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말하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이라고 나는 새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쓰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손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저혼자 하는 말도 받아 적네 아 자연은 신비한 것 세상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네 어느 시인은 말했지 나는 자연을 표절했노라고*
*이재무 시인의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 창비. 2019)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 이재무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 한 사내의 탕진과 애인의 눈물을 표절하고 기차와 자전거와 여관과 굴뚝과 뒤꼍과 전봇대와 가로등과 골목길과 철길과 햇빛과 그늘과 텃밭과 장터와 중서부 지방의 사투리를 표절했네 이웃과 친구의 생활을 표절했네 그리고 그해 겨울 저녁의 7번 국도와 한여름 강진의 해안선을 표절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이재무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2017.6.9
베껴먹다 / 마경덕
어머니는 할머니를 베껴 먹었고 나는 어머니를 베껴 먹고 내 딸은 나를 베껴 먹는다. 태초에 아담도 하나님을 베껴 먹었다. 아담 갈비뼈에는 하와가 있고 내가 있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은 하와의 사본이다. 금성 목성 토성 화성 ... 모두 지구의 유사품이다.
바람개비는 풍차를 국자는 북두칠성을, 너훈아는 나훈아를 슈퍼는 돈 한푼 내지 않고 구멍가게를 베껴 먹었다. 귤나무는 탱자나무를 오렌지는 자몽을 베껴먹고 별은 불가사리를 탁본했지만 한번도 시비에 걸린 적이 없다. 하이힐은 돼지발의 본을 떠서 완성되었다. 복숭아는 개복숭아를 표절하고 드디어 팔자를 폈다. 아직도 개복숭아인 것들은 눈치가 없거나 지능이 떨어진 것들이다.
나는 수년간 산과 바다를 베껴 먹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위작이거나 모작이다. 나는 오늘도 늙은 어머니와 맛있는 당신을 즐겁게 베껴 먹는다.
- 마경덕 시집 「 글러브 중독자 」 (애지, 2012)
담쟁이의 표절 / 이정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담벽 전체를 휘감으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야 마는 다부진 욕망
잎들 모두 지고 상승의 자취만 남았을 즈음 발아래 쌓인 수많은 표절을 본다
벽면을 빌려 어느 순간 빳빳하게 살다 의식의 수분 다 빠져나가면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마는 본성이 나타난다
피가 끓어오를 때 자기 속성을 뛰어넘으려는 몸부림이 있었던 것
웅크린 몸 안쪽 그늘에서 연민이 부스럭거리지만 생은 한층 진화된 표절로 또 넘실댈 것이니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자리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를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닝닝 허공에 정지한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했던 당신의 새벽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픈 매듭을 베껴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의 당신 몸을 표절할래 첫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길을 열며 조금은 글썽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시집 <와락> 2009. 창비
표절 / 박현수
아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튀김 튀기는 소리같아 정말, 이걸 내 시에 써먹어야 겠다 안돼, 내 일기장에 쓸 거야
시작 (2005년 겨울호)
식탁을 표절하다 / 한선자
훔쳐 온 문장 하나로 저녁을 짓는다
냉장고를 열면 묵은 낱말들이 빽빽하게 쟁여 있다
양파를 벗겨도 비밀이 없고 독을 품은 고추는 매운 맛을 잃었다
단단한 도마는 귀퉁이를 깎아도 사각을 허물지 못한다
해 지는 집에서 훔쳐 온 연애를 식탁에 풀어본다 첫 행부터 싱겁다
훔쳐 온 것들은 속이 비었거나 껍질이 질기다
묵은 감정을 그릇에 넣고 흔들면 꽃이 된다는 마술사의 말을 믿고 싶다
훔쳐 온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저녁 식탁은 오늘도 어제를 베낀다
시집『불발된 연애들』2017. 시산맥 기획시선
올챙이를 표절하다 / 노재순
시골집 처마에 걸려 있는 씨옥수수 그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토방 위에 북적이는 검정고무신과 올챙이국수가 떠오릅니다 맷돌에 간 옥수수를 뭉근하게 끓이다 가마솥에 묵꽃 피면 바가지 구멍으로 쏙쏙 빠져나오던 올챙이들 갓 부화한 간지러운 그 이름 속에는 여름 저녁의 평상이 펼쳐지고 개구리 울음소리와 개똥벌레 불빛들도 떠다닙니다 올챙이는 안 먹는다고 투정도 한 사발 다리가 나오지 않는 올챙이들도 난처한 저녁입니다
개밥바라기 별이 다녀가고 긴 꼬리를 단 별똥별 몇 개도 떨어집니다
내 유년의 점묘로 남은 그 이름은 옥수수가 아닌 강냉이 강냉이 한 줄에는 꼬물꼬물 올챙이 태그가 살아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