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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남도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짠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하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같은 말과 동의어입니다.
얼마 전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목에 누군가가 유기를 한 반려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체 버려진 강아지는 언젠가 주인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졌는지 모릅니다.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것 저것 주렁주렁 팔에 달고 있는 한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황을 보니 어린 암환자였습니다. 아이를 케어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젊은 엄마까지....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지던지요.
오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한 병고와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을 향한 짠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짠한 마음은 곧 연민의 마음이요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영어로 적합한 단어는 compassion일텐데, 이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괴로워 하다’ ‘함께 고통 당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한 가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표 인물이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의 나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해갈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왔던 그는 이번이 자신의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즉시 짠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련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은총을 많이 받는 유일한 방법>
복음: 마르코 1,40-45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바로 은총은 계약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쥐가 들끓었습니다. 이때 얼룩무늬 옷을 입은 신비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쥐잡이 꾼이라 말하며 일정 비용을 내면 마을에서 쥐를 없애주겠다고 말합니다. 시장은 별생각 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조건에 동의합니다. 그는 피리를 불어 쥐들을 마을 밖 강물에 빠트려서 죽입니다. 쥐 떼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후 그는 보상을 받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쥐가 사라진 것을 본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어깁니다. 그들은 전액 지불을 거부하고 단지 미미한 액수 만을 제안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다른 곡을 연주합니다. 하멜른의 모든 아이는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따릅니다. 그는 그들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은총을 주는 이가 나에게 해로운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는 이가 말하는 진리에 순종 하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은총은 요구하면서 순종 하지 않으면 은총을 주는 이를 자기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내가 감사하는 이에게 순종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이 고쳐진 사람은 주님의 함구령에 순종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이 다시 도졌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만진 사람이고 그러면 다른 고을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인간 안에 은총을 받고 싶은 욕망과 그 은총을 주는 이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함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맥베스와 그의 친구 뱅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마녀들을 만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가 되어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또한 뱅코에게도 예언해줍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는 없지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베스는 실제로 임금이 새로운 영지의 영주로 자신을 임명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부인은 맥베스보고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마녀의 예언을 기억하고 뱅코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게 시킵니다. 뱅코는 살해되지만, 아들은 탈출합니다. 어쨌든 맥베스에게 이제 은인은 던컨 왕이나 뱅코가 아니라 마녀들과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맥베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녀들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들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또 여성에게서 태어난 누구에게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왕궁 앞 숲이 왕궁까지 올라오게 되기 전까지는 안전하겠다고 말해줍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맥베스는 예언을 과신하고 자기 친구 맥더프의 가족을 학살하라고 명령합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인은 광기에 빠져 결국 죽습니다. 맥더프와 던컨의 아들 말콤이 이끄는 군대가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하여 맥베스의 성으로 진격하여 마녀의 예언 일부를 성취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맥베스는 맥더프와 대결하게 됩니다. 맥베스는 자신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살해될 수 없다고 자랑하지만, 맥더프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힘이 빠진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죽습니다.
맥베스가 예언을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예언한 이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주가 되고 왕이 된 것이 그들 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맙고 그들에게 순종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이 고쳐진 이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이 쓰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대학에 붙는다든지 하는 일이 잘 되게 될 것이란 말을 던져 그대로 되면 사람들은 무당을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 감사하게 되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게 됩니다. 어차피 50%는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 50%가 나중엔 주요 고객으로 돈을 뜯기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종 하지 않는 자녀에게 주던 은총을 계속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은총은 좋아지라고 주는 것인데 그러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은총은 바보가 되면서까지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항상 순종 하십시오. 그리고 순종 하기 위해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악으로 이끄는 이에게 감사하고 순종 하게 되어 참 은총이 끊기고 멸망으로 갑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박하고 각별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오늘은 깨끗하게 되는 믿음의 오늘입니다.
믿음 자체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 믿음을 믿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이 있으면 한순간 내려놓는 깨끗한 순간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울수록 깨끗하여지는 은총입니다.
간절함 속에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간절함과 아픔 속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사람의 길을 걷게하시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자아가 사라진 순간이 어찌보면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며
아무 말이 필요없는 순간입니다.
참된 치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합니다.
치유된 삶은 모든 순간이 기적의 순간임을 알기에 부여잡거나 떠벌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아침을 맞이하는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과 치유 주님과 믿음은 하나이며 받아들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세기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마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평균 수명의 두 배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연명 수명이 아니라, 삶을 활발하게 사는 건강 수명으로 팔십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의 총명함과 체력을 유지했고, 뇌는 전혀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도 맑지 못해서 후손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계속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만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도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알고 또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 앞을 내다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나병 환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지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주님 곁으로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
현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잡념을 없앤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중요한 것에 관심을 쏟는다는 뜻이다(스펜서 존스).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부활의 삶!'
오늘 복음(마르1,40-45)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병은 '피부병'입니다. 그리고 나병은 '소외병'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그러자 바로 그의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이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며 함구령를 내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그런데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단단히 이르신 함구령을 지키지 못하고, 나병이 치유된 기적 사화를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참기적, 참부활'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기적 사화'입니다. 이 사화는 '부활사화'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부활로 나아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부활의 삶, 곧 죽음의 상태를 이겨내고 부활로 나아가는 삶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부활의 삶을 위해 오늘도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화답송 후렴)
첫댓글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꿀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마르 1, 40-45)