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과 병오년 그 사이 / 박얼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사 돌고 돌아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올 여름 극한 더위 속에 천수를 누리신 모친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 11월 하순엔 우리집 희망둥이 둘째가 태어났다 한 생애 떠난 자리 또 한 알의 씨앗으로, 새로운 인연으로 오늘 늘 굳건하건만 북적북적 시끌벅적 식구 많은 집안이 늘 부러웠던 울 가족들 집안 대소사 때마다 겪는 적적함, 그게 큰 불만이었던 우리들 문득, 곰곰이 두 해(年)를 놓고 따져 보니
지난 250여 일 동안
우리도 우리집 나름의 획기적 대가족
단란한 역사 한 줄 남겼다
"오손도손 한 상 맞춤
총원 '여덟 명' 큰 식구"
2025년 겨울 초순부터
2026년 여름 그 사이.
박얼서 시인의 ‘을사년과 병오년 그 사이’는 인간 삶의 영원한 순환과 가족의 소중함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성찰한 서정시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정에 찾아온 이별과 만남의 순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1. 생명의 순환과 우주적 질서의 시각화
시인은 모친의 별세라는 '상실'과 둘째 아이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대립시키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순환으로 바라봅니다.
"한 생애 떠난 자리 또 한 알의 씨앗으로": 죽음은 허무한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틔우는 토양이 된다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시간적 배경의 상징성: 2025년(을사년)과 2026년(병오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가문의 역사가 교차하고 이어지는 신성한 연대기로 격상됩니다.
2. '여덟 명'이 갖는 찰나의 기적과 대가족에 대한 열망
이 시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한 상 맞춤 '여덟 명' 오손도손 큰 식구"라는 구절입니다.
시인은 이 찰나의 순간을 "우리집 나름의 단란한 대가족 획기적 역사"라고 명명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장 특별한 행복을 발견해 내는 탁월한 시선(발견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3. 담담한 어조가 주는 깊은 울림
어머니를 여읜 슬픔에만 함몰되거나, 아이가 태어난 기쁨에만 들뜨지 않는 절제된 감정의 균형 감각이 돋보입니다. 예스럽고 묵직한 시어(천수, 대소사, 적적함)와 현대적인 감각의 표현(희망둥이, 획기적 역사)이 조화를 이루어, 세대를 관통하는 가족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총평 박얼서의 ‘을사년과 병오년 그 사이’는 슬픔을 위로로, 상실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치유의 시학을 보여줍니다. 떠난 이가 남긴 사랑과 새로 온 이가 가져온 희망이 '여덟 명의 밥상'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완성되는 모습은, 핵가족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듭니다.
이 시의 가장 큰 미덕은 ‘평범한 일상의 신화화(神話化)’에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가족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을, 을사년과 병오년이라는 천간지지의 흐름 속에 밀어 넣어 한 편의 거대한 ‘가족 대서사시’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계절(여름 극한 더위)과 기쁨의 계절(겨울 초순)이 맞물리며 자아내는 묘한 여운은, 읽는 이로 하여금 나의 부모와 나의 자녀,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