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연보로 본 일생 돌아보기
楡山 송 영 기 - 시조시인
'제86회 한국문예작가회 2025년 신년 연찬회'를 1월 10일(금) 오후 1시 수원갈비스토리에서 시행함에 있어 강의 주제를 '만해 한용운 연보로 본 일생' 돌아보기로 정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와 독립운동과 문학에 두루 조예가 깊고 큰 업적을 남긴 큰 스님 이시지만, 시인으로서도 너무 고명하여 우리나라 사람은 모두 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스님은 사진에 남은 삭발한 둥근 머리와 회색 승복을 입고 신라 거리를 다니는 분
같은 수식어 일뿐이고, 대중들은 시인으로 기억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연보를 살펴보면 대단히 다이나믹한 삶을 사신 분으로 평범하지 않은 일생이었으며 흥미가 있고 새로운 모습이 보여 친근하고 인간적인 분입니다.
만해 한용운(1879 ~1944, 향년66세) 선생님의 발자취 대강을 돌아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전, 1879년 8월 29일에 충남 홍성군에서 아버지 청주 한씨 한응준과 온양 방씨 어머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는 데, 어릴때 이름 즉 출가하기전 속명은 한유천 (韓裕天)이며 자(字)는 정옥(貞玉)이었습니다.
그는 6살에 서당(書堂)에서 한문(漢文)을 수학하고, 9살에는 중국 한문으로 된 <서상기 西廂記>, <통감 通鑑>, 서경의 <기삼백주 朞三百註> 같은 책을 섭렵했다할 정도로 매우 조숙한 신동이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벌써 우리 현대인의 삶과 살아 온 나날을 돌아 보고 비교해 봐도 만해 선생님은 참으로 용감하고 학구심이 대단했으며 비범한 인물입니다.
그는 14살에 천안 전씨인 전정숙 (全貞淑)과 혼인을 하였고, 18살에 고향인 충남 홍성 일대에서 의병에 가담했는 데 실패하여 19살에 고향을 떠나 법주사, 월정사, 백담사 등 여러 절로 거처를 옮겨가며 정착하지 못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조금 있다가 다시 26살에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가 아예 출가를 하여 불문에 들어갔습니다.
출가한 26살 그해 12월에 맏아들 '한보국'이 태어났 는 데, 출가하기전 고향집에 있을 때 이미 잉태한 자식입니다. 스님은 줄곧 대처승(帶妻僧)으로 살았으며 '승려도 사랑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태고종과는 달리) 정통 조계종에서는 받아 지지 않는 주장 일뿐 용납은 커녕 오히려 일언지하에 배척 될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이런 모습에서 우리 일반인은 어딘지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수 있지 않겠나 여겨집니다.
그리고 27살 1월달에 백담사 김연곡 (金蓮谷) 스승으로부터 득도를 하고, 영제 스님에게서 수계 (受戒)를 받았는 데, 이때에 받은 법호가 <만해 萬海>, 법명은 <용운龍雲>으로 지어 받아서, 태어나 부모가 지어준 속세의 이름 <한유천>을 버리고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이란 승려 이름으로 구각을 벗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속인(俗人)을 잊었습니다.
28살에는 블라디보스톡에 견문을 넓히려고 여행갔었는 데 일진회 첩자로 오인받아 고초를 당했고, 33살때는 만주를 여행하다가 또 일본 첩자로 오인 받아 총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합니다. 이 때 머리뼈에 맞은 총알 파편이 일부 남아서 일생동안 머리를 흔드는 '체머리(푸두선)'증세를 가졌다 합니다. 기록이 있기에 이 사실도 알지 '야인시대' 등 드라마로 봤을 때도 그런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32세 때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하였는 데, 34살에는 또 '불교대전'을 편찬 코자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한문으로 된 고려대장경(1,511부 6,802권)을 열람했다하니 이 또한 참 경이롭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잘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물론 우리나라 큰 스님들은 모두 세속의 박사와 같은 수준으로 한문이나 한시에 깊은 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35살에는 이미 32살때 탈고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하였고, '조선불교회' 회장 직에 취임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까지가 스님 일생의 1기 쯤으로 선을 긋고 싶으며, 그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삶의 획기적인 2기로 보고 싶습니다.
39살(1917년 12월 3일)에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서 캄캄한 밤중에 좌선을 하고 있었는 데, 바깥에서 갑자기 바람에 물건이 탁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으니, 스님은 <오도송 悟道頌>을 읊었습니다. 한소식을 한것이죠.
이 오도송보다 훗날 12년후 47살때 지은 <님의 침묵>도 만해 한용운의 대표적인 시로 우리 모두 줄줄 외우듯이, 오도송은 선사들이 수십년 동안 수행한 '정신의 결정체'이고 '문자 사리'라고 하는 데, 큰스님이 된 만해 스님의 돈오돈수 頓悟頓修의 결과물로써 그 <오도송>은 이러 합니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가 가는곳 어디나 고향이건만
㡬人長在客愁中 그 몇이나 나그네 시르메 잠겨 있던가
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할을 질러 삼천대천 세계를 부수니
雪裏桃花片片紅 눈속의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었더라.
(* 片片飛 -> 片片紅 : 눈속에 복사꽃 분분히 날리네 -> 눈속의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었더라 / 추남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신 송만공 宋滿空선사(1871-1946, 향년 75세)는 만해의 도반道伴이며 지기知己로 오도송 시문을 듣고 말구末句 한글자를 비飛에서
紅으로 고쳐주며 조언하기를, 그러면 한시漢詩의 운자韻字도 맞고 詩句의 색체대비도 되어 좋다고 해서 그리 받아들였다.
41살(1919년 1월)에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해주고 <공약3장>을 추가했으며, 3월 1일에는 서울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 체포되었고, 9월에 유죄판결을 받았다.그리고 10월 30일에는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선고를 받았다.
42살에 3.1운동 참회서를 내면 사면해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거절했지만, 다행히 그 이듬해 12월에 출옥하였다.
47살(1925년 8월)에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고, 그 이듬해(1926< 48세)에 시집 <님의 침묵> 을 발행했다.
51살(1929년)에 조병옥,송진우 등 여러 인사들과 '광주학생의거' 전국 확대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53살에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고, 54살(1932년)에 투표에서 최고 득표로 '불교계 대표인물'이 되었으며, 그해 12월 일제의 황민화정책하에 유명인사 매수를 위하여 식산은행이 성북동 국유지를 만해에게 주겠다면서 유혹 했으나 거절했다고 함.
첫 부인과 이혼한 만해는 55살(1933년 10월)에 간호사인 유숙원(兪淑元)과 재혼하였고, 슬하에 딸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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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 성북동에 벽산 스님이 집지을 터를 만해에게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등 여러 우국 인사들의 성금으로 심우장(尋牛莊)집을 지었다.
흔히 일제총독부를 보지 않기 위하여 심우장을 남향이 아니라 북향(北向)으로 짓고 살았다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그것은 와전된 것이고, 오로지 그곳의 지형(地形) 때문이었다고 만해스님의 딸이 말했다고 한다.
1981년에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기념관을 개관 했지만, 1990년에 남한산성으로 기념관을 이전, 1998년 5월 20일 확장 개관했으며, 만해의 유품등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전보삼 교수가 관장입니다.
만해 기념관 전보삼 관장을 2년전 여름 한국문예작가회 여주 연수원 가는 길에 들려 관람을 한바 있습니다.오늘 여기 강의에 참석한 인송 오호현 친구와 그 때 남한산성에서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저의 명함에서 경북 김천고金泉高 출신임을 알고, 만해 한용운과 김천고등학교(김천고보) 설립자 최송설당(崔松雪堂)여사의 학교 재단법인 설립에 조언을 했던 비사를 제게 말해 주어
처음 알게 되었다.
즉 고종/엄비의 수상구이자 영친왕의 보모였고 하사한 서울 코오로 빌딩 근처 무교동 대저택에 사시던 최소설당 여사는 말년에
재산을 정리하여 사찰(해인사)에 전부 기증할 생각으로 성북동 심우장 만해에게 가서 상의하였다. 만해는 절은 이미 부자이고 그곳에 전각을 지은들 뭐할거냐. 그리고 그 절에는 친일 스파이들이 많으니 소용없다.차라리 거금을 육영사업에 쓰고, 장차 이 나라를 살리는 동량영재 棟梁英才를 길러라해서 방향전환을 했다고 말했다.
만해는 61살(1939년 8월 26일)에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했고, 62살(1940년)에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하였습니다.
끝으로 66세(1944년 6월 29일)에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니 다비를 한후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학승(學僧)이자 큰스님이요, 독립운동가였으며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선사의 향년 세수는 66세, 출가하여 스님이 된 법랍은 39년으로, 한 세상 사나이로 잘 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