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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마가복음1:9-15
설 명절을 은혜가운데 잘 지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오래 만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주어야 하고 때때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부 잘 했어? 몇 등 했어?’ ‘언제 시집 갈 거야?’ ‘장가 언제 갈 거야?’ ‘아직도 취직 안 됐니?’ ‘집은 언제사니?’ 하는 말들은 대표적으로 조심해야 할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 된 입장에서는 부모님께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지 못하면 참으로 죄송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사실 용돈이나 선물 같은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는 자녀들이나 손자 손녀들을 본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다 좋은 결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습니다만 어째든 부모님의 마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런 후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소리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주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과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주님은 공생애를 담대하게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내가 너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주님은 공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도. 누구의 병을 고치는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30세까지 주님은 나사렛 동네에 살면서 가정에 충실한 가장의 삶을 사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님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주님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3:17절)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기뻐하시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슨 큰일을 하였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수백억의 많은 돈을 드려 헌금을 하였기 때문입니까?
엄청나게 헌신을 하고 충성을 하여서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슨 큰일을 하고 헌신을 하고 충성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을 통하여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관계이며 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기쁨의 존재인 것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는 아들이요 딸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며 자신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한 어린이가 앞에 나와 무엇인가 열심히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 뒤의 칠판에는 ‘뿌리’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충청북도 청주가 고향이래요. 또 저는 전주 이씨 47대손이구요!
그리고 제 위로 5대 할아버지는 조선 시대 때 예조 판서를 지내셨다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지금도 청주에서 교장 선생님을 하고 계시고 우리 아버지는 큰 무역회사 과장님이세요.
나는 훌륭한 우리 집안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밤 아버지에게 들은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발표를 끝낸 그 어린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어린이들이 차례대로 한 명씩 나와 자기 조상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준비해 온 내용을 열심히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참 지켜보던 선생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한 어린이가 발표를 끝내고 들어가고 이어 나오는 어린이를 본 순간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조용히 걸어 나오는 그 어린이는 고아원에 사는, 부모를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는 자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선생님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단상 앞에 당당히 섰습니다.
그 아이는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를 시작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많은 자녀를 가지고 계신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아주 많은 형제들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나를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하고 어려운 일도 잘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똑똑하고 자랑스럽게 발표해 나가는 그 아이를 보는 선생님의 두 눈에는 어느새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들이요 딸인 줄 믿습니다.
이것만 확실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기준은 보통 3가지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로 자기를 이해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면 교사로, 노래하고 있으면 가수로, 병을 고치고 있으면 의사로 이해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농부로, 회사에 다니면 회사원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무엇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자신을 이해합니다.
권력을 갖고 있느냐? 돈을 갖고 있느냐? 지식을 갖고 있느냐? 좋은 집을 갖고 있느냐?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으로 이해를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이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면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실패했다고 하면 실패한 사람같이 생각합니다.
이런 기준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일을 갖고 있으면서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많이 가진 자는 성공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공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깊은 충격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의 공식에 따르는 자기 이해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1.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후렴)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2.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향하게 하소서.♫
이 노래 가운데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한 가지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기뻐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런 우리는 이제 나를 기뻐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한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늘 교제하고 교통하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고 안 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잘 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것 같이 생각하여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의 오해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그렇게 사시는 분들을 사랑하시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 에녹이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더라.’ 입니다.
에녹의 삶의 특징은 무슨 큰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동행했다는 말에는 물론 많은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늘 시간을 내서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공생애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과 40일 동안 교제하시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우리의 삶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고 더욱 더 경건하게 사는 절기인데 이 사순절 절기에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더욱 깊이 교제하고 교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교제가 정말 주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위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교제하시는 주님을 마귀가 시험하였습니다.
특별히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주님을 향해 이런 방법으로 하라고 유혹하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마귀의 방법을 다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다수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광야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다 가운데 지났습니다.
다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였지만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광야라고 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세상적인 뜻을 찾았다가 악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지키시고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확신을 갖고 여러분들도 주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과 교제하며 교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