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는 다른나라에 선교할때에 그나라에 교리를 전파하였지만
성서는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리서안에 성서의 내용이 다 녹아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성서를 전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나라 말로 성서를 번역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교우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회장들은 성서전체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인 것은 필사본이라도 가지고 있었을것입니다
중국번역본도 있었을것이고
조선시대 박해시대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은후로
천주교회가 인정을 받았는데 한동안까지 그러니까 1977년 부활때에 개신교회와 공동으로
공동번역성서를 발간하기까지는 한질의 성서는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회때부터 이단 논쟁이 일어나서 하느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인성만 지니신분인가 아니면 인성 과 신성을
다 지니신분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주교들이 모여서 논의하게 되었으니
바로 공의회이다 콘스탄티노플 니케아공의회등 초기교회의 7개의 공의회였다
이때에는 동서방교회가 다 참석하였다
전부다 동방교회에 있는 지역에서 열렸다
그이후 동서방교회는 신앙고백인 신경에 나오는 기도문으로 인해서 갈라져서
따로 공의회를 열게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라테란 트리엔트공의회는 서방교회단독으로
열리게된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서방교회지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나가서 공의회는 교리를 다시
재적립하고 갈라진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던 것이기에
교황청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성서가 정경화되기이전부터 성서에 들어있는 본문들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필사본형태였다 필사본형태이기 때문에 원문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 여러 수사본이
통용되기도 하고 누가 언제 작성되었는지 잘 알수없는 문헌들도 함꼐 통용되었던 것이다
어떤이는 이를 문서를 자기마음대로 묶어서 내기도 하였던 것인데
유대학자들이 모여서 성서에 들어갈 문헌들의 목록을 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약은 여러경로를 거쳐 아타나시아 주교에 의해서 정립되었다가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신양 27권은 확정됩니다
성서를 본적도 없는 조선 빅해시절에는 교우촌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수가 있었을까 입니다
중국의 문물을 접하던 일부 종교지도자나 조선에 파견된 서양선교사들은
성서를 접하였을것이지만 이를 조선신앙공동체에는 직접 전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나 선교사들의 말씀을 직접 듣거나 아니면 누구를 통해서나
문헌을 통해 접하게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후 100여년전에 대동강에 들어온 함대에 실려진 조선말성서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리 조선말로 성서를 번역해서
배에 싣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조선군의 저항을 받아서 직접 조선사람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그 책이 강물에 떠다니는것을 본 조선사람이 그것을 벽지로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것이다
과거처럼 종이도 활자도 귀한시절이어서 성서보급이 어려운시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개신교회가 갈라진것은 이런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 보급한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16세기중반의 쿠텐베르크의 활자발명이후였던 것이다
그들의 영향으로 루터는 독일어성서를 펼친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개신교회에 의해서 성서는 함부로 해석되고 있다고 판단해서
교호가 성서의 소유와 해석에 엄격한 기준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성서는 거의 사제나 수도원의 독점물이 되었고 평신도는 성설ㄹ 직접 만나기보다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강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되었던 것이다
서방교회는 한동안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사이에의 알력으로
교화이 프랑스지역에서 감금되는 사태도 빚어졌던 것이다
예수회는 유럽열강속의 소용돌이속에서 한때 그 수도원이 활동이 정지되고
중국에서 선교단들이 철수하던 사태가 벌어진것입니다
초기 조선에 영향을 준 예수회선교사들이 그이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로
대처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사실 저의 생각은 우리가 성서를 접하는데는 가장 큰 걸림돌은 매일성서책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책의 탄생은 천주교회가 공동번역책을 1977년에 발간되었지만
쉽게 번역하였기에 다소 원뜻과 달리 해석된부분도 있고 결정적인것은 판권에 관심이
없었던 천주교회가 그 판권을 공동작업자인 개신교 교단이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개정판을 내거나 아니면 추가로 발행할떄에는 개신교단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떄문이었지요
그래서 선교200주년을 준비하면서 천주교회는 자신의 한글번역성서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쓰는 성서를 발간하게되는데
성서번역을 위해서 몇년간 기간이 걸렸지요 그리고 조금씩 번역하다 보니까 그랗게되었는데
미사는 진행되어야 하고 미사때에 독서를 위해서 매달 필요한 양만큼 임시로 발간했으니
오늘날 매일미사책이 출간된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때에 제대위에 올라온 큰책을 볼것입니다
제대위에 있는 것은 미사전례에 관한 것이고 독서대에 올라와있는 것은
성서본문과 화답송과 같은 부분이었지요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이를 제공되지 않았기에 그 대신에 매일미사책이 사용되었던
것인데 이들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도 이의 사용이 너무 많다보니 이를 금지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소지하면서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미사때 독서대에서 흘러나오는 성경을 귀로 듣기보다는
소지한 매일미사책을 눈으로 따로 읽는것이 보편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각가정마다 보유한 성서는 그냥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성서를 미사때에인용하는 부분적인것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독서대에서 흘러나오는 성귀를 듣는것이나 자신이 소지한 메일미사책을
눈으로 따라 읽는것이 무엇이 차이가 나느냐라고 말할수는 있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차이가 분명히
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이후 주례신부님의 강론이 잘 들리지 않게 된다는것입니다
그런점에서간혹 주일학교미사때에 빔프로젝트를 띄워놓고 거기에 미사전례내용이나
성서본문을 띄워놓는것도 주일학교학생들이 성서를 잘 듣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주례사제는 강론에 집중할수가 없기에 단지 아이들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퀴즈로
이 소중한 시간을 떄우게됩니다. 그렇게 잘못된 습관들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어른들의 욕심이고 수준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서책을 구입할때에 3가지 종류를 구입했지요
휴대하기 쉬운 작은것부터 간혹 들고 다니면서 볼수있는 중간것 그리고
집에 두고 볼수있는 큰것까지 였지요 그이후에 이책들도 성서를 휴대폰으로 볼수가
있어서 작은 성서를 제외하고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수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는 부분적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서로만 전달받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서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다 안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함꼐 할수있는 부분부터 알아간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중에서 성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만 사실상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아는 사제나 수도자는 드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임없이 성서를 읽고 이를 생활중에서 실천하려는
노력과 습관이 필요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회합에서 성서주제발표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노력을 언제 ㅈㄹ실하게
해왔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0여년전에 창설자신부님은 절은이들이 성서를 많이 접하게 하려고
성서형재회를 창설하시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을 담아 헌장으로 반포했는데
우리들중 누가 이를 하려고 했든가를 먼저 성찰해봐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