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沈默)
베란다의 한 곁에 자리한 ‘호야’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꽃을 피웠다. 여러 화분에서 꽃을 피워 자태를 드러내고 있어도 호야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호야꽃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내려앉은 앙금이 사라지는 듯했다.
호야는 한 줄기의 끝에 그것도 부끄러운지 아래쪽을 향해 다소곳이 피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무리 중의 으뜸이었다. 화야 꽃말은 ‘인생의 출발’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또한 ‘고독’과 ‘아름다움’, ‘그리움’의 사랑을 담고 있기도 하다. 호야처럼 상대를 의식(意識)하며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는 숙고의 성찰이라 관심이 갔으며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옛말에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그 말의 본질은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마음 안에서 담금질하여 정을 맞은 듯 사려 깊은 판단으로 마음을 챙기는 것이다. 또한 상대의 말을 잘 듣기 위한 준비이며 자기주장으로 소통이 힘들 때 잠시 쉬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침묵’의 고귀함이 쇠퇴하고 있다. 직장이나 조직 내에서 문제가 생겨도 제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침묵은 동료들의 부정적 시선에 대한 염려이기도 하고 누군가 당황스럽고 언짢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문제를 제기해도 다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조직 내 부조리를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 윗사람에게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17세기 박해 시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증거하다 죽어가는 데 왜 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의 성화를 밟는 배신행위를 하면서 진정한 믿음을 생각했다. 하느님은 침묵하셨던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과 함께하고, 예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오늘날 물질 만능시대에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고 판단한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침묵으로 내려앉으며, 정의와 공정, 변화와 쇄신을 무색하게 한다. 성서에도 침묵하지 말고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고 한다. 주일 아침에 몰래 핀 호야의 꽃을 바라보면서 나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침묵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