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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살인 행각의 실례
칼빈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세르베토
(1)신교의 역사를 바꿔놓은 기념비적 세르베토 사건
칼빈이 세르베토를 불로 태워 죽인 사건은 신교의 개념을 무너뜨린 충격적이고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개신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기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개기로 개신교도 종교상의 이유로 얼마든지 종교재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관계가 공식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은 당시 유렵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칼빈만이 아니라 신교에 대한 일반의 평가조차 냉혹하게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세르베토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그 충격의 파장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토가 칼빈의 신학사상에 문제를 제기하다 부당한 칼빈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리스도인인 세르베토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지는 않았지만 칼빈의 이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토록 괴로운 죽음(산채로 화형)을 당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 ’(Stefan Zweig. op. cit. p.169)
세르베토는 오늘날 자주 찬양되는 자유사상가나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세르베토는 기독교 영역안에 머물러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칼빈의 삼위일체설과 칼케톤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유아세례에 대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비판하였다.(미켈 세르베토<Miguel Serveto 1511-1553> <註 1>스페인의 학자. 혈액순환을 발견한 의학자요 신학자요 철학의 천재였고, 한때 칼빈을 구출하여 그에게 승리를 얻도록 도와준 동지중의 한 사람이었다. ; 조찬선 op. cit. p. 91참조)
(2) 개신교의 명예를 지워버린 세르베토에 대한 처형
칼빈이 세르베토를 불태워죽인 것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명예를 단번에 지워버렸다. (「앞의 책」 조찬선 op. cit. p.168,169참조) 개신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가진 사람, 자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사실상 개신교는 종교재판을 도입한다는 것과 사람에 대한 살상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카톨릭의 교의와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 신교에 대한 기대였다.
하지만 기런 기대감은 세르베토에 대한 처형으로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고, 동시에 신구교 성직자들에 의한 상대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치열한 살상적 사건들(Encyclopaedia of the Social Science' Ediwin R. A. Seigman. '사회과학원론'中央出版. 1981. 3. 5. p.214 ; 종교전쟁의 극치를 보여준 것으로 카톨릭과 신교의 성직자들에 의한 상대방의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자행하였다. 양자의 지배자(신구교)들은 상대방의 전제군주를 제거하는 것이 신에 대한 봉사라고 간주하고 암살을 자행하였다. 그 예로 홀랜드의 오랑에 公 위레름이 5차에 걸친 암살시도를 피하기는 했으나 결국 1584년 발사라르-제랄드(Balthasar-Gerard)흉탄에 쓰러졌고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15차 이상의 살해시도를 피했고, 프랑스의 앙리 4세는 19명의 암살시도를 피했으나 그 역시 1610년에 리바이야끄<Ravaillac>의 단검에 의해 피살되었다.)은 신교에 대한 기대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신교에 대한 기대감은 급격하게 퇴색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일련의 불관용적 사건들은 서구교회 침몰의 시발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떻든 카톨릭과 동일한 교리, 동일한 마녀재판과 종교재판을 통한 인간 사냥을 자행한 칼빈에 의해 개신교의 명예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카톨릭의 참혹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비판하는 곳에 칼빈과 개신교의 이름으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함께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3) 칼빈은 세르베토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다.
역사가들은 칼빈이 세르베토를 가장 가혹한 방식인 화형으로 처형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 카스텔리오는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최초의 이단자 처형이 바로 이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화형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잔인성으로 이름 높은 중세에도, 화형의 경우에 대개의 경우 사형수들은 화형대에 묶이기 전에 미리 목졸려 죽어 있거나 아니면 마취된 상태였다.(Stefan Zweig. op. cit. p.159) <칼빈은 주저없이 무자비하게 화형을 선택하여 집행토록 한 것이다.>
‘칼빈에게 세르베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칼빈 해석의 절대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만 샹펠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이다. --세르베토는 하나님을 모독하지도 않았고,-- 그는 오직 칼빈의 어떤 주장을 부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것이다.-- 그런데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세르베토는 절대로 무신론자가 아니었다.’(Ibid. 1998. 4. p.169) 고 현장에 있던 카스텔리오는 전하고 있다.
(4)쇠사슬로 묶고 야윈 세르베토의 몸뚬이에 불을 지르다
칼빈의 교육목사로서 세르베토의 화형을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Castellio)는 화형 당하는 끔찍한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실상을 말하였다.
‘<세르베토>는--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였다. 야윈 모뚱이 위로 밧줄이 너덧 번이나 둘렸다. 형리는 책과 세르베토가 칼빙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극비리에 보냈던 그 원고를 살아있는 몸뚱이와 잔인하게 파고드는 밧줄 사이에 끼워 넣었다. 마침내 세르베토는 머리 위에 끔찍한 고통의 면류관이 씌워졌다. 유황을 묻힌 잎으로 만든 관이었다. 이 모든 잔인한 준비를 마침으로써 형리의 일은 끝났다. 이제 그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살인이 시작된 것이다.( Ibid. p.164)
사방에 불꽃이 솟구쳐 올랐을 때, 고문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한 순간 몸서리치며 물러설 정도로 끔찍한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곧이어 연기와 불길이 고통으로 죄어드는 육체를 감쌌다. 그러나 점점 더 끔찍하게 천천히 살아있는 육체를 갉아 먹는 불길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밥는 사람의 날카로운 고통의 신음소리가 여전히 울려 나왔다.
그러다가 마지막 고통의 외침이 들렸다.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형언할 길 없이 두려운 죽음의 투쟁이 반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불꽃이 잦아들고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게 탄 기둥에는 시커멓게 탄, 연기를 내뿜는 덩어리가 빨갛게 달구어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더는 인간의 어떤 형체라고 여겨지지 않는 끔찍하게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한때는 하나님의 영혼이 깃들어 숨 쉬었던 한 피조물이 이제는 끔찍하게 역겹고 냄새나는 한 오물덩이로 변하였다.’ (Ibid. p.151) 고 증언하였다.
이것이 칼빈이 처형한 세르베토가 불에 태워지며 오물덩이로 변해가는 참혹한 과정이었다.
(5) 칼빈이 세르베토를 화형시킨 것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
칼빈의 이러한 행태를 보고서 그를 옆에서 직접 지켜본 카스텔리오는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불과 물로 살해당하고 살인자와 도둑보다 더욱 잔인하게 취급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누가 기독교도가 되려 하는가’라고 (Ibid. p.192) 개탄하였고, 200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의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은 이 죽음을 평가하기를 ‘이 하난의 희생(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이 종교재판의 화형대에서 사라져 간 수천명보다도 더 나의 가슴을 흔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르베토의 처형을 두고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고, 따라서 개신교 원래의 이념을 분명하게 부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Ibid. p.167) 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개신교를 죽인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인간사냥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였고 그의 계속된 살상행위로 인하여 개신교는 카톨릭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동일하게 비난 받고 추락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심상용 목사 - 월드크리스챤성경학연구소 소장>
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운명으로 몰아 세운 이종성 원장의 역사에 대한 기만
* 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1) 네 감독관의 죽음에 대한 이종성 박사의 왜곡된 주장
(1)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과 무고한 비난
칼빈 신학자 이종성 원장(기독교 학술원)은 ‘칼빈’이란 저서에서, 제네바에서 칼빈이 자신을 추방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으로 사형 시킨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3년 전에 칼빈을 괴롭게 하고 그를 추방했던 네 감독관은 이미 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한 사람은 성벽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었고 마지막 사람은 관원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제부터 칼빈의 적들이 없어서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것 같기도 했다’고(李鍾聖 op. cit. p.43) 주장하였다.
이종성 원장이 밝힌 앞의 네 감독관이 과연 어떠한 경위로 사형선고를 받고 또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실상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이종성 원장은뒤에가서 칼빈을 추방했었던 네 감독관에 대하여 ‘악질적’이라고 매도하엿는데 과연 네 감독관이 그렇게 악질적이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역사적 본질을 바로 직시하고 아직도 왜곡된 역사가 활개하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2)칼빈과 네 감독관 중 누가 과연 더 악질적이었나
이종성 원장이 ‘악질적’이라고 표현한 네 감독관이 악질적이었는지, 칼빈이 더 악질적이었는지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 가에 대한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져야만 한다. 그 역사적 진실을 잠시 사실 그대로 살펴 보도록 하자. 필자는 당시의 정황을 직접 목격하고 고발한 카스텔레오 목사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놓고자 한다.
1536년 6월경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잠깐 들른 기회에 제네바에서 구교를 무너뜨린 파렐(Willian Farel)의 방문과 초청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네바 시의 성서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제한되어져 있었으며 그의 임용조건은 성서강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성서를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이었다’는(Ibid. p.23) 것이다. 이종성 박사의 확인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칼빈의 일의 영역은 분명하였다.
이렇게 제네바 시에 성서강사로 초빙받은 칼빈은 석달만에 ‘교리문답서’와 ‘개신교 기본원칙 21개 조항’으로 만들어 제출하였다.
칼빈은 이를 토대로 제네바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적으로 강요하였고 교회에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칼빈의 이 같은 요구는 루터나 쯔빙글리도 요구한 적이 없는 것으로 시민들의 법적, 도덕적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과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際名)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그러한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Stefan Zweig. op. cit. p.44참조)
‘그(칼빈)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중략--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 들이고 그에 따르기를 맹세하는 일을 강요해 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하였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 벗어나도 제네바 성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중략--설교자 만찬에 초대 받지 못한 사람은 --바로 여기에 이 무게가 실려있다.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된다. 종교적 관청이 이용당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장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장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이렇게)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하였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갖지 못한 무기였다. –중략--대단히 합목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이러한 추방권을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 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형벌을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 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중략--(처음에 제네바 사람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의를 표시하였다’(Ibid.)고 하였다.
또한 제네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중앙광장에 모여 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형리의 감독 아래 갈레 선의 포로들처럼 열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 가 교회에서 21개조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중략--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흘러 들어온 망명자에 불과하였다. --(이에 불과한 사람이) 이제는 이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고용한 망명자가 이제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니!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는 맹세를 거부하자고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자기들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칼빈은) ‘작은 시의회’를 이용하여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중략--새로운 시의회의 다수파가 그에게 반대하면서 평화를 위해 이 거친 위협과 제명을 그만두고 베른 교회의 온전한 사상을 받아 들이자고 공손하게 설득해 왔지만 칼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타협도 그의 권위적인 천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시의회가 그에게 반대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상급관청에 대항하는 혁명가로 돌변해 버렸다.
공개적으로 그는 강단에서 ‘작은 시의회’를 욕하고 자기는 ‘주님의 성스러운 육체를 개들에게 던지기 보다는 차리리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하였다.
다른 설교자는 교회에서 시의회를 ‘주정뱅이 집합소’라고 불렀다. 칼빈의 추종자 무리는 바윗덩이처럼 꿈쩍도 않고 당국에 저항하였다.
시 당국은 사제단의 그토록 도전적인 거부를 참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설교단을 남용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라고 분명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칼빈과 그 일파는 이런 당국의 명령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 중에 가장 대담한 사람 쿠르토(Courtauld)가 공공연히 폭동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었다. --여기서 교회와 시의 당국의 공개적인 전쟁이 선포되었고 칼빈은 이 싸움을 당당히 받아 들였다(Ibid.)고 하였다.
(3)압도적으로 찬성한 칼빈에 대한 추방결정
칼빈에 대한 제네바 시당국의 인내심은 끝났다. ‘당국은 최고 심급기관인 200인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시 당국은 당국의 명령을 일부러 무시한 칼빈과 공용된 사제들을 해임할 것인지 의결에 부쳤다.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사제들은 직위에서 해제되고 사흘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선고를 받았다. 칼빈이 지난 18개월 동안 이 도시의 수많은 시민들을 위협하였던 벌이 바로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다(Ibid. p.41~52참조).
그 결과,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 스위스의 제네바라는 나라에 초빙되어 일하게 된 18개월의 결과는 추방이라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구교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신교를 추구하는 강력한 요구로 말미암아 다시 아미 페랑이 주도되어 칼빈을 재초빙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재초빙에 따른 칼빈이 요구한 조건이다. 그것은 제네바 시에 대한 강력한 통치권의 행사가 그것인데 칼빈의 재입성은 강력한 통치라는 조건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처음과 다른 양상이었다.
(4)끔직하게 다시 시작된 칼빈의 통치
다시금 시작된 칼빈의 제네바 시에 대한 칼빈의 통치 결과는 이전과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끔찍한 양상으로 치닥데 되었다.
이미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그 살상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오늘날에도 고발되어지고 있다. 칼빈의 측근으로서 이를 지켜본 카스텔리오는 그 통치 결과에 대하여 일부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칼빈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조용하던 제네바 시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름 에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의 도시로 물들어 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너무도 잔인한 고문과 참변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칼빈의 측근으로 있던 사람들의 칼빈에 대한 저항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종성 박사 자신도 이에 대해 밝히기를 ‘제네바 시에서 직접적으로 반 칼빈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고, 동역자들이나 제자들도 있었다(李鍾聖 op. cit. p.59).’고 실토한 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종성 박사 자신이 지적하는 바에서 보듯이, 칼빈의 만행은 끔찍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났고 앞서 말한 제네바 시의 4인 감독관들 역시 시민들이 죽고 참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에 대해 칼빈에 대한 저항을 드러낸 것이다.
(5)네 감독관의 저항의 이유와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언도
우리는 여기서 이종성 박사가 밝힌대로 왜 칼빈의 친구들도, 동역자들도, 제자들까지 나서서 칼빈에게 저항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의 악행으로 인하여 네 감독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것이었다.
사건의 경위가 이러한데도 이종성 박사는 저항하는 그들을 ‘악질적’이라고 몰아 세우며 마치 저항자들이 죽을 죄라도 진 살인 죄인들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제네바 시의 네 감독관으로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었으며, 1541년 5월 16일 저녁에 연회를 베풀고 기염(氣焰)을 올렸다. 그리고 감독관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남아 있던 무리들이 거리에서 데모하였다.
데모자들은 칼빈에게 동조적인 관리들과 프랑스에서 온 망명자 칼빈을 욕하고 폭언과 돌을 던졌다.
이것이 악화되어 유혈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 소요 사건에 가담한 일당을 일망타진하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6월 3일에는 그들(4감독관)에게 참수형이 선포되었고, 8월 6일에는 반델과 비텔리라는 시의원들에게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러자 한 사람은 잡혀 사형을 당하였고, 한 사람은 불구가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도망을 하였다 (Ibid. p.58).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 시를 이와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이종성 박사는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한 사람은 성벽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었고 마지막 사람은 관원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제부터 칼빈의 적들이 없어서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것 같기도 했다’고(Ibid.p.43)하였다.
또한 데모대들에 대한 처형들과 데모진압을 두고 이종성 박사는 ‘일망타진’되었다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쳐부순 것을 자축하면서 “이렇게 하여 그렇게도 집요하고 악질적이고 만만치 않던 반 칼빈파의 세력은 근절되고 말았다.
제네바 시의 결전은 마침내 칼빈의 완전한 승리로 귀착되었다. 이제부터 제네바는 칼빈의 무대로 화하였으며(Ibid. p.59) --라고 주장한 것이다.
2) 이종성 원장이 왜곡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기만 두가지
(1)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이종성 원장
우리는 전자의 사건을 다루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자로서 기독교적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용납되어서는 안될 두가지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는 이종성의 파렴치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칼빈과 반델과 비텔리를 중심으로 한 네 감독관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가’에 대한 거짓된 증언이 그것이다. 두번째는 ‘운명’이라는 그의 교리적 신학적 사상에 대한 패괴한 적용과 주장이 그것이다.
전자의 ‘누가 더 악질적인가’에 대한 기만적 주장을 가려볼 필요가 있다. 이종성 박사는 칼빈 자신의 의견에 반대된다고 마녀사냥을 하며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진 고문을 가하면 죽인 인원 수 만도 58명이다.
이를 수치상으로 보면 5년동한 한달에 한명 꼴로 죽였는데 그런 칼빈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칼빈의 그런 만행을 두고 볼 수만 없어 저항하는 시민들을 ‘악질적’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역사 왜곡인 것이다.
칼빈과 저항자들 이들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가? 살인을 밥먹듯이 명령하는 칼빈이 의롭고, 그런 고통을 당하며 학살 당하고 목이 잘려져 거리에 뒹구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항의하는 사람들이 악질적인가? 우리는 결코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가를 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람 죽이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것을 항의하는 사람들이 악질적이라는 가르침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칼빈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감옥에 잡혀 들어와 ‘그(칼빈)의 분명한 권고에 따라 심문할 때에 나사로 엄지 손가락을 조이는 고문과 밧줄로 잡아 당기는 고문 외에 발바닥을 불로 지지는 고문까지 더했다’라는 칼빈이야말로 악질의 화신이 아닌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반대되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칼빈이 하늘의 성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종교개혁과 칼빈의 허구적인 교리를 앞세워 참혹한 살상과 인간사냥을 밥먹듯이 자행했으면서도 그 부당한 병체(病體)의 역사를 자성하거나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진의 편에서 상대방을 무력으로 무찔러 ‘일망타진되었다’고 하였다.
칼로 정복하고 살상을 일삼는 식의 칼빈식의 사상은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원시초대교회의 세계관에는 없다. 이런 주장을 일삼는 사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일망타진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와 다를 바 없다.
칼빈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종교개혁가로서, 신학자로서, 목사로서의 칼빈이지 정치가로서의 칼빈이 아니다. 칼빈이 정치가로서 사람을 죽였다면 차라리 필자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인물을 다루었을 것이다. 우리가 칼빈이 사람을 죽인 것을 정치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가로서, 목사로서의 칼빈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리를 앞세웠다고 하나 종교개혁가라고 하니 그가 행한 살상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바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라니 예수의 세계관과 아무 상관없는 이러한 칼빈의 사상의 패괴함이 드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2)운명으로 몰아 세운 이종성 원장의 역사에 대한 기만
두번째는 이종성 박사가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이중적인 신학의 두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네 감독관들이 사형 당했거나 불구가 된 것을 두고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라고 43쪽에서 직접 주장하였다.
그런데 다른 책도 아닌 바로 그 책 다음 페이지 100쪽에서 ‘섭리 교리는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 시키는 어떠한 사상에도 반대할 뿐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나 또는 운명이나 행운이나 우연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나 미신자들에게도 반대한다’고((李鍾聖 op. cit. p.100) 하였다.
앞에서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고 덮어 버리고 뒤에 가서는 또다른 주장으로 ‘운명이나 행운이나 우연을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운명론자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이었으면 ‘살인이었다’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든지 해야만 한다. 사람 죽여 놓고 ‘운명’이라고 해 놓고 또 자신의 교리상의 주장에서는 ‘운명이 없다’고 하면서 운명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신학의 궤변인 것이다.
앞에서는 ‘운명이다’라고 외쳐놓고 뒤에 가서는 ‘운명을 반대한다’는 것은 신학이라는 말을 동원할 것도 없는 논리적인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 잡아 죽이는 고문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고 죽지 않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라고 칼빈이 그러했듯이, 사람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다’라고 말해 놓고 뒤에가서 자신들은 운명이나 우연 따위는 반대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수십명 아니 수백명 수천명도 죽이는데 말 한마디 거짓말 했기로서니 누가 그 자리에서 내쫓을 사람이 있겠는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도 없는 ‘운명’론을 펼쳤는데 이종성 원장의 운명론은 도대체 어떤 사상이며 일반 운명론과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를 공개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는 사람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하고 뒤에 가서는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앞의 운명론과 뒤의 운명론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한국교회 앞에 그 진상을 공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칼빈은 그의 주저(主著) ‘기독교 강요’에서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기독교 강요’ 1권 sec.1. 2) 분명하게 못박아 놓고 있는데 이종성 박사의 운명론과 칼빈이 말한 운명론의 교리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만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칼빈의 정통교리에는 분명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교리는 운명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다르고 ‘어’다른데 이종성박사가 말하는 ‘운명’이라는 소리는 정통교리의 속성상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칼빈이 저지른 살상 행위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그들은 그런 운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칼빈의 손에 죽은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살인자이다.
이러한 칼빈의 행위에 ‘운명’으로 덮어 버린 것은 칼빈에 대한 모독으로서 이종성 박사는 자신의 교리적 원조자를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교리적 가면을 앞세워 수없는 사람들의 목을 자라며 불질러 화형해 죽이는 강도의 사상은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밝혀야만 한다.
이 사상은 과거에 문제로 역사적 논의가 끝난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엄연히 기독교의 대표적인 정통사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신들은 칼빈 시대와 같은 권력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반대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그들이다.
따라서 그 날이 오면 그 반대 세력들을 모두 죽이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마각적인 교리자들의 교리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당사자들에 의해 공개될 필요가 있다.
<심상용 목사 - 월드크리스챤성경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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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칼빈의 망명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며
당시 종교개혁이란 단어를 잘 묵상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당시 권력가들은 상당수 카톨릭에서 나왓습니다.
기본적으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방인이였죠. 칼빈이 모든 처형을 주도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제네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권력자들도 존재했고요. 신학적으로 칼빈의 견해가 지지를 받은건 사실이나 모든 정치적 물리적 모든 전권을 휘둘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도 당했습니다.
http://cfocus.co.kr/m/page/detail.html?no=2954
이 글도 읽어보세요.
칼빈의 대변인 .. 칼빈의 후예답습니다.
@아날로그 모든 진실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셔야죠. 한쪽의 주장만을 맹신하면 오류를 범할 여지가 큽니다.
@긍휼또긍휼 두리뭉실한 이념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사람이 사람을 죽일순 없습니다.
열매로 무엇이든지 판단하는 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날로그 아날로그님께서 하나님이 아닐진데 모든 사안을 명명백백히 가늠할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려면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보십시요. 그리고 님 스스로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셔야지요.
@긍휼또긍휼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뭐가 잘못됬습니까?
칼빈의 후예님!!
@아날로그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봐야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단정하면 되겠습니까?!
@긍휼또긍휼 제가 알고싶은 점은 요나한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칼빈이 사람들을 죽인것이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야 어떠하던???
칼빈이 교리때문이던, 다른 이유이던 살인을 한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니, 역사적인 사실로만 대답해주십시오..
종교적인 관점이나 상황을 첨가하면 제가 알고싶은 부분의 본질이 흐려지니까요....
살인을 했습니까? 아닙니까?
@이항석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단정해서 말씀을 드릴 순 없습니다. 제가 칼빈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 분에 대해서 어떤 특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다만 칼빈은 로마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대적이 있던 사람이였고 그에 대한 모함과 루머와 조작이 얼마든지 있을수 있기에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한다는 점입니다.이에 대해선 양쪽의 이야기를 다 검토하는 것이 좋을듯 싶네요.
@긍휼또긍휼 알겠습니다.
저는 그가 살인한 적이 없다고 역사적 사실로 입증해주실 한 분을 찾고 있습니다.
기가막혀서요...
@이항석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기의 신정정치의 목적을 이루기 우해 반대되는 사람들을 70명 이상 무자비하게 죽인 살인자 입니다. 확인해보시면 자료들은 많습니다.
@아날로그 누가 5만명이라고 해서 찾아봤더니 제네바 인구가 1만 3천명이었더군요..
그 또한 거짓말 이었습니다.
저는 칼빈이 단 한 명도 살인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70명이나 5만명이나 살인은 살인이니까요..
그것도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 살인 동기였다면 좌절입니다...
@이항석 그리고 저 글에서 몇가지 오류 중에 하나는 세르베투스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이단이였습니다. 제네바에서 처형 당한 부분은 안타깝지만 그의 사상은 이단이죠.
인명> 에스파냐의 의학자ㆍ신학자(?1511~1553). 혈액의 폐순환설을 주장하였으며, 예수의 신성ㆍ성령 등을 부정하여 신구(新舊) 양 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처형되었다.
만약 칼빈이 믿음의 형제를 불태워 죽이는 일에 동조를 하였다면...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는 심각한 문제일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싶은 점은 요나한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칼빈이 사람들을 죽인것이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야 어떠하던???
칼빈이 교리때문이던, 다른 이유이던 살인을 한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니, 역사적인 사실로만 대답해주십시오..
종교적인 관점이나 상황을 첨가하면 제가 알고싶은 부분의 본질이 흐려지니까요....
살인을 했습니까? 아닙니까?
저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마는
사실 입니다,
@filter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실 분이 한 분도 안계신가요?
https://youtu.be/r7gyFzSdV4A
https://youtu.be/KEkjRUYt7h4
위의 두개의 동영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사람을 죽였을까요?
칼빈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다른 논쟁을 피하자는 것 뿐이니다. 예수님만 취하자는 것 뿐입니다
모세과 다윗도 그렇죠.
한국은 장로교 우세국가로서 아마 세계 유일이라 할 수 있는데 칼빈을 옹호하는 입장의 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카톨릭에서 유아셰례 받고 침례받은 적이 없으며 성직자 제도와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침례중생주의(칼빈식), 예정론 등을 고집하였고,예정론에 반대하면 이단으로 몰아서 실형을 선고하던 제네바 의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구원 자체를 의문시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았던 많은 귀신들린자들은 칼빈에게 갔으면 참수되거나 화형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당들이나 귀신들린 자들 여러명을 화형시키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댓글 퍼온 글입니다
카톨릭의 교리와 신학을 가장 성경적으로 적날하게 비평했던 사람 중에 한명이 칼빈입니다. 카톨릭만이 참 교회라고 생각했다면 왜 반카톨릭 진영에서 사역을 했을까요.
만일에 순교를 당할때 죽인자를 저주할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축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죄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다면 예수님께 맏기면 될것 같습니다.
칼빈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택함을 받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저는 장로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예정론 또한 성경의 나와 있는 말씀으로써 믿습니다.
저야 칼빈이 만든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한국 그리스도인입니다.
늘 장로교 소속이었습니다.
장로교의 신학적 오류를 그래서 압니다.
무천년주의, 계시록 해석의 약함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약점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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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칼빈이 한국에서 이렇게 치열하게 한 마디로 '살인자"로까지 불리우고
그 모든 신학 사상이 부정당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근거없는 사실, 확인되지 않는 사실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 되는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증거가 없이 "또 스스로 각자가 심판자가 되어서" 타인을 폄하하는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고 그 특징이 이 카페에서 여지없이 드러납
칼빈이 지옥갔다는 근거없는 소리들을 환상으로 보았다. 지옥에 가보니 있다 라는 말을 그대로 믿습니다.
한국이 지금 세계 최고의 나라이며 객관성을 유지하는 학문체계를 갖춘 나라인가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개개인은 우수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급하게 미혹에 넘어가는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인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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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말해서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제가 칼빈주의자였다면 그들을 따라서 무천년주의나 계시록 해석을 하지 않고 이러한 카페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당신보고 칼빈주의자라 한 적없다 라고 하겠지만 장로교 신학을 했다 하니 덧붙일까봐
@주임재안에 하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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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객관적인 자료라고 여겨지는 것 두 가짐 제시합니다
저는 누구를 변호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신학이 완전하다 라고 보지는 않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그 당시 종교개혁때에 종교와 정치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였습니다.
교황이 종교인인데 정치권력화하여 왕들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휘둘렀고
그 힘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기독교라 스스로 이름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알고보니 혼합종교인데 그렇게 속여온 것입니다.
그러자 중세의 나라들과 왕들은 종교와 권력을 붙여서 공격하는 가톨릭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봅니다.
@주임재안에 그래서 영세중립국인 스위스 제네바도 (아마 그때부터 영세중립국이었겠지요.) 교황청의 살해 위험과 핍박을 피하여 칼빈같은 사람이 피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네바 시민은 그 당시 유행처럼.. 종교인들인데도 결국 종교와 군사권력을 함께 묶어서 공격해오는 이들에게 대항해야 했고..... 세베레투스는 이단자임이 드러나서 일단 감옥에 갇혔습니다.
칼빈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말을 듣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 제네바 시민이었습니다.
세베레투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칼빈이 몇 차례 찾아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취소해라.
@주임재안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을 취소해라. 그리고 살아나라
안 그러면 제네바 시민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니다. 나는 내 믿음대로 가겠다 라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제네바 시민은 세베레투스를 화형에 처했습니다.
대충 책에서 본 기록이 이러합니다.
더 자세한 이러한 논쟁을 하려면 더 자세한 기록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한국에 칼빈을 살인자로 묘사하는 글들이 나타나고
칼빈이 피신하여 숨어있는 제네바 시민을 통치라도 하고 그들이 죽이도록 했다 라고 비방을 받고 있는 것같습니다.
@주임재안에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객관적인.. 주관적 평가와 사상이 들어가지 않는
그런 자료들은 겸손하고 악하지 않은 자들이 만들어낼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하여 진정한 적이 아닌데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사단의 기괴한 방법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의 끝이 가까이 와서 장로교의 부족과 신학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은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칼빈을 살인자까지 만들고
그러면 장로교는 살인자의 종교가 된다는 건가요? 그렇게 끝까지 가는 것이 올바른 판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취약점이 그렇습니다.
@주임재안에 주임재안에님!
그래서 칼빈이 살인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저는 위의 자료를 보고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단지 이 부분만 알고 싶습니다..
모세가 살인을 했던?,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했던?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핍박했던?
그 문제들과 칼빈의 살인 문제를 연결시켜 그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살인을 했다 또는 안했다는 객관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옥이나 천국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칼빈이 살인을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이항석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1. 제가 인용한 자료들은 제가 책에서 본 것이고 그 책의 저자가 쓴 것입니다.
2. 칼빈이 살인을 하였다 라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극도의 객관적인 말을 하면 "모른다" 이것입니다.
결정적인 단서를 드리지 못해서 유감이지만
제가 본 바의 "책"에 의하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꼭 누구 편을 들어야 그 사람이 솔직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은 꼭 어느 쪽을 편들어야 정직하다 말하는데
스위스라는 나라는 매우 부정직한 나라로 평가될까요? 그러하지 않습니다.
답 : 제가 본 바 없고, 아는 바 없습니다.
왜곡된 기록을 정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중 하나이지요.
@주임재안에 모세와 다윗이 살인한 것이 성경기록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모세와 다윗을 싫어하는 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살인이라는 죄에 대하여 인간이 취하는 태도는 극도의 혐오감과 증오이겠지만
하나님이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취하시는 태도는 성경에 나와있듯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임재안에 아래 두 설교가 가장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입니다.
칼빈의 공과 칼빈의 과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는 설교이군요...
https://youtu.be/r7gyFzSdV4A
https://youtu.be/KEkjRUYt7h4
저는 칼빈을 살인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떠한 배경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설교를 들으니 수단은 잘못되었고, 비극적이었고, 성경적이지 않았습니다.
수단이 목적과 결과를 정당화 시켜 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다시 한 번 해봅니다...
칼빈이 천국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 하나님만 아실것입니다.
@주임재안에 제가 인생을 살면서 세상의 경우에 여러 번 본 것이지만
당장 그 현장에서 선이냐 악이냐 결판을 내려는 것이 한국인의 특성입니다.
(그것이 교만이기도 합니다.)
죽이고 살리고는 둘째 문제이고
악한 자에 대하여도 선하게 대하여 죽이지 않는 것이 한국인의 아량과 선함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한국인의 취약점은 절대로 어떤 선악판단을 즉각적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 취약점이고
결국 그래서 다수의 경우 그런 상황에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이 한국입니다.
판단자들은 나중에 가서 미안하다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악이기도 합니다.
@이항석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침례교회의 판단과 평가는 근거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별로 신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듣지 않습니다. 그 점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임재안에 그러나, 우리도 목적과 수단을 잘 분별하며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노력과 공과 칼빈의 과를 분별하는 계기가 되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칼빈처럼 살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주임재안에 이스라엘 사람들 선민의식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란의 아이들까지 죽이는 그 담대함과 무모함과 무감각함을 보면 선하다 는 건 아닙니다. 물론 선민의 선 자가 그 착할 선 자는 아니지요.
한국인의 역사의식, 우리는 5천년동안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다. 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베트남에 가서 베트콩의 목도 자르고 .... 모진 짓 많이 했습니다. 전쟁상황이니까 그럴 수 있죠.
저는 한국인이 선하다 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선한 줄 알았으나 판단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악하기도 합니다.
@주임재안에 영국은 어떤 법 하나 만드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즉각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기를 정당화하고 숙명처럼 여기는 한국인은 보다 더 체계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급하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천천히 진리대로 가야 하는데 그것을 못 하면
결국 그것도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진리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도 인정하기 싫은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 인간사이겠다 생각됩니다.
@주임재안에 옳으신 말씀입니다. 동의합니다...감사합니다.
저도 예수님 아니면 당장 지옥갈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칼빈의 공도 분명히 인정합니다.
@이항석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칼빈은 살인자 맞습니다.
칼빈이누구인지 학교는어디다녔지
칼빈은성당의 사찰집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카돌릭교육과 카돌릭대학교를 나와서 루터의 의한 종교개혁을 파괴시키기
위해 신부가되지않고 카돌릭에서 파견한 목사(사이비)즉 종교개혁자로 위장한 그리스도인을 죽이기위한 사단의도구이다
워낙 공부를 많이해서 성경해석을 대부분
잘하였으나 구원론등은 사단의구원론이다 성경에대해99%가 맞아도1%가 틀릴수있다 1%가 구원론이면→지옥
전세계 그 수많은 그리스도인중
살인자로 지목되는 사람은
오직 칼빈 뿐입니다
마귀가 칼빈만을 미워해서 올무를 놓은 것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