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동문
안기부에서 잡으러 올 것 같아 박종철 기사 쓴 날 집에 못 들어갔죠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3호(2018. 2. 9)

신성호(27회, 62세)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시내에서 만납시다.”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희대의 특종 ‘박종철군 사망’ 기사를 썼던 27회 신성호 동문을 인터뷰하려고 전화를 걸어 ‘시간을 내줍시사.’ 부탁했더니 겸손한 대답이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후배가 선배를 찾아 뵙는 게 도리.’이고‘ 사진도 학교를 배경으로 찍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를 들어 “찾아 뵙겠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연구실로 오라.”는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인터뷰를 위해 1주일 전 관람한 영화 ‘1987’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의 연구실에서 마주앉아 준비해간 질문지를 펼쳐놓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같은 업종에 종사한 덕분인지 나의 질문과 신 선배의 답변은 주파수가 잘 맞아 돌아갔다.
+ 저는 고등학교 때 신문 반이었습니다. 선배님께서도 혹시 경희 신문을 만드셨습니까?
“저는 신문반원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은 있었어요. 당시 진로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떻게 사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고, 나만을 위한 삶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게 뭘까?’ 생각해 보니까 그 중에 하나가 저널리스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생각은 대학교 와서도 변함이 없었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고 꿈을 이루게 된 거지요.”
+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적인 특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앙일보는 기사를 작게 처리했고, 잔치는 동아일보의 몫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프셨겠습니다.
“그날 기사를 쓰고 나서 회의가 있었는데 선배 한 분이 ‘네 기사는 역사적인 특종이 될 것’이라고 격려해줬습니다. 사회부장도 ‘엄청난 특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회의 끝나고 회식을 하는데 한 선배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말라.’며 ‘안기부에서 너를 잡으러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잤어요. 그제서야 ‘일이 잘못되면 여섯 식구 부양을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어서 7년간 기자 생활한 것들을 더듬어봤어요. 훗날 기자를 그만두고 ‘기자 하셨다는데 어떤 보도를 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기자생활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런저런 걱정들이 사라지더군요.
다음 날 숨어있다가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아직은 위험하니 움직이지 말라.’고 하더군요. 얼마 더 지나서 사회부에 전화를 했더니 ‘이젠 괜찮을 것 같지만 출입처에는 나가지 말고 회사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잠적을 끝내고 복귀했지요. 회사에 들어가서 사회면 편집자를 만났는데 ‘기사를 키우지 못해 미안하다. 대신 독자 눈에 띄게 하려고 4단 만화 옆에 배치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대학생이 고문으로 조사를 받는 도중에 죽었다는 기사가 사회면에 2단으로 배치됐다는 자체가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더 크게 써야 할 기사인데 작게 처리됐다.’는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요. 그래도 ‘회사에서 겁을 먹고 이렇게 했겠구나.’하는 짐작은 했었어요. 실제로 5공때는 안기부에서 기사 관련해서 취재기자나 담당데스크를 데려다 조사한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요.”
+ 그 기사를 지면에 싣기까지 과정이 간단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도 후에도 시끄러웠을 것 같고요.
“정부는 다음날 바로 오보(誤報)라는 입장을 발표했어요.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에서 편집국장 대리에게 전화를 해서 ‘오보니 기사 빼라.’는 요구를 했고 우리는 ‘못 뺀다.’고 버텼죠.‘ 우리는 팩트(Fact)를 확인했다.’고 했더니 욕까지 하더래요. 외신들이 내 기사를 보고 취재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확인을 해주지 않아서 중앙일보를 인용보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정권에서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지요. 다음날 초저녁에 첫발표를 했는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한 거에요. 그때 이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이 처음 나왔어요. 당시에는 신 군부가 모든 사안에 대해 ‘어떤 기사의 크기는 어느 정도 크기로 쓰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이 사건은 돌출사건이라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쓸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 와중에 정부통제가 무너진 건 1월18일부터에요. 17일이 토요일이었는데 오후에 법조기자 4~5명이 정구영 서울검사장 사무실로 사건수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들렀어요. 그런데 그때 정검사장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어요. ‘물고문혐의가 있다. 관련경찰을 구속하겠다.’는 얘기를 흘린 거지요. 기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중간에 뛰어나가서 회사에 전화를 걸고 난리가 났어요. 1월18일자 조간 1면톱, 19일자는 석간들이 1면톱으로 받았어요. 15일 사회면2단으로 시작한 기사가 3일만에 1면톱으로 커진 거에요.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추격보도에 나섰고, 댐이 무너진 것처럼 매일 1면 사회면 할 것 없이 이 기사가 대서특필됐어요.”
나도 기자생활을 하면서 특종을 몇 차례 했다. 그때마다 취재원은 ‘오리발’을 내밀었고, 경쟁지들이 추격보도를 하고 난 후에야 사실을 인정하는 게 상례였다. 나는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었다. 그 순간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정부에서는 부인하고, 공안기관의 압박으로 귀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매체들이 추격보도를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특종 했다’는 안도감이 들지는 않던가요?
“아니에요. 팩트에 대한 확신은 있었어요. 취재당일 오전9시50분에 첫 단초를 잡은 건 대검공안4과장 이홍규검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였어요. 이과장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눈이 마주쳤어요.
그가 나보고‘앉으라’고 하더니 ‘경찰 큰 일 났어’ 그러는 거에요. 그때‘뭔데요?’라고 되물으면 산통이 깨질 것 같아, 나도 아는 것처럼‘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맞장구를 쳤어요. 그러니까 또 ‘서울대생이라며?’ 그러는 거야. 그래서 또 ‘아침에 서울대 출입기자에게 확인했더니 그렇다 네요.’라고 아는 것처럼 얼버무렸지. 그런데 이과장이 ‘아니 어떻게 조사를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그것도 남영동에서……’라고 받지 뭐에요.
그때 차 한잔이 들어왔어요. 찻잔을 드는데 손이 떨렸어요. 그걸 감추느라고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니까. 서울대 출입기자에게 학적부 뒤지라고 해서 죽은 학생 이름이 박종철이라는 것을 확인했는데 주소가 부산시 청학동으로 나왔어요. 부산주재기자가 박종철군의 누나와 연결이 됐는데 ‘경찰에서 통보를 받고, 아버지어머니께서 서울에 가셨다.’고 하더래요. 팩트는 거기까지 확인했는데 사회부장이 ‘너 자신 있어? 잘못되면 너, 나, 국장, 사장 줄줄이 남산 간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이미 돌아가고 있던 윤전기를 세우고 기사를 새로 집어넣었어요. 국장은 사장에게 보고하면 기사게재를 허락하지 않을까 봐, 보고도 않고 윤전기를 세웠어요. 나중에 박군 아버지에게 들었더니 종철군은 14일새벽에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오전11시~11시20분 사이 욕조 턱에 목이 눌려서 죽었다더군. 다음날 내가 기사를 썼고, 그 시각에 경찰이 종철이 아버지를 숙직실로 데려가서 ‘9500만원을 줄 테니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사인을 하라고 강요 했다는 거야.”
+ 24회 김주언 선배께서는 보도지침 폭로로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박종철기사를 쓰기 전에 혹시 이기사를 써서 군부정권에 체포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같은 건 없었습니까?
“첫날은 잠적해있었고, 이튿날 집에 들어가서 ‘우리 전화는 기관에서 듣고 있다고 생각해라. 도청할 수 있으니 전화에 대고 약점 잡힐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한 후, 나도 조심했어요.”
+ 기사화 이후 겁박이나 불이익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회사에서는 상을 받았어요. 연말에 특종기자에게 주는 큰상을 받았고, 기자협회로부터는 취재보도부문 한국기자상을 받았어요.”
왕년의 특종기자에서 교수로 변신한 신 선배의 현실진단이 궁금했다.
+ 지금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자와 교수는 어떻게 다릅니까?
“신문방송학과에서 실무를 강의하고 있어요. 실용학문분야를 맡고 있는 셈이지요. 현장에서 경험했던 부분을 후배들에게 강의하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어요.”
+ 신문방송학과 교수님을 만난 김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언론을 지배하는 구조는 군사정권에서 자본권력으로 바뀌었을 뿐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실질적으로 언론사의 간부들은 보도와 함께 광고영업에 매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작금의 이 같은 현실이 개선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맞습니다. 이런 상황은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요소입니다.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지요. 뉴미디어의 발달로 전통매체인 신문과 지상파 방송은 계속 위축되고 있어요. 신문은 부수가 줄고, 방송도 시청률이 낮아지고 있죠. 광고라는 파이는 정해져 있는데 종편, 인터넷 신문 등 등록된 매체만 7,000개가 넘어요. 광고수입이 줄고 구독료도 줄어들 수밖에……그러다 보니 언론들이 진실추구라는 본령보다 비즈니스에 눈을 돌리고 있어 걱정이에요. 게다가 한국에는 포털이라는 독특한 미디어 생태계가 있어요. 독자들이 포털을 통해서 뉴스를 공짜로 보는 통에, 전통매체들은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구글을 통해서 뉴욕타임스를 볼 수 없어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뉴스는 공짜’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언론이 본연의 가치를 회복할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해 매체가 많다 보니 오보가 양산되고 있어요.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중이에요. 한 매체에서 보도하면 확인은 뒷전이고 추격보도에 바빠. 그러다 보니 오보가 줄줄이 양산되고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탑승객 전원구조.’같은 오보에요. 과거엔 한 매체에서 보도를 했다고 해도 사실확인을 했는데, 요즘은 ‘아니면 말고.’하는 식이야. 뉴스 속성이 시간과의 싸움이라 오보가 있을 수 있지만 요즘은 오보의 양산 시스템이 구조적이라는 게 문제지요. 나는 발로 뛰는 현장확인 취재만이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발로 뛰면 오보의 위험이 줄어들거든. 인터넷이나 미디어기술이 발달해도 현장확인은 반드시 필요해요.”
+ 젊은 기자들이 기자적 양심과 조직의 요구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언론학자로서 젊은 기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나는 편집권 독립보다 더 큰 문제는 정파성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현상이 일반화하고 있어요. 그건 굉장히 위험해요. 예전에는 언론통제로 쓰고 싶은 기사를 쓸 수 없었는데, 지금은 한국의 매체들이 정파성을 띄고 있어요. 진보성향의 매체나 보수성향의 매체가 있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념과 관계없는 사안까지 이념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에 맞물려서 걱정스러운 것은 자사이기주의에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저널리즘의 가치 정도는 외면해버리고 있어요. 또 한 가지 요즘 학생들은 모두들 총명한데 개인의 관심분야에만 매몰되고 있어요. 그래서 ‘특종 1987’을 쓰게 된 거에요. 내 박사학위논문이 ‘박종철 탐사보도와 한국의 민주화 정책변화’ 였는데 내용이 그 이후 6월항쟁, 6.29선언, 민주화까지 진행상황을 분석한 논문이었어요. 논문은 딱딱하니까 작년 박종철30주기에 맞춰서 읽기 쉽게 고쳐 쓴 거에요.”
두 시간 넘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밝았던 창밖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촬영을 해야 할 것같았다. 카메라를 챙겨 사진을 70컷쯤 찍었다. 신 선배는 그의 저서 ‘특종 1987’의 내지에 서명을 해서 내게 건넸다. 연구실 밖 캠퍼스에는 얼어붙은 어둠이 내려있었다.
글· 사진: 우현석(33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