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군’과 ‘투명인간’ ▒
   
극단의 시대, 아버지 얘기를 해본다.
그 시대의 아버지는 ‘폭군’, 이 시대의 아버지는 ‘투명인간’.
이렇게 한 단어로 요약해도 무방할 듯하다.
‘폭군’의 지위에서 ‘투명인간’의 나락(那落, 불교용어로
죄업을 짓고 매우 심한 괴로움의 세계에 난 중생)으로
떨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도 인자한 아버지가 있었지만,
대체로는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권위적인 아버지가 군림하는 가정이 많았다.
시대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가장은 한 집안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 왕 중에는 폭군도 적잖았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해가 지면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집안에만 들어오면 왕으로 돌변한다.
단지 잔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아내를 폭행하고,
말리는 자식들마저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집안에서 폭군이 되어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퍼질러 잤다.
“남편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내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니 뭘 알겠노?”
만취 상태로 집안에 들어와 대충 이런 식의 멘트를 날렸다.
어쩌다 아내가 ‘당신은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느냐.
쥐꼬리만 한 돈 벌어오면서 큰 소리가 나오느냐’고
잔소리를 하면 ‘시끄럽다’며 이내 폭력을 행사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마누라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줘야 한다.”
그런 ‘폭군’에 가까운 권위적인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이 벌써 이 시대의 아버지가 됐다.
시대는 180도 변했다. 극과 극 체험이다
TV에는 ‘투명인간’ 아버지를 희화화한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장의 권위를 처참하게 짓밟고 있다.
늦게 귀가해서 ‘밥 달라’고 하는 남편은
이 시대의 별종(?) 취급을 받는 유머까지 등장했다.
매 맞는 남편 이야기도 있다.
매 맞는 사유 중 하이라이트는
‘그냥 아침에 눈 떴다’는 이유다.
‘빨리 죽어라’는 저주에 가까운 유머다.
요즘 아버지는 서럽다.
30대 젊은 가장들은 소변이 튄다는 이유로 좌변기에서
앉아서 볼일을 보고, 중년의 가장들조차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권을 아내에게 다 빼앗겼다.
이런 푸대접을 받는 가장들을 일상으로 보니까
아이들조차 아버지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아버지를
극단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이 시대의 흐름은 ‘아버지 위상의 급추락’으로
결론지어도 크게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유머 ‘아내의 1~5순위’가 이를 대변한다.
아내에게 소중한
1순위는 자녀, 2순위는 친정 부모, 3순위는 친구와 돈,
4순위는 애완동물, 5순위가 남편이란다.
‘폭군’의 지위에 있던 그 시대 아버지들에겐 통탄할 유머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 때문일까. 여성 인권이 급신장하고,
시댁이 아닌 처가 중심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남편의 지위는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過猶不及이라고 했다.
‘폭군’도 문제지만 ‘투명인간’은 더 심각한
사회적 폐해를 낳게 될 것이다. 아내인들 남편을
애완견보다 못한 취급을 해서 결국 뭘 얻을 것인가.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은
자녀의 건강한 정서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폭군’도 ‘투명인간’도 정답이 아니다.
이 시대 아버지상에 대한 中庸의 도가 절박하게 느껴진다.
영어로 ‘Middle Path’.
이 시대의 아버지를 계속 ‘투명인간’ 취급하다 보면
그 반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괴물 아버지상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면,
적당히 권위도 있으면서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 정답일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 전체가 따뜻하게 마음을 열자.
남편을 떠받들라는 얘기는 가당치도 않은 부탁일 테지만,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권위라도 지켜주자.
- 매일신문 권성훈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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