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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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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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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 예슈아와 우리는 한 근원에서 나왔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나왔다. 즉 예슈아와 우리는 모두 아버지이신 여호와로 부터 났다. 그러므로 예슈아는 우리와 함께 형제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스스로 계신 분)을 선포하며 회중 안에서 함께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슈아의 위치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자로서 우리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예슈아를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두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슈아는 교회의 머리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여호와와 사람 사이에 중보자시라는 것이다. 물론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발 앞에 굴복할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도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5:29-31)
#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2 두려움을 이기고 순종하라
예슈아는 여호와를 의지하셨다. ‘의지하다’의 어원의 뜻은 ‘확신하다. 믿다'이다. 즉 예슈아도 여호와를 확신했고 믿었다. 여호와께서 주신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했으므로 예슈아도 똑같이 혈과 육을 입고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셨다. 어떻게 죽음으로 마귀를 멸하실 수 있을까? 사단의 최대 권세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의 감정이 왜 문제가 될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셨다. 순종을 통해 복이 오고 생명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 재정에 대한 걱정, 근심, 두려움은 말씀을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죽이고 생명을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마13:22). 어떤 상황에도 죄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재물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어 말씀을 죽이고 자신의 뜻대로 불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불순종으로 무너지게 만든다. 이 두려움 때문에 평생 사람들이 죄에 굴복하고 종노릇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고 시험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바로 죄를 이기면 된다. 어떤 상황에도 죄를 이기고 순종한다면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이다.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13:20-22)
3 두려움을 비웃는 진정한 승리자
많은 두려움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두려움은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슈아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혈과 육을 주신 여호와께서 더 나은 몸(부활체)을 주실 것을 완전히 신뢰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어둠을 이기셨다. 즉 목숨을 포기하더라도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위해 결코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생명 연장을 위해 구걸하지 않고 달라면 주는 것 그것이 예슈아께서 어둠과 끝까지 싸워 이기신 방법이고, 우리가 어둠을 이기는 방법이다(히11:35-38). 어둠은 우리를 굴복시켜 순종을 포기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병으로 자녀로 재정으로 또는 성공으로 미혹하고 시험한다. 최종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며 시험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확신 가운데 생명을 내어주는 자가 최후 승리자이다. 이것이 예슈아께서 전쟁하신 방법이다. 끝까지 순종을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실패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두려움을 비웃는 믿음이고, 끝까지 순종을 선택할 때 얻을 수 있다. 마카비서에 나오는 순교자들이 자신들을 고문하는 안티오코스를 비웃고 끝까지 순종을 선택한 것 그것이 승리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고문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마카비4서11:20-27).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5-38)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4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누구보다, 어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예슈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목숨을 미워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우상을 부수고 신실한 아들들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예슈아를 따르던 제자들이 처음부터 받을 수 있을까? 이제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예슈아께 직접 3년반이나 훈련을 받은 제자들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예슈아께서 죽으실 때 모두 도망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베드로마저 세번이나 부인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이미 그럴 줄 아셨다. 그래서 “너희가 아직은 내가 주는 잔을 마실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이들에게 임했을 때는 모두 예슈아의 잔을 마실 수 있게 하셨다(마20:22,23). 우리가 목숨까지 미워하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끝까지 순종을 포기하지 않도록 거룩한 성령은 도우실 것이고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이다. 우린 하나님을 알면 되고 그분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보혜사인 돕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1:8,9)
5 예슈아의 죽으심의 의미
예슈아는 아버지를 믿고 생명을 주시는 순교로 인해 온 세상에 속죄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말씀을 타협하지 않고 순교한 많은 선진들이 있는데 왜 굳이 예슈아께서 오셔서 순교의 여정을 걸으셔야 했을까? 예슈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수많은 순교자들이 율법과 믿음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기꺼기 죽은 수전절(하누카)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미 있지 않은가? 그 순교의 역사인 수전절을 지키신 예슈아에 대해 우린 이미 성경을 통해 알고 있다(요10:22,23). 이사야 선지자도 톱에 켬을 당하였고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도 목 잘림으로 순교했다. 예슈아의 제자들이 거의 모두 순교했다. 그렇다면 예슈아의 죽으심은 이들과 다르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예슈아의 죽으심은 유월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유월절 어린양이 예슈아의 그림자이고 예슈아께서 오셨는데 유월절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하늘의 실체는 땅에서는 그림자이다. 그림자가 있는 이유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체가 있다면 그림자는 없어질 수 없다. 우리의 실체는 부활체이다. 그러므로 그림자인 육체가 있는 것이다. 부활체가 실체이므로 그림자인 육체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실체를 위해 그림자를 주시고 그림자를 통해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 나라는 실체이다. 그림자는 현 세상이다. 현 세상을 왜 주셨을까? 그것은 현 세상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실체인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땅의 성전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이다. 땅의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거룩함을 이루어야 하늘 성전에도 영원히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슈아는 유월절 어린양이고 실체이다. 실체인 예슈아께서 오셨기 때문에 유월절이 필요없는가? 그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통해 온전한 출애굽과 회개를 이루는 것이 예슈아께서 죽으신 목적이다. 어떠한 것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다. 출애굽을 통해 모든 신들을 심판하셨으므로 이제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예슈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9,10)
6 유월절이 말하는 죽으심의 의미
유월절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월절 사건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의 구원이고 모든 신들을 심판하신 우상 숭배에서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이고 순종함으로 이루어야 한다. 구원의 첫 걸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린 매년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다시 기억해야 하는가? 구원의 시작을 또 다시 기억하는 유월절 예식을 매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모든 우상 숭배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이미 예슈아께서 죽으셨음 기억하고 동시에 우상 숭배와 다시 죄에 얽매이게 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무교절의 의미이고 누룩을 제거하는 의미이다(눅12:1). 예슈아의 죽으심은 유월절, 무교절 사건이다. 즉 잘못된 가르침의 누룩을 제거하고 외식의 누룩을 제거하고 다시 언약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슈아의 죽으심을 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는 죄를 반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순종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11:25,26)
7 예슈아의 부활이어야 했는가?
예슈아께서 부활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죄를 이김으로 사단의 머리를 밟고 사망을 이기고 생명을 얻으셨다. 이처럼 사단의 머리를 밟을 수 있는 분이 예슈아 밖에 없을까? 수많은 성도들이 사단의 머리를 밟고 부활할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부활은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왕권과 모든 우주 만물을 유업으로 얻기 때문이다. 천사들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그 발 아래 굴복할 수 있는 분이, 예슈아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록에 나와있다. 아무도 여호와의 언약의 봉인을 풀만큼 거룩한 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죄없이 죽으심으로 사망을 온전히 이기신 분은 예슈아밖에 없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신 예슈아만이 계시록의 거룩한 봉인을 풀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린 예슈아의 삶을 통해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예슈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거룩한 죽음이 무엇인지, 사망 권세를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예슈아의 부활을 통해 우리도 죄를 이기면 예슈아와 함께 모든 유업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예슈아께서는 이처럼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셔서 형제가 되시고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시는 것은 우리도 함께 유업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 근본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라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5:1-5)
# 히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8 유월절로 시작한 구원을 초막절로 이루라
'속량하다'의 어원은 '화해하다, 화목케하다, 속죄하다'등의 뜻이다. 예슈아께서는 하늘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를 영원히 정결하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 일은 이 땅에서 우리의 양심을 씻으면서 시작되었고 우리가 육체를 벗고 부활할 때 온전케 될 것이다. 또한 율법에 따라 속죄를 위해서는 생명은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다. 죄로 인해 사망하게 된 우리를 유월절 희생을 통해 속죄함으로 다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대신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유월절은 시작으로서 이후에 순종을 훈련하는 광야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슈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는 순종을 훈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거룩한 백성을 원하신다. 광야에서 순종을 이루고 끝까지 승리한 자들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우리는 예슈아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으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일 뿐이며 예슈아의 희생으로 자유케 된 우리가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슈아의 죽으심(유월절 사건)을 헛되게 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 죽으신 유월절을 통해 우상 숭배에서 건짐(구원)을 받았다면, 오순절에 율법과 하나님의 마음(성령)을 받고 예슈아의 믿음으로 순종해야 왕으로 오시는 예슈아와 함께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것이다. 영원한 나라는 장막절을 의미한다. 우리의 믿음의 단계가 유월절에서 오순절을 거쳐 장막절까지 장성해야 할 것이다(엡4:13).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1,22)
#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9 죄를 이겨야 승리를 도울 수 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하는 대제사장을 사람으로 세우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본인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중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5:1,2). 이 땅에 중보자를 사람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들의 부족함 때문에 비난하고 대적하고 필요 없다고 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나 거꾸로 그들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땅의 제사장 제도가 제정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목사들을 전면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사장이 아니라는 이유이다. 물론 이들은 영적으로는 제사장일 수 있으나 육적으로는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는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거절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삯꾼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성경도 대적한다. 또한 여자라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서 감독이 남자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여자를 감독으로 세우지 말라고 금한 것은 없다. 성령의 은사도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이유로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목사를 부정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아무리 유대인 랍비라 할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이방인일 수 있으며 이방인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유대인일 수 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바울은 증언했다(롬2:29). 그러므로 우린 분명 깨어서 분별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27,28)
하늘 대제사장이신 예슈아께서도 인간으로 오셔서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다. 그래서 이 땅에서 시험을 받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고 승리하도록 도우실 수 있는 것이다. 땅의 대제사장은 본인도 연약해서 우리를 돕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 대제사장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심으로 온전히 승리하셨기에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처럼 승리하고 죄를 이겨야 이웃이 승리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예슈아를 본받아 죄와 싸워 이기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또한 무식하고 미혹된 자라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자. 반드시 불쌍히 여기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히4:15,16)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히5:1,2)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제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
#히브리서 #레올람토라 #미라클조
첫댓글
할렐루야~~~~!
요즘같이 미혹이 많고 거짓이 난무하는 때 진짜 순종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이심을 확실히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라지고 지식과 교리로 채워진 한국 교회가 제발 깨어나길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예슈아!!!
아멘~~^^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