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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라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며 살라
가장 큰 도전과 가장 행복한 도전입니다.
무더위보다 더 떠거운 사랑으로
이 무더위와
이 환난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재호 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해 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라는 전체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제 시간에는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비우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의 본질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 중에 첫 번째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예수님이 우리와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예수님이 저희처럼 가정이나 부부, 자녀가 있지 않으셨고 세상 쾌락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셨지만, 시험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시험의 본질은 똑같았다고 했습니다. 시험은 유혹입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이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높은 자리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겪는 시험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시험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마음에 가득 차 있으셨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고 사랑만 하면 돼. 사랑이 제일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서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계명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사람의 최종적인 아름다운 모습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많이 부르시지요. 맞습니다. 이 땅에 계신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도 태어났지만 사랑하기 위해서도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사랑받는 데만 초점을 맞추시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사랑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cXynCvz26oU?list=RDcXynCvz26oU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22장 34절에서 40절에 있는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아멘)
https://youtu.be/AHOozD28V_o?list=RDAHOozD28V_o
앞 내용에 보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일곱이 있는데 첫째가 결혼했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고, 둘째도 아이 없이 죽어 그렇게 일곱 명이 다 죽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 "나중에 부활할 텐데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천사와 같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파자 나갑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입니다. 원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사이가 안 좋습니다. 그런데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도 공동의 적이 나오면 뭉칩니다. 예수님을 공동의 적으로 삼다 보니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율법사가 당당하게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경중에 따라 나누고 있었습니다. 더 큰 계명이 있고 적은 계명이 있어서, 두 개가 충돌할 때는 큰 계명을 우선으로 지키고 적은 계명은 좀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니라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여기서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셨습니다.
'강령'이라는 말이 조금 어렵지요. 원어나 영어 성경(NASB)을 보면 이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0절 말씀의 뜻은 "이 두 계명 위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걸려 있다"라는 뜻입니다. 강령이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걸려 있다(hang)'입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구약이 어디 위에 걸려 있느냐 하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거기에 다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벽에 못을 쳐 놓고 여러분이 쓰시는 모자나 옷을 걸어 놓으면 무엇이 보입니까? 모자나 옷이 보이지 못은 잘 안 보입니다. 하지만 그 옷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못입니다. 그것처럼 구약성경을 겉에서 바라보면 온갖 말씀들이 다 있지만, 그 모든 구약을 걸고 있는 못은 바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걸고 있는 두 가지가 바로 이것이며,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내용이 전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완전과 사랑의 관계
저는 요즘 '완전'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완전이 사랑과 어떻게 관련이 될까요?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48절에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구약의 말씀을 더 본질적이고 깊이 있는 내면의 말씀으로 전개시키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라는 말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입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레위기에 없습니다. 그냥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을 씁니다.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던 격언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알고 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웃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심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 48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대단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Perfect'입니다. 하지만 문맥 속에 들어가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라고 해서 비를 안 내리시거나 햇빛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니, 너희도 이렇게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는 이방인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똑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완전하다'라는 말을 임의로 생각해서 문맥을 무시하고 적용하면 이상한 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엘렌 화잇의 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역 안에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영역 안에서 온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영역에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알프스 산기슭에 '비가넬라'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산이 높은 골짜기에 있다 보니 햇볕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11월부터 2월 겨울이 되면 온 마을이 어둡고 추웠습니다. 시장이 고민 끝에 산 중턱에 대형 거울(가로 8m, 세로 5m)을 설치했습니다. 땅에서 리모트 컨트롤로 거울을 조종해 해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태양 빛을 받아 마을로 반사시켰습니다. 그러자 마을이 엄청나게 밝아지고 따뜻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부담이나 어려움을 해결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힘은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빛을 그분의 영역에서 받아, 우리는 우리 영역에서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역에서 완전한 것처럼 우리 영역에서 완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다는 뜻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완전과 사랑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 마지막 때의 품성과 사랑
두 번째로, 신실히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많이 강조하는 단어가 '품성'입니다. 마가복음 4장 28절, 29절에 보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했습니다.
《실물교훈》 69페이지에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대단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문맥 없이 따와서 여러 잘못된 이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완전하게 재현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문맥을 봐야 합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단독 작품으로 볼 때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상상하게 되지만, 원래는 '지옥의 문'이라는 거대한 작품(가로 6m, 세로 4m) 상단에 포함된 조각입니다.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위에서 바라보며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넓은 문맥 속에서 볼 때 비로소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화잇의 글도 딱 하나만 떼어내서 해석하면 안 되며 문맥 속에서 봐야 합니다.
《실물교훈》 67~69페이지의 문맥을 보면 이렇습니다. 곡식이 자라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씨 뿌리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가 그리스도의 정신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의 정신과 그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신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품성에 무르익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나오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이타적인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정신,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이타적인 사랑의 정신이 백성들 속에서 재현될 때, 그 백성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때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할 품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입니다.
3. 율법의 완성인 사랑
율법교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교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했습니다. 타락 전에도 율법의 원칙(사랑)은 존재했습니다. 성문화된 글은 아니었지만 원칙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부가적인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으로 성문화시키고, 구약의 희생제사 제도를 추가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변하지 않는 원칙은 바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고, 헐벗었을 때 옷 입혀주고, 배고플 때 먹여준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나에게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대하는 그 사람은 그 순간 바로 그 한 분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 사랑"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가지셨던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에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기쁨으로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는 100% 나를 사랑하라"는 요구입니다. 왜 이렇게 요구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100%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100%이어야 만족이 됩니다. 배우자가 나를 99% 사랑하고 1%는 첫사랑을 사랑한다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100% 사랑해야 참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100%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 39절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 뒤에, 《세패스천 교목》의 글에는 "우리가 그분을 매우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를 매우 단단히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힘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단단히 쥐고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이나 여러 글에 나오듯, 일본의 시인 미즈노 겐조는 뇌성마비로 눈만 깜빡일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벽에 가나다 판을 붙여놓고 눈짓으로 시를 썼습니다. 그의 시 "주님을 슬프시게 한 것은 아닐까"에는 늘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둘째, 이웃을 향한 사랑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사랑을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 등으로 나누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했습니다. 사랑이 더 큰 사람이 먼저 다가갑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3장 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집에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를 보십시오. 비록 포로로 잡혀와 강제 노역을 했지만, 그 소녀는 자신을 잡아가고 괴롭힌 사람들을 향해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병든 주인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심을 가졌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통해 낫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놀라운 믿음과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면의 삶이 실패할수록 우리는 더 집요하게 우체국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내면의 삶이 공허할수록 우리는 더 집요하게 휴대폰이나 유튜브로 간다"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했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신문 스크랩들이 나왔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기사들이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비난과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릴 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워 그 기사들을 꼬깃꼬깃 접어 가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공허하고 따뜻한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이선성 선생님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진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아픔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바로 나'라고 인식하는 사람이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해결해 주려는 사람이 진짜 배운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으라"(롬 12:15) 하셨습니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 사랑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동료 인간들과도 사랑의 금고리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긍휼과 동정심이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한 직장 여성이 회사에 큰 실수를 해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위 상사가 위에 보고하지 않고 자신이 그 실수를 뒤집어쓰고 추궁과 욕을 먹었습니다. 직원이 미안해서 찾아가 "왜 그러십니까? 차라리 제가 했다고 말씀하십시오"라고 하자, 상사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떠맡아 주셨듯, 나도 힘닿는 데까지 남들의 짐을 지고 싶습니다."
이 고백을 들은 직원은 예수님이 궁금해졌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둘째,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분들의 삶에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xRlnqqrMoGY?list=RDxRlnqqrMoGY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