울옷 마련에 필요한 경비 모금을 위한 연극공연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2,000벌의 솜조끼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4천여 원(元)을 마련한다는 목표로, 1939년 10월 19·20일 저녁 7시 반 두 차례 충칭 대량자(大樑子)청년회에서 연극을 공연하였다. 시안으로 출발하기 전 충칭에서의 고별도 겸한 공연에서는 ‘국경의 밤’ ‘삼강호(三江好)’ ‘재회〔重逢〕’ 등을 공연하였다.
충칭에서 시안으로 이동해 온 직후, 일부 대원은 태항산으로 출발하여 유격전에 참가하였고, 잔류대원들은 연극공연을 통해 중국군민과의 유대강화를 도모하였다. 1940년 5월 20일부터 10일간 서안 성안 남원문 가설극장에서 거행된 「국경의 밤」, 「한국의 한 용사」, 「아리랑」 연극 공연은 특히 중국 군·관·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국경의 밤」은 압록강 변 한·중 국경 상에서 엄동설한 폭풍이 노후(怒吼)하고 백설이 흩날리는 밤, 적 일본군의 수비가 엄중한 철조망 방어 진지를 한·중 양국 의용군이 전복후월(前覆後越)로 뚫고 들어가서 적을 섬멸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의 전투극이었다.
「한국의 한 용사」와 「아리랑」은 한유한이 시나리오를 썼는데, 「한국의 한 용사」는 1940년 정월 23일 싼시성 남영제 성내에서 일어난 실제 상황을 극화한 것이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일본헌병대 통역원으로 활동하는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그는 유격활동을 하다가 붙잡힌 중국인 포로들의 통역을 하면서 일본군 헌병대 대장을 속여, 수많은 유격대원을 구해 주었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중국 유격대장의 기개를 보여주고, 통역원 역할의 한국인이 끝내 그를 구해줌으로써, "한국청년은 중화민족의 진정한 동지임을" 확인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의 애원조(哀怨調)를 그대로 살린 가극 「아리랑」은 40년 전 금수강산 한국의 어느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난 목동과 촌녀가 아리랑산 아래에서 순진 난만한 애정의 노래로 즐기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부부로 생활하는 동안에 한반도가 왜적에게 유린되고, 아리랑산에 일장기가 꽂히는 것을 보고, 이들 부부는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리랑산 위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꽂기 위하여, 적의 포화 속에서 혈전감투 한다는 줄거리였다.
연극 공연은 서북문화일보·서경일보·공상일보 등 당시 서안에서 발행되던 신문의 보도를 통해 큰 호평을 받았는데, 이들의 연극 공연은 중국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한·중 공동항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전지공작대가 시안을 중심으로 중국 34집단군과 연대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무렵, 1940년 9월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되고,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해 왔다. 그리하여 임정에서 파견하였던 군사특파단은 곧 총사령부에 합류하였고, 광복군은 1·2·3지대를 편성하였다. 이어서 임정과 광복군 측에서는 전지공작대와의 연대, 나아가 흡수를 시도하였다. “임정에서는 전지공작대를 산하에 포섭하려고, 대장인 나월환을 중경으로 불러 귀빈관에 투숙시키고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증언이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같은 시기 조선의용대 측의 접근과 회유 시도도 있었지만, “나월환이 자기 부하들에게 붉은 물이 옮길까봐 의용대원들과의 접촉을 은밀히 단속하는 까닭에 쌍방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는 기록이 시사하듯, 나월환 지대장은 조선의용대와의 연대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 결과 “우리의 군사역량을 국군인 광복군에 집중하여 그를 건전 발전시키는 데서만 우리의 혁명목적을 달할 수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전지공작대는 광복군 합류를 결정하였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시안시 이부가에 있는 전지공작대 본부 대강당에서 거행된 제5지대 성립식에는 임정 조성환 군무부장, 황학수 광복군총사령 대리를 비롯한 서안총사령부 간부, 전지공작대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은 대원들을 대표하여 “본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방략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한국광복군 공약을 준수하며, 한국광복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직무에 충실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지성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하기를” 맹세한다고 선서하였다.
이로써 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다. 나월환은 5지대장에 취임하였으며, 징모제5분처 주임위원직도 겸임하였다. 5지대는 전지공작대 대원들을 골간으로 하고, 이들이 모집하여 한국청년훈련반에서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원들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00여 명을 헤아리던 전지공작대 대원들이 5지대 대원이 됨으로써, 창건 초기 30여 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의 병력이 크게 증강되는 효과를 낳았다.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이 출범했다. 총사령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광복군은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져 중국 전역이 전장으로 변하자, 대륙 여러 곳에 흩어져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군사 조직들을 임시정부 산하에 묶어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을 통일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조직되었다.
광복군은 이준식·공진원·김학규를 각각의 지대장으로 삼은 3개의 지대로 편성돼 출범했고, 1941년 1월에는 주로 전지공작원들로 구성된 제5지대가 발족해 전후방공작 업무를 수행했다. 나월환이 이끈 이 부대가 제4지대가 아니라 제5지대로 명명된 것은 이런 공작활동 때문이었는데 첩보활동을 하는 집단을 ‘오열’ 또는 ‘제5전선’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군에 호응해 적의 후방에서 각종 모략ㆍ파괴ㆍ간첩 활동을 하는 비밀 집단이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을 ‘오열(五列 또는 제5전선)’이라고 부르는 관습은 스페인 내전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 내전 때, 4개 부대를 이끌고 마드리드 공략 작전을 지휘한 파시스트 반란군 측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마드리드 시내에도 우리들에게 내응하는 제5부대가 위장해 잠입해 있고, 결국 수도가 이 제5부대에 의해 점령될 것”이라고 프랑코 장군에게 보고한 데서 비밀공작부대라는 뜻의 ‘오열’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그 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간첩ㆍ스파이’와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고종석 편집위원, ‘오늘 속으로, 光復軍’, 한국일보 2001년 9월 17일, 5면)
편성 당시 제5지대의 간부는 지대장 나월환, 부지대장 김동수, 정훈조장 이하유, 훈련조장 박기성, 공작조장 이재현 등이었다. 이후 5지대는 주로 일본군 점령지역을 무대로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6월 초 나월환 지대장이 보계포로수용소에서 “새로 동지 ××명을 인솔하여 돌아와,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훈련을 받도록 했다.” “적후공작에 나갔던 동지 김××가 새로 동지 ××명을 인솔 귀대하여, 이들을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훈련받도록 했다.” “7월 중순 공무로 중경에 갔던 나월환 지대장이 일을 마치고, 8월 초 한유한·강(姜)× 동지 등과 함께 싼시성으로 돌아왔다.” “8월에는 김 동지가 동지 ××명을 인솔하여 돌아왔다”는 등의 기사는 초모활동을 통해 병력을 증강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전지공작대 대원들은 중국 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활동을 벌였다. 모집 한인청년들은 시안으로 후송되었고, 전지공작대에서는 34집단군 중앙전시간부훈련반 제4단 내에 개설한 특과총대학원대(特科總隊學員隊) 한국청년훈련반(약칭 ‘韓靑班’)에 이들을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을 마친 청년들은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1939년 11월 결성 당시 28명의 대원은 1940년 말에 이르면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한청반은 2개 구대로 편성되었고, 5지대가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지대장인 나월환이 대장으로 운영을 총괄하였고, 부대장 겸 제1구대장: 김동수, 제2구대장: 박기성, 정치지도원: 이하유, 군사교관: 조시원·조경한·송호성 등이 전술·역사·정신교육 등을 담당하였다.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이 ‘3:7’의 비율이었는데, 이는 대원들이 대부분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모집한 인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던 사실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교육기간은 3개월 정도였고, 1942년 2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3기생을 배출했다. 이들에게는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1기생에 해당하는 이들은 광복군 5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생활 모습을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두 번의 호루라기 소리에 기상, 마당에 집합하여 ‘애국가’를 불렀다. 그런 다음 공원으로 가서, 달리기·독서 또는 한담을 나누다가 부대로 돌아와 교육을 받았다. 술과(術科) 훈련반의 신임대원은 ‘하나 둘’ 구령에 맞춰 기본동작을 반복하고, 실내에서는 중국어 성조연습을 하였다.
아침식사 후 저녁식사 때까지 6시간 반 동안 ‘혁명문제’, ‘한국어문’ 등의 학과수업 두 과목을 수업하고, 자습·낮잠·진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반찬 두 가지와 국 한 가지였다. 저녁식사 후 ‘과외활동’으로 공놀이·장기놀이·노래·세탁 등을 하였고, 해가 지고나면 방 하나에 1개씩 있는 전등불이 켜졌고, 대원들은 자습·편지쓰기·독서·원고쓰기·일기쓰기 등을 한 다음, 8시 반에 점호를 받고, ‘전지공작대 대가(隊歌)’를 부르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마쳤다.
훈련생활 모습을 전하는 한 대원의 글에 따르면, 1941년 7월 5일 새벽 2시에 기상하여 김강 부대장으로부터 주의사항을 듣고, 2시 반 가는 빗방울 속에 시안 근교의 종남산(終南山)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5시 들판에서 휴식하며 밀가루 빵과 무장아찌로 요기를 하고, 오전 9시 목적지인 종남산 밑의 천자두촌에 도착하였다. 마을 서남쪽에 있는 사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는 수개 조로 나누어 자유 시간을 가졌다. 어떤 대원은 마을에 가서 저녁식사 반찬으로 쓸 돼지를 사왔고, 일부 대원은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깃발을 꽂은 장대 등을 든 중국인 수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하여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사연을 알고 본 즉, 가뭄이 계속되어 천자두촌 주민들은 보름 동안 기우제를 지내왔고, 마지막 날인 이 날 이웃마을인 화리촌(和理村)의 주민들이 와서 함께 기우제를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화리촌 주민들이 천자촌의 사당 앞을 무례하게 지나감에 따라, 이 일이 사단이 되어 두 마을 주민 간에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 동네싸움으로 번졌다. 이 때 나월환 대장이 나서서 “우리는 외국인이다. 오늘 이 곳에 와서 여러분이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생각해 보라, 지금은 일본 놈들이 침략해 있는 때이다. 여러분은 왜 일본 놈들을 상대해서는 이렇게 싸우는 투쟁정신을 갖지 못하는가?”라고 연설하였다.
연설에 감동한 두 마을 주민들은 화해하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중한군민연환대회(中韓軍民聯歡大會)’라 할 만한 뒤풀이가 벌어졌다. 5·600명의 두 마을 주민이 참여하여 노래 시합·하모니카 연주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대원들은 두 마을 주민들이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호의를 뒤로 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지대장인 나월환 암살사건이 발생하였다. 1942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제5지대 본부에서, 후종난부대에서 교부받은 영화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을 때, 살해되었다고 한다.
며칠 뒤에 제5지대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재의 시안시 롄후구 롄후공원 안에 있는 폐쇄된 우물 속에서 나월환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1년 전에 행방불명된 현이평의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사건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당시 임정이 전지공작대 활동을 평가하고 전지공작대를 임정 산하로 끌어들이고자 하였고, 그 일환으로 대장인 나월환을 충칭으로 초치하여, 귀빈관에 투숙시키고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지공작대는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립한다.”는 신념이 강하였기에, 나월환은 충칭에서 시안으로 돌아온 뒤에도 임정 측의 제안을 선뜻 공개하지 못하였다. 결국 전지공작대 내부에서는 나월환의 태도에 의심을 갖는 시선이 생겨났고, 급기야 비뚤어진 ‘영웅심’에 휩싸인 한 대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지공작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대원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고, 광복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대원들이 광복군총사령부의 지시에 순종하기 보다는, 전지공작대 시기 이래의 독자적인 입장이 강하였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지대장인 나월환은 총사령부의 지시와 대원들의 반발 사이에서 적지 않은 리더십의 어려움을 겪었다.
어쨌든 나월환 지대장의 사망으로 인해,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해가던 제5지대는 구심점을 잃었을 뿐 아니라, 광복군 전체가 커다란 동요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 중 20여 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8명이 사형 내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시 광복군총사령부 편련처장(編練處長) 송호성이 후임으로 5지대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이어서 4월 1일 기존 제1지대·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그의 독립운동 이념의 밑바닥을 형성한 것은 아나키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기본질서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파악하는 아나키즘 입장에서 보면, 일제의 침략은 민족 문제 이전의 인간·인류 차원의 문제였다. 그러기에 그의 항일정신과 독립을 향한 의지는 인간관계의 모순과 이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 즉 일본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에 저항하는 해방을 지향하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의 바탕 위에,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 제 민족이 처한 국제환경에 대한 적응 노력이 그의 독립운동을 떠받쳐 주었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인민전선 전술’에 의거하여,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반강권 투쟁논리도 변화를 요구받기에 이르렀고,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선 항일, 후 아나키즘사회 건설’이라는 우회적인 선택을 통해 반파시즘․반일운동전선에 합류하였다.
“이 전쟁이 강권에 반대하고,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면, 이 무력이 민중을 옹호하고 민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나키스트도 전쟁에 참가하고,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항일전쟁 참가를 정당화했다. 이로써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척‧협공 당할 수 있는 우려를 제거하고, 반파시스트‧반침략전쟁이라는 명분하에 제2차 세계대전에 능동적으로 대처‧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지는 중일전쟁 발발 등 정치 환경의 변화를 계기로, 재중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전선의 참여를 통해 민족혁명을 우선 달성하고, 그 후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한다는 단계론적 논리로 나아갔다. 민족국가 수립을 지상과제로 하는 민족혁명을 우선 과제로 설정함에 따라,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봉착하였지만, 이 경우 ‘정부나 국가는 전 민족이 자유연합의 합의 하에 자율적으로 조직한 기관을 의미한다.’라는 확대된 논리로 자가당착의 우려를 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선상에서 보수 우파 민족운동세력과의 협동전선이 가능해졌고,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연대의 대상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나키즘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보수 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김구계열과의 연대와 합작은 아나키즘의 본령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재중 한인아나키즘운동의 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기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하여 반일‧반파시즘 국제연대의 차원에서 민족주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선 항일, 후 아나키즘사회 건설’로 활동방향을 재설정해 갔다고 설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1930년대 중․후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아나키스트그룹의 일반적인 항일투쟁 인식 위에서, 나월환 역시 이 같은 세계관 및 혁명관에 기반 하여, 아나키즘에 공감․공명하는 한인청년들을 조직화하여 전지공작대를 결성하고, 이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현실을 가리켜, “30여 년 전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점령당한 뒤, 국가의 독립을 상실하였으며, 3천리 강산은 자본주의의 소비시장과 원료 공급지로 변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동아시아 대륙침략의 교량지로 전락하였다. 잔인하게 경제·정치·군사 방면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3천만 동포들은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기에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청년’들이 짊어진 역사적 임무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며, 한국 땅에 있는 모든 일본제국주의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다. 또한, 독립과 자유가 보장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며, 3천만 동포들을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며,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면한 과제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중국항전의 승패는 조선민족 그리고 동아시아 약소민족의 해방·독립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복국운동과 항일전쟁 활동은 이미 불가분의 관계이며,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 투쟁 기간 중에 모든 분산된 한국 혁명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중국의) 항전을 도와야 한다. 다른 방면으로는 한국 무장대오를 건립하여 조국 해방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놔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상 설명한 두 가지 임무-역사적 임무와 특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탄생된 혁명 단체”가 바로 전지공작대인 바, 전지공작대원들은 아래의 5가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둘째, 대적활동을 하고 있는 사병들은 적군 군벌들의 진상을 폭로하고 침략의 전의를 밝혀냄으로써, 전국(戰國)들로 하여금 전쟁을 혐오하고 반대하도록 한다. 이는 정치적 수단을 이용하여 적군과 괴뢰군(만주국군)을 와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셋째, 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학습하여 전국 상황을 정탐하고 그들의 진상을 폭로한다. 이는 우군의 전투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적군의 음모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넷째, 적 후방 지역에 침투하여 한교(韓僑) 세력을 쟁취해내며, 한국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전선지역 혹은 적후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쳐 적군과 전투를 한다. 이러한 전투에서 한국 혁명군의 기반을 형성해야 한다.
다섯째, 내국의 동포와 전국 민중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불러일으킨다. 문화세력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혁명운동을 일으키며, 한국의 복국을 촉진시킨다. 혁명 사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혁명 임무 역시 매우 막중하지만,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반침략’, ‘반파시스트’ 구호로 대변되던 제2차 세계대전기 국제정세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일 전략의 일환으로 ‘염전(厭戰)’, ‘피전(避戰)’, ‘반전(反戰)’ 사상을 제안하고 있는 사실과, 일본군 점령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항일투쟁 대오 속으로 흡인함으로써 일본군의 후방을 약화․와해시키는 동시에, 전지공작대 및 광복군의 전투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두자고 주장한 데에서는 그의 전술적 사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그는 항일투쟁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혁명’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기본조건으로 ‘혁명정당’과 ‘혁명무력’을 꼽았다. 그리고 “혁명정당이 있을 때 의지 통일의 실행과 역량의 집중을 꾀할 수 있으며, 혁명의 무력화를 기르고 영도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혁명정당이 주체가 되어 혁명의 무력화를 이룩하고, 이를 지휘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과 소련의 경우를 예로 들어가면서, “혁명의 무력이 조직화되어 있어야만 혁명당원들이 당과 군대의 기율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전국의 분산되어 있는 많은 힘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견의 충돌로 인하여 분열이 발생하고 생활의 나태함으로 인한 타협점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곧 혁명 성공의 관건이고, 이를 우리는 역사의 기록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혁명을 효율적으로 추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추동력으로써 ‘혁명무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혁명무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상황에서는 혁명이란 절대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조선동지들이 혁명운동을 실현하고 나라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혁명의 무력화와 혁명군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군대를 건립해야만 한국의 조국회복운동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고, 혁명군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면 미래의 조국회복운동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혁명동지 들에게 성심성의로 일치단결하고 한국 혁명의 건군운동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자고 힘껏 소리쳐 외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혁명동지들이 한 마음으로 일치단결하여 자국의 정당을 완비하고, 혁명을 무력화함으로써, 오늘날 강력한 한국 혁명군대를 건설하기”를 희망하며, 이럼으로써 비로소 “독립·자주의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동쪽에서 우뚝 설 것이며, 세계 속에서 그 기상을 떨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설파하였다.
요컨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주도할 독립운동정당과 그 지휘를 받는 군대의 기율이 확립되어야 하고, 분산된 혁명역량을 결집하는 일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며, 이는 혁명무력을 조직화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리라는 생각이었다.
또 조선의용대 측의 접근과 회유공작에 직면하여, “나월환이 자기 부하들에게 붉은 물이 옮길까봐 의용대원들과의 접촉을 은밀히 단속하는 까닭에 쌍방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조선의용대 대원의 기록은 나월환의 반공의식을 알려주는데, 이는 당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일반의 공통된 이념적 성향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월환 - 한국 청년을 정예병사로 길러낸 광복군 지대장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