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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요한 주제는 읽기와 쓰기, 고독과 연대, 병과 돌봄, 삶과 죽음, 어머니와 딸, 아이슬란드와 극지방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프로이켄의 『북극 모험』,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리고 『백조 왕자』 『룸펜슈틸츠헨』 『눈의 여왕』 같은 구전 동화들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활용해 솔닛은 주변의 여러 삶들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마침내 이해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변명하거나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 혹은 작가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해이다. 작가는 이를 용서이자 사랑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이런 따뜻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세밀하게 관찰한다. 내밀한 회고록이지만 읽기와 쓰기가 지닌 공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유려하게 웅변하는, 솔닛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에세이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나와 우리를 이루는 이야기들의 힘
이 책의 다양한 주제를 하나로 엮는 큰 주제는 이야기하기의 힘이다. 우리는 이야기들을 엮어서 정체성을 형성해낸다. 솔닛의 말대로 자아는 우리의 삶이 만들어내는 중요한 작품이자, 만인을 예술가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많은 동화들은 문제 해결을 다루는데 동화 주인공들은 그 문제 해결 와중에 ‘자신’이 된다. 이것은 이야기하기의 기본 원칙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인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의 한계를 알아차리고 넘어서며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간다.
우리의 이야기들은 도중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만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일에 근본적으로 ‘듣기’와 ‘읽기’의 능력, 타인에게 감정이입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프랑켄슈타인』 같은 고전이나 『백조 왕자』 같은 원형적인 서사뿐 아니라 극한의 추위에서 남편과 아이의 시체를 먹고 살아남은 에스키모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전 세계가 방송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우물에 빠진 여자아이를 구하고 그 후유증으로 자살한 어느 소방관의 이야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북극곰을 잡아먹는 북극곰 이야기, 무엇보다 『신데렐라』의 음울한 버전이라 할 법한 솔닛 어머니의 이야기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호출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솔닛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다시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다. 솔닛의 이야기인 이 책은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서 그녀의 삶과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연결시킨다.
동화에서 힘 자체가 살아남기에 적합한 수단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힘없는 이들이 연합하여 성공을 이룰 때가 많은데, 이는 종종 서로에 대한 친절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망가뜨리지 않은 벌집, 죽이지 않고 풀어 준 새, 존경의 마음으로 맞아준 노파 같은 존재들이 그 행위를 되갚아준다. 미약한 존재에게 씨앗처럼 뿌렷던 친절이 동화헤서 그리고 가끔은 현실에서도, 위기의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28)
작가가 된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마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직업의 특성상 고립되며,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가끔 재능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96)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100)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썰물 때의 단단하고 축축한 모래 위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다시 밀물이 들어와 지나온 흔적들을 깨끗하게 지우기 전까지는 그렇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각자 뒤에 남긴 그 긴 선을 바라보는 걸 나는 좋아한다. 가끔은 나의 삶도 그런 식으로 상상해 본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느질의 한 땀 한 땀인 것처럼, 마치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길과 교차하기도 하면서, 비록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그 모든 길이 누비이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로 엮인다.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192)
감정이입(empathy)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286)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지닌 매력 중 하나는 게르다가 카이를 눈의 여왕으로부터 구출해서 다시 우정을 되찾는다는 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많은 미국 원주민 이야기는 도무지 끝나는 법이 없다. 동물 세계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조상이나 창시자, 무언가 베푸는 이가 되어 여전히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 부유하고 풍족하고 사랑받고 보호받고 특혜를 받던 싯다르타가 그 모든 것을 떨치고 나가는 과정은, 마치 이야기를 거꾸로 진행시키는 것만 같다. 그는 마치 모범답안처럼 태어나서, 그 안전한 항구를 버리고 끝나지 않는 질문들과 일들이 있는 바다로 나아갔다.(363)
질병과 고통에의 감정이입, 그리고 돌봄과 성찰이라는 노동을 통해 성취한
아름다운 인격의 기록
이 책은 무엇보다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이다. 딸이 어떻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넘어서고 이해하는지에 관한 서사다. 딸이 어떻게 자라나 마침내 뜻깊은 존재론적 성취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서사다. 조금 과장하자면 여성주의적 성장 서사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압도당하고 아버지와 경쟁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는 근대적인 남성적 성장 서사의 전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적인 성장 서사라 할 만하다.
다른 사람(혹은 동물)을 돌보고 다른 이야기들을 읽고 듣고 또 글로 써내는 일은 이 책에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노동이다. 그것은 ‘감정이입’이라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능력을 요하는 노동이자 정직한 땀방울을 요하는 노동이다. 이런 노동을 통해 형성된 솔닛의 ‘자아’는 “궁전, 부자, 복수 같은 관습적인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풍요롭고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면서 성취한 것만큼이나 말이다. 거기엔 진짜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신적인, 예술가다운, 부모다운 힘이 담겨 있다.
그 시기에 어머니의 상태는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동화 속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살구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과일 자체를 처리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무언가 오래된 유산과 임무를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비유 같았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비유였을까?(29~30)
나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러 여인에게서 들어 왔던 이야기의 또 하나의 변주이다. 그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모든 이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 준 다음, 딸에게서 자신을 되찾으려 노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36~37)
여성이 거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했던 시절에 젊고 가난한 여성이었던 메리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전지전능한 지위에 오른다. 자신의 용어로 세상을 묘사하고, 잘못돼 버린 세상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그리고, 집단적 상상력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면에서 다른 낭만주의 시인 모두를 작아 보이게 만들어 버리는 걸작을 써 낸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전설이나 동화처럼,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꼭 떠오르는 어떤 원형이자, 인간 조건의 일면을 축약해 보여 주는 상징이 되어 버린, 예외적인 작품이다.(79~80)
부모, 예술가, 신이라는 세 부류는 뭔가를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소설은 창조자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또한 인간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사실 보수적인 작품인데, 관습적 규범을 옹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목표의 추구보다 의무감과 애정으로 묶인 유대감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그 안에는 작가의 남편이자 고집 세고 활동적이며 종종 이기적이었던 시인을 향한 보이지 않는 원망도 담겨 있었다.(81)
질병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홀로, 자족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뜨림으로써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한다. 당신은 타인의 골수나 혈액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사랑하는 이들의 보살핌도 필요하다. 당신이 병에 걸린 이유는 모기에 물렸다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거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혹은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생물학적인 존재라는 사실, 유한하며, 타자와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191)
몇 인치에 불과한 가닥들이 서로 꼬여 한 줄의 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치 단어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그 실이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거미줄이나 지푸라기, 쐐기풀 등을 가지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 셰에라자드는 끊어지지 않는 실 같은 이야기들을 이어감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한다. 그녀는 자아내고 또 자아내며, 새로운 조각들, 인물들, 사건들을 자신만의 끊어지지 않는, 끊을 수 없는 서사의 실에 덧붙여 간다. 그와 반대로 페넬로페는 몰려드는 구혼자들과의 결혼을 피하고자, 낮 동안 짰던 시아버지의 수의를 밤이면 다시 풀어 버린다.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다시 그 천을 풀어 버리는 과정을 통해 이 여성들은 시간 자체를 정복했다. 비록 ‘정복자’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명사이기는 하지만, 이 정복은 여성적인 것이었다.(194)
‘스핀스터(spinster)’라는 단어가 ‘노처녀’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가지기 전에, 물레 가락이 곧 집 안에서 여성의 영역을 상징하던 시절에, 모든 여성은 곧 스핀스터, 즉 실을 잣는 사람이었다.(194)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늙음과 병, 죽음을 완전히 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부러 혹은 다른 이유로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잊고 지낸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떤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하거나 상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실감하고 나면 그게 우리든 당신이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이 든 어머니가 아프고, 곧이어 나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친구 앤이 죽어가고, 넬리의 딸이 위험한 상태로 태어났던 그해 살구 수확기에, 나는 그 점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222)
물론 내가 당신의 어머니인 것 같다는 어머니의 농담에는 날이 서 있기도 했다. 한편으로 어머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늘 헷갈려 하셨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겐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데, 그 점을 감안하면 내가 어머니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나는 가끔씩 엄마 역할을 맡아야 했다.(329)
아이슬란드로의 여행, 나를 떠나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여행
이 책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 서부 출신의 한 작가가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다녀오는 과정을 그린 여행 에세이기도 하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닌 저자 덕분에 이 책은 특별한 깊이감과 공간감을 지닌다. 솔닛은 미국 서부의 친숙한 장소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머나먼 장소들에서 다른 이야기와 다른 자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좋은 여행자다. 자아를 깊이 파고드는 일만큼이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이 중요하듯,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려는 마음도 필요하다는 것,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자신의 여행을 통해 효과적으로 납득시킨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이국적인 정경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그곳의 여러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과 어울려 더 빛을 발한다. 아이슬란드에서 솔닛은 독특한 시선으로 어둠과 빛, 그리고 냉기와 온기에 대해 사유한다. 그리고 그런 사유는 자연스럽게 동족을 잡아먹는 북극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우리가 살 수 없을 곳으로 만들고 있는 인간의 오만과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어진다. 에세이스트이자 역사가, 예술 비평가이자 환경 운동가,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자 형제, 혹은 친구로서의 다양한 면모가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나는 친구나 스승을 발견하기 전에 책과 장소를 먼저 발견했고, 사람이 주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들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문제가 있을 때면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그렇게 안과 밖이 뒤집힌 세상에서는 집만 아니면 어디든 안전했기 때문이다. 행복하게도 그곳엔 참나무들이 있었고, 언덕, 시내, 작은 숲, 새, 오래된 목장과 마구간,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그렇게 열린 공간이 나에게 개인적인 것에서 튀어나와 인간이 없는 세상을 껴안으라고 부추겼다.(54)
그때 “안 갈래요.”라고 대답했더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영원히 궁금해했을 것이다.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보물을 거절한 듯한 느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지닌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험에 대해, 미지의 것과 가능성에 대해 “네”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59)
마치 책이 하나의 문이 된 듯했다. 사람들이 책을 통해 들어와 내 삶에 발을 들이고 나를 그들의 삶으로 이끈다. 예상도 못 했던 표가 생긴 셈이었다. 실제로 그곳에 발을 디디기까지 7개월 동안, 아이슬란드는 내게는 하나의 부적이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창이었다. 내게 벌어진 모든 문제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곳이 있다는, 나 또한 머지않아 이 문제들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115)
거의 20여 년 전부터 자웅동체의 북극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식이 불가능한 변종이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북극곰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상태다. 조류에 떠밀려 오거나 철새가 옮겨 온 오염 물질이 체내에 쌓여서 생긴 결과였다. 이어서 곰이 익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삶의 터전이었던 얼음이 녹아 사라졌음에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던 곰들이 그 희생자였다. 메리 셸리의 소설에서 비정상적인 자연은 예외였을 뿐, 나머지 세계는 대부분 야생이나 질서 정연한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주변 풍경이 모두 괴물이 되어 쫓고 쫓기는 상황, 오염 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부터 세상 끝까지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이런 상황 말이다.(230)
어둠 속에서는 여러 가지가 하나로 섞인다. 그렇게 열정은 사랑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의 결과로 모든 자연과 형체가 생겨난다. 섞이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자아를 규정하는 경계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어둠은 무언가를 낳고, 그렇게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든 예술이든, 미지의 것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영역, 다음에 무슨 일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빛이 비치면 생각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그림자가 드러나고 다른 이들도 알아보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빛 속이 아니다.(272)
그 안에서 나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고, 아이슬란드의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바로 그곳에서 나 자신이 되는 것 같았다. 아이슬란드에 관한 쥘 베른의 소설 제목이 『지구 중심으로의 여정』이었는데, 바로 그 미로 속 경험이 그 ‘여정’이나 그 ‘중심’인 것만 같았다.(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