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5일
월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언한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 제사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거룩하게 되었다(제2독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다. 마리아는 몹시 놀라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응답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중세의 신비 신학을 대표하는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동정
성모에 대한 찬가'에서 천사의 전갈과 성모 마리아의 응답 사이의 짧지만 위대했던 시간의 신비를 더없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정녀시여,
당신께서는 잉태하시어 아기를 낳으시리라는 전갈을 받으시고 또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리라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여왕이시여, 저주의 심판을 받아 비참에 눌려 있는
저희마저 그 자비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저희 구원의 대가를 주고자 하십니다.
당신께서 승낙하시기만 한다면 저희는 즉시 해방될 것입니다. (중략) 복되신 동정녀시여, 믿음에 마음을, 승낙에 입술을, 창조주께
당신의 모태를 열어 주소서. 보소서, 뭇 민족들이 기다리던 분이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 당신께서 머뭇거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지나쳐 버리시어 당신의 영혼이 슬픔 속에 사랑하는 이를 찾기 시작해야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곧 일어나시어 달려가 문을 여소서 ……."
우리는 성모님의 응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에서 인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성모님의 순종이 세상에 가져온 그 큰 은총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또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에
조건 없이 "예!" 하고 응답하기로 결심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응답에 은총의 열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예,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김대열신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
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어린 시골 처녀의 입에서 나온 흠
없는 기도.
화가 날 정도로 눈부신
기도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살아온
죄 많은 사제를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구원의 대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
시골 처녀 마리아 안에서 활동하신
성령을 느낍니다.
자신의 입으로 내놓은 그 엄청난 말의
무게를
어린 처녀는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늘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루카
또 다시 희망을 가져봅니다.
늘 모자람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지만,
그분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내 삶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 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모든 기도의 중심은 내어드리고
내맡기는 마음입니다.
기도라는 이름으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을 그분 뜻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예,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20130408)
< 하느님께 대한 충성이
정결함 >
-전삼용신부-
임금님을 사랑하는 한 시골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 해는 워낙 농사가 잘 되어 먹음직스런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가장 빛깔 좋은 것 몇 개를 골라서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고작 사과 몇 개 드리려고 임금님을 만나려고 하느냐며 그를 야단쳤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왔지만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왕비가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왕비는
임금에게 굉장한 사랑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백성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궁궐로
들어간 왕비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금 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 앞에서 직접 깎아 주었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런 왕비가 깎아주는 사과를 맛보고 너무 맛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왕비는 그 때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고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생각할 때 이 예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왕에게
합당한 것은 왕비이지 가난하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농부가 아닙니다.
누구나
수준에 맞는 사람과 사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온전한 사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사귀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같은
하느님든지,
하느님처럼
거룩한 분이든지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은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모세만이 하느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하느님은
그에게 당신 얼굴을 보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인간 중에 가장
겸손한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거룩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가 40일
동안 단식하고 난 후에 모세를 시나이 산 정상에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면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지팡이는
성령을 의미하는데,
하느님의
성령,
즉
은총을 지닌 가장 겸손하고 거룩한 이와는 친교를 이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께
‘은총이
가득하시다’고
인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인사합니다.
은총은
성령의 선물인데,
은총이
가득하다는 말은 성령이 가득하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하시고 하느님과 직접적인 친교를 이루신다는 인사 하나만으로 우리는 성모님께서 모세보다도 더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죄 있는 어머니에게 잉태되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다면,
우리
또한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택하셨다면 성모님만이 하느님을 만나 인간에게 당신 아드님을 옮겨주실 하늘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모님의 정결함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죄만
짓지 않으면 정결하고 거룩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순결하라고 하실 때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순결하고 거룩하라고 하신 비둘기의 상징은 바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비둘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
때도 비둘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비둘기는 절대 다른 것에 한눈을 팔지 않고 목적지만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것이
순결함이고 거룩함인 것 같습니다.
바로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그 충성심이 깨끗함인 것입니다.
북구라파에 사는 흰담비는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흰 담비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즉,
흰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담비를 굴속으로 모는 것입니다.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동물조차도 자신의 털을
더럽히기를 원치 않아 죽음을 택합니다.
하물며
거룩한 하느님이 아무에게나 잉태되어 당신을 더럽히실 수 있을까요?
성모님
또한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며 스스로 당신의 순결함을 목숨을 걸고 지키신 분입니다.
그랬기에
그분을 통해 구원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비둘기와
같은 깨끗함,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도록 먼저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있도록 결심해야겠습니다.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영억신부-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수철신부-
오늘은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지도 못하고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철저히 관계 속의
인간입니다.
하여 공동체내에 몸 담고 살면서
안팎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안팎으로 풍요로운 관계가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선 세 부분에 걸친
묵상입니다.
.
첫째, 관계중의 관계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무엇인지 물어도 하느님
없이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 중에 방황하다
아까운 인생 마칠 것입니다.
사람은 신비이기에 신비의 원천인
하느님만이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바로 이게 인간의 위대함이요 존엄한
품위의 사람임을 깨닫게 합니다.
.
결국 성경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자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야기입니다.
하여 하느님 탐구여정과 참 나의
탐구여정도 함께 갑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자 참 나를 찾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하느님과의 관계도
깊어져 가는 삶인지요.
.
둘째,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기도는
필수이자 우리의 모두입니다.
.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자 생명이요,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소통입니다.
하느님과 관계 역시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쌍방향의 관계입니다.
.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모두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인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찾는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있습니다.
침묵 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
귀를 기울임으로 시작되는 기도입니다.
.
하느님 친히 겸손하게도 당신 천사를
통해 궁벽한 산골의 마리아를 찾아 나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
제가 면담고해성사때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이 먼저 마리아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라면서도
즉시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침묵의 사람, 들음의 사람, 관상의
사람인 마리아는 믿는 모든 이들의 모범임을 깨닫습니다.
.
이런 마리아를 신뢰한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놀라운 비밀의 자기 속내를 다 들어냅니다.
침묵 중에 주님과 깊은 대화의 기도를
나눈 마리아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기도의 완성입니다.
.
.
셋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
사람의 응답이 없이는 하느님 혼자서는
아무일도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는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도
우리에게 순종하십니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순종의 응답에 이어 주님의 천사도
홀가분하게 떠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 하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
이런 순종의 응답이 있어 마침내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으로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 또한 영예롭게도 또 하나의 이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is with us)'라는 '임마누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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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전자전이라 예수님 역시 히브리서에서
마리아처럼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히브리서는 고백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성화은총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때마다 우리
모두 오늘의 화답송으로 주님께 고백합시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ㄴ과 9ㄱ 참조).
.
아멘.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