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오프 (외 7편)
박지우
등급이 궁금한가요 페이스오프한 얼굴들 비상구가 없
는 얼굴들 기형을 먹고 사는 얼굴들이 스냅사진으로 앉
아 있는 전철, 눈들이 스윙해요 세상 너머 너머로 점프
해요 바스락거리는 얼굴들 페이스북 초대장이 쌓이고 트
위터의 사진을 공유해요 잃어버린 철학을 찾고 싶어 인
증마크를 찍어요 세상이 손바닥에 펼쳐져요 소셜쇼핑을
해요 껍데기의 눈들이 스윙해요 점프하다 쇼팽의 피아노
에 숨은 내가 들키고 말아요 비밀을 조각조각 떼어내요
페이스오프한 얼굴을 전송해요 지금 나에 대한 보고서
가 떠돌아 다녀요
과녁
화살표가 넘쳐나는 도시의 심장은 온도계가 없어
환전되지 못한 생각들
머릿속에는 숫자만이 가득하지
알 수 없는 외국어가 거리에 떠돌고
물음표는 늘 앞으로 튕겨나가지
쉼표와 느낌표에 인색한 도시는 마침표도 없지
깊숙한 가슴을 느끼고 싶어
만지면 사라지는 마술 같은 세상에서
도시는 커다란 회전문
사람들을 들이마셨다 뱉어내지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사이에 걸려
흔들리는 도시의 손잡이를 잡고 집으로 가는 길
골목 쓰레기봉투를 잡고 집으로 가는 길
그러면 하루치의 배설물들이
위태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곤 하지
배설은 또 다른 도시를 키우지
도시의 키 크는 소리가 들려
화살표를 따라 사람들은 달려가지만
어느 날 실종되기도 하지
도시의 유혹 사이렌이 울리지
짧게, 또는 아주 길게
햄스터처럼 부풀려진 얼굴들이
주머니 속 로또복권을 만지작거리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추락하는 눈들이
증권시장 사이렌을 울리지
도시는 얼마나 더 많은 화살표에 명중될까
희망이라는 의자를 찾아
오늘도 과녁을 향해 베팅을 하지
바람의 모자
새의 주검이 매달려 있는
삼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지붕은 소란하다
누군가 묵묵히 앉았던 의자가 나뒹군다
세상으로 달려가지 못한
온갖 허물들이 구겨진 채 바람으로 일어난다
내일이면
또 누가 지붕 위로 올라갈까
깊이 박힌 못 자국 사이
주인을 놓친 신발 한 짝 웅크리고 있다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다
행주질도 못한 탁자 위에 토해낸 젖은 말들
술잔에 빠졌던 달이 떠오른다
방으로 들지 못한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갈까
건물에 기대선 지친 그림자
'관계자 외 출입금지' 빨간 등이 깜박이면
어둠을 뚫고 지붕으로 오르는 고양이
바람이 투명한 모자를 눌러쓰고
삼층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숲의 홈페이지
쉼표도 없이 뭐든지 팔고 사는 자본주의 도시에서
나무 벤취에 앉았던 늙은 낙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절망은 가끔 홀로 저녁을 먹는 것
영혼조차 팔아버리는 도시에서는
타인에게 아픔을 장식하기도 하지요
세상에서 비는 그냥 물로 읽히지만
숲에서는 나무들의 피로 읽히지요
저기 걸어 다니는 나무들 좀 보세요
내 안에는 길이 없는데
도시를 떠도는 나무들이 자구만 젖은 손을 내밀어요
초록채반에 쌓인 나무들의 이야기를 클릭해요
이 비가 그치면 숲은
커다란 그늘을 벗기 위해 제 몸을 버릴 거예요
가을을 떨이한 계절은
곧 신상품을 만들어 내놓겠지요
사람들은 도 다른 게절을 구매하기 위해 클릭을 하고
숲은 저 혼자 긴 어둠을 건너요
롤리팝
도시의 막다른 골목 그곳에 가면 그가 있지 인사동과
종로를 떠도는 백 년도 넘은 어둠 속에 그가 있지 마법
에 걸린 골목을 미로처럼 그와 함께 걷지 출입금지와 경
고가 붙어 있는 곳 우린 수상한 사람이 되지 페허가 되
어버린 적산가옥 앞 어둠에 낡은 풍경이 걸려 있지 핸드
폰에서 울어대는 시끄러운 얼굴을 접으며 내 인생은 몇
번이나 접혔을까 생각하지 시간을 꿰매던 바람이 골목
골목 매달리지 옛날 이야기가 살고 있는 내 일기장 첫
페이지에 그가 있지 가끔 끓어 넘치는 생각을 안고 싶은
날이면 그곳에 가지 달콤한 기억에 혀를 대면 내 인생
폭풍의 눈이었던 그와의 기억이 회오리처럼 일어나지 골
목과 골목 사이에 갇혀 쇼팽을 타고르를 얘기하며 희망
으로 가는 비밀번호를 찾던 피카소의 골목 그곳에 가면
그가 있지 나는 그를 조금씩 조금씩 아껴먹지 고장난 시
계가 찰칵거리는 돌체 라 세라*
*Dolce Ia Sera: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오후.
소울메이트
나는 당신을 켜네
겨울이 쨍그랑거리는 셔터 내려진 가게 앞
세상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나에게
모차르트를 들려주며
조율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당신
세상의 음역을 벗어난 나는 늘 삐걱거렸네
습관처럼 당신을 켜네
버려진 것들은 둥글면서도 날카롭다고
책갈피에 구름을 끼워주며 말했던 당신
허공에 집을 지울 수 있는 새를 부러워했지
당신에게 주파수를 맞추며
오래 된 가구처럼 조심스럽게
당신을 켜네
수많은 채널을 가진
당신을 끌 수가 없네
네일아트
사내의 혓바닥에서는 거짓말이 자랐다
술이 눈에서 출렁거렸다
손가락으로 나는 사내의 눈 속을 휘저었다
핏발선 눈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거짓말이
내 손톱에서도 자라났다
잘근잘근 씹어보기도 하고
뭉텅뭉텅 잘라내기도 했지만
뿌리까지 뽑을 수는 없었다
뱀처럼 사내의 거짓말이 꿈틀거릴 때면 전율이 흘렀다
뚝, 떼어낼 수 없는
병든 사랑 하나
사내의 낡은 거짓말에는 꽃이 피었다
나는 손톱에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립스틱을 바른 오후
다 읽기도 전
당신의 페이지를 덮습니다
나는 가지런히 당신을 책상에 꽂아두고
넘쳐나는 푸른 기억을 만지작거립니다
언젠가 걸었던 명동성당 길
플라스틱별이 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출렁이는 그 별빛에 비가 내리고
나뭇잎에서 종소리가 들립니다
기억하나요 당신과 꿈꾸던 도시
반짝이기도 했던 세상
그곳에서 길을 잃기도 했지요
당신이 없는 도시는
계단 없는 낭떠러지
내 안의 새를 날려 보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복숭아빛 입술을 닮은 오후
깃발보다 더 팔랑거립니다
- 시집 『롤리팝』2012. 북인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