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오 바쇼 ‘오쿠로 가는 작은 길’(새로읽는 고전:33) ◎허망한 세상을 떠나 참된 나를 찾아
삶의 자리가 어쩐지 허망하게만 여겨질 때 우리는 어디론가 떠날 생각을 한다.떠나서 결국 이르게 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그곳은 본래 자신이 있던 자리일 뿐이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마쓰오 바쇼(1644∼94)가 쓴 3백년 전의 기행문이다.
그는 ‘조각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결에 이끌려 방랑하고픈 생각이 끊이지 않아’ 그만 훌쩍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방랑길에 올랐다.당시만 해도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일본 동북지방을 제자 소라(1649∼1710)와 함께 1백56일 동안 여행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마쓰오 바쇼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서구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일본 에도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시인이다.그는 여행을 즐긴 방랑자였고,당시까지만 해도 말장난에 가까웠던 하이카이(俳諧)를 차원 높은 예술의 세계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이번 여행은 애초부터 변방으로의 방랑,무상한 속세를 떠나 내 몸을 버릴 각오로 떠나왔으니 비록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죽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또한 천명이리라”
이러한 말에서 보듯 그는 철저한 무소유의 방랑미학을 실천했던 인물로,뒷날 그 길목에서 제자들의 간호를 받으며 삶을 마쳤다.그의 글 속에는 은수자(隱修者)적 삶에 대한 동경과 탈속(脫俗)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다.
그의 글은 따뜻하다.그의 글에는 읽는 이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잔잔한 울림이 있다.우리는 3백년전 마쓰오의 기행문에서 일본 문화의 다른 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2천4백여㎞에 달하는 긴 여정에는 에도를 출발해 닛코산과 나스노 들녘,시모쓰케와 오쿠를 거쳐 일본 제일의 절경을 자랑하는 미쓰시마 섬과 잇꽃의 고장 오바나자와 등 여러 지방의 풍물과 그곳 옛 선인들의 자취가 담백한 어조로 그려져 있다.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는 시인 마쓰오의 내면 풍경이 그대로 비쳐보인다.문체의 묘한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자신이 방문한 곳에 대한 감회를 얹은 하이쿠(俳句)가 수십 수 실려 있는데,17자에 불과한 하이쿠 문학이 보여주는 간결한 함축과 긴장이 일본 문학에 익숙지 않은 내게는 낯설고도 새롭다.
‘참혹하도다/갑옷 밑에서 들려오는/귀뚜리 소리’
에는 전장에서 산화한 무사 사네모리의 옛 자취를 보는 무상감이 실려 있고,제자인 소라의 ‘가다 가다가/쓰러져 죽더라도/싸리꽃 벌판’에는 스승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제자의 아쉬운 마음이 담겨있다.
마쓰오는 이 시를 읽고,“먼저 떠나가는 이의 슬픔,남겨진 이의 아쉬움은 마치 민댕기물떼새 한 마리가 지금까지 함께 날던 친구 새와 헤어져 구름 사이를 헤매는 것과 같았다”고 적고 있다.
또 사이교 법사가 지었다는 ‘깊은 산 속의/바위틈에 떨어지는/물을 담았네/한 알 한 알 떨어지는 상수리를 줍듯이’와 같은 절제된 와카(和歌)를 음미해보는 것도 이 기행문을 읽는 잔잔한 즐거움을 더해준다.
‘30년 전부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만!’으로 끝나는 현대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결국 그는 30년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떠남에 대한 허망한 열망을 시를 통해 위로받을 수밖에 없겠지만,삶의 속도에 치여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은 늘 휴식과 위안을 필요로 한다.그럼에도 3백년 전 마쓰오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그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설 용기가 우리에겐 없다.대신 ‘오코로 가는 작은 길’을 읽으며 그 허허로운 방랑의 여정을 떠올려 마른 가슴 속에 한 줄기 신선한 샘물을 길어올려 보고 싶은 것이다.
고전이란 무엇일까.그 시대의 진실을 담았으되,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긴 울림을 남기는 저작이 아닐까.이 책은 정작 7종의 영어역이 있고,그밖에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역도 나와 있는데,한글역은 최근에야 간행되었다.특히 스페인어역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옥타비오 파스가 공동번역자로 참여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