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여유롭고 관대한 자로 보이고자 애쓰지 않고,
항상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본문 주해)
1~7절 : 다윗이 사울에게 잡히기 직전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다윗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으셨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 틈을 이용하여 다윗은 엔게디로 피신하여 간다. 엔게디는 사해 바다 근처의 천연요새로서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자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하는 것처럼 3천 명이나 되는 군대를 동원하여 다윗을 추격해 온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하여 다윗과 무리들이 숨어있는 그 굴로 들어간 것이다.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며 사울을 죽이자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들의 말을 막으며 사울의 겉옷 자락만 조금 베어낸다. 그리고 그 겉옷 자락 자른 것도 마음이 찔려 한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이기에 내 주를 치는 것을 주께서 금하신다고 하며, 사울을 자신의 주라고 한다.
8~15절 : 사울이 나간 후에 다윗도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부른다. 사울이 돌아볼 때에 다윗이 엎드려 절하고 말한다.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한다. 사울의 신복 들 중에 그런 말로 다윗을 모함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사울의 옷자락을 보이며 말한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와 임금님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시고, 나의 억울한 것을 주님께서 직접 풀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나의 손으로는 직접 임금님께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12절, 새번역)
또한 속담을 인용하여 악은 악인에게서 나기에 자신이 왕을 해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악인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과 같은 존재라고 사울 앞에 자신을 낮춘다.
(나의 묵상)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여호와께 기름 부은 종이므로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
이것은 사울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인 것이다.
어제 몇몇 믿음의 지체들과 점심 시간을 같이 보냈다.
청소년들의 믿음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가 지금 한창 뜨고있는(?) 어떤 청소년 전문 사역 단체가 진행하는 캠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작년에 이 캠프에 청년들과 함께 한 번 참여했었다.
요즘과 같이 교회들마다 청소년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하는 때에 그 큰 교회 본당을 꽉 채운 청소년들을 보니 가슴이 뛰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찬양이었다. 이 장면은 무슨 콘서트를 연상시켰다. 쓸데없는 조명들이 무대를 혼잡스럽게 왔다갔다 비추었다. 아이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냉랭해졌다.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굳이 저런 조명이 왜 필요할까 생각했다. 그에 대해 혹자는 말한다.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이어지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은 더 실망스러웠다.
1시간 가량의 말씀 시간 동안 내내 아이들을 웃기기 바빴다. 때때로 쓰는 그 용어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하나님 말씀을 저렇게 경망스럽게 말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목사님은 그렇게 30~40분 아이들을 웃기며 한 마음이 되더니 뼈대없는 내용들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마쳤다. 당연히 조는 아이들이 없다. 강사와 청중의 관계가 ‘재미’로 단단히 묶여졌다. (심지어 어떤 아이들은 이 목사님 설교 듣기 위해 해마다 이 캠프에 온다는 뒷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너무도 가슴이 헛헛하더니 분노가 치솟았지만, 역시 눈높이를 맞춘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목회자(목사님)를 판단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면 누구는 그렇게 ‘주의 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며, 오늘과 같은 본문을 들이밀기도 한다. 어쩌면 어제 그 자리에서 내 말을 들으셨던 목사님은 나를 아주 교만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다윗이 오늘 사울을 살려 보낸 것은 사울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다.
어제 그렇게 목사님들을 판단하고 오늘 이 본문을 대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주의 종을 판단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싶지는 않다.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다 주의 종이기 때문이니 그들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주의 종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만 하신다’ 하면서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하며 무슨 성역을 대하듯이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옳고 그름을 말하기를 원한다.
오늘 새벽에 이 단체를 위해, 또 그와 관련된 모든 강사분들(다 모르지만)을 위해 기도했다.
은혜 받으려고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인다는 것이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인데 그 시간이 예수님 없는 그들만의 흥분된 잔치가 되지 않길, 예수님만을 찬양하고 예수님만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기도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아마 그들을 심하게 판단한 것에 대한 내 마음에 찔림이 있었기 때문일까?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의 심정인가?
아무튼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들이, 잘못된 목회자들의 적당한 바람막이로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묵상 기도)
주님,
제가 다윗이라면 단칼에 사울을 쳤을 것인데....
아니, 굳이 제 손이 아니라 부하들을 시키면 더 가뿐한 일을.....
사실 저는 다윗의 마음이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아, 십자가에 연합됨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자주 말하면서도 이런 일은 되고, 저런 일이 되지 않는
모순투성이의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님만 의지하오니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펀(fun)이 우상인 시대,
청소년들을 펀으로 빠지게하는 강사는
심판받아 마땅한 거짓 종이지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게 피를 묻혀 악을 행하지
않는 다윗과 다른 경우이겠죠.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왔는지,
지도자의 책임이 가장 크고,
지도자이건 성도이건 복음을 바로 알고
각자 주님과 교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